소설리스트

암리타 (145)화 (146/237)

“그게 무슨 소리더냐? 멀쩡하던 애가 갑자기 왜?” 

놀란 시녀장이 시녀를 붙잡고 다시 물었으나 아이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그저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답답해진 그녀가 시녀를 끌고 내실로 향했다. 한사코 방으로 들어가지 않으려 하던 아이는 피를 쏟으며 바닥에 누워있는 동료를 보자 몸을 덜덜 떨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가 죽기 전에 토해낸 거품 섞인 피가 가슴 아래까지 번져있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녀에게로 다가간 시녀장이 손가락을 턱밑에 가져다 댔다. 맥박이 잠잠했으며 호흡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시녀장이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내젓는 것을 본 시녀 아이가 다시금 울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하나도 빠짐없이 고하거라. 옷장에서 나온 약이라니 무얼 말하는 거지?”

시녀장이 묻자 시녀가 울먹이며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바닥에 놓인 헝겊 주머니를 가리켰다. 시녀장이 몸을 숙이려던 찰나 어느새 다가온 린드가르트가 주머니를 한발 앞서 집어 들었다. 

“황손비……, 린드가르트 님.”

“후궁의 물건이 아닌가요? 물떼새 문양이네요.”

린드가르트가 들어 보인 주머니 표면에는 금박 물떼새 문양이 찍혀 있었는데 그 색상과 도안은 틀림없이 알훼니아 공국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끈을 풀어 주머니 입구를 벌리자 안쪽의 모습이 보였다. 주머니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보랓빛을 띤 작은 환약들이었다. 린드가르트가 손가락을 집어넣어 꺼낸 환약을 보자 시녀가 진저리를 치며 주저앉은 채로 더욱 뒤로 물러났다.

“저, 저, 저것이옵니다! 저희가 옷장 안에서 발견한 것이온데… 함부로 손대선 안 된다고 말렸는데… 힐다가…….”

그녀의 머릿속에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시녀장의 지시대로 온 방의 가구를 뒤지고 있던 때였다. 후궁의 옷을 보관하는 내실에 도착해 옷장을 열고 그 안을 확인하고 있었다. 걸린 옷들 사이에서 헝겊 주머니를 발견한 힐다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것을 흔들어 보였다. 

‘그냥 놔둬. 여기 있는 것들은 유디스 님이 아끼는 것들이란 말이야.’

‘보기만 하는 건데 뭐 어때? …여기 뭔가 들어있는데? 사탕 같아!’

‘사탕이 왜 옷장에 있어. 그냥 있던 자리에 다시 두라니까?’

말리는 그녀의 말에도 기어코 주머니 안에서 알을 꺼내든 힐다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설탕 냄새는 안 나네. 사탕이 아닌가?’

‘좀약일 거야. 그만 까불고 도로 넣어둬.’

‘이렇게 예쁜 좀약이 어디 있니?’

장난스럽게 힐다가 환약을 입안에 넣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만둬. 유디스 님 물건일 수도 있고 프리아 님이 쓰시는 것일 수도 있잖아.’

‘사탕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거 혹시 영약 같은 거 아닐까? 몸에 좋은 거라면 나도 한번 먹어볼래.’

‘미쳤어? 그런 거 잘못 먹었다가…….’

평소 장난기가 심하던 힐다가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환약을 들어 자신의 혀 위로 올려놓았다. 

‘윽, 이거 되게 써.’

오만상을 찌푸리며 불평하는 사이에 환약이 목구멍 안으로 넘어갔다. 정말 먹을 생각까지는 없었던 힐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먹어버렸네? 어쩔 수 없지. 영약이길 바라야겠어. 좀약이라고 해도 뭐, 배 한번 아프고 말 거야.’

‘너 그러다 큰일 난다. 어서 제자리에 돌려놔.’

익살맞은 힐다의 표정에 그녀도 안심했을 때였다. 약이 지독히도 썼는지 쓴 물을 꿀꺽 삼키던 힐다가 쿨럭하는 기침소리와 함께 핏물을 토해냈다.

‘힐다!’

‘나… 속이… 이상…, 타는, 살, 살려…….’

얼굴이 무섭게 변한 힐다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도와주고 싶었지만 몸이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던 그녀를 향해 눈동자를 깜빡이던 힐다가 허물어지듯 바닥으로 쓰러졌다. 바닥에 누운 힐다의 몸이 경련하며 팔다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휘었다. 

‘힐다! 힐다! 정신 차려! 힐다!’

힐다의 숨이 멎어 있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그녀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주머니 안에 들어있던 것을 삼킨 것이 확실하느냐? 똑똑히 보았어?”

시녀장의 질문에 겨우 그녀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울음을 삼키며 대답을 이어갔다.

“예,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장난삼아 삼키는 시늉만 하려고 했던 것인데 뱉지 못하고 그만 목으로 넘어간 것 같았습니다.”

시녀의 말을 들은 린드가르트가 얼굴을 찌푸리며 꺼냈던 환약을 다시 주머니 안으로 돌려놓았다. 만지기도 싫다는 듯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신의 시녀에게로 건네자 그녀가 손수건을 꺼내 린드가르트의 손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돌려주십시오. 백조궁 물건입니다.”

“이건 살인 증거품이다. 가져가서 태후께 고할 것이야.”

린드가르트가 반환을 요구하는 시녀장의 요청을 거절했다. 아직 약의 정체가 무엇인지 누구의 것인지 알아내지 못한 상태에서 태후에게 알리면 일이 커진다. 진짜 좀약이었다고 해도 꼬투리를 잡혀 자칫하면 백조궁 전체가 피바람에 휘말릴 수 있었다. 시녀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재차 반환을 요청했다.

“시녀 아이가 좀약을 잘못 먹어서 일어난 불행한 사고로 보입니다. 어쩌면 지병이 있는 아이라 약과는 무관하게 발병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유로 죽음에 이르렀는지 확언할 수 없으니 살인이라 칭하심은 무리가 있습니다. 저희 쪽에서 자세히 조사할 것이니 물건을 돌려주십시오.”

“알훼니아에서는 좀약을 이렇게 예쁘고 귀한 주머니에 보관하나 보군. 그래, 주인에게 물어보면 되겠어.”

좋은 생각이라도 난 것처럼 부러 표정을 밝게 바꾼 린드가르트가 아직도 떨고 있는 시녀 아이에게 물었다.

“후궁의 침실이 어느 쪽이더냐?”

“저, 저쪽이옵니다. 그렇지만 지금…….”

얼결에 후궁의 부재까지 고하려고 했던 시녀를 시녀장이 붙잡아 제지했다. 그러고는 프리아의 침실로 향하는 린드가르트와 시녀들 앞을 재빨리 막아섰다.

“후궁께서는 몸 상태가 좋지 않으시어 쉬고 계십니다. 일어나시는 대로 여쭐 것이니 이만 물러가 주십시오.”

“이 소동이 났는데도 아직도 잠을 잔다고? 자신이 부리던 아이가 절명했는데도 말이야. 매정하단 오해는 하고 싶지 않으니 직접 물어봐야겠어.”

마르타의 대답에 콧방귀를 뀐 린드가르트가 그녀를 비꼬았다.

“일의 연유도 듣지 못하신 상태에서 린드가르트 님을 뵙는다면 매우 놀라실 것입니다. 출정하신 폐하를 염려하시느라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몸을 추스르실 시간이 필요합니다. 폐하의 후궁을 이리 뵙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옵니다.”

“나 역시 레온이 그렇게 된 후로 한 번도 편히 쉬어본 적이 없어. 마르타, 너와 나는 한때 가족처럼, 친구처럼 주야를 함께하던 사이가 아니냐? 나에 대한 충심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나를 이리 박대하지 말아다오.”

마르타를 설득하기 위해 간절한 표정을 지은 린드가르트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예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그러나 단호하게 그 손을 풀어낸 린드가르트가 대답을 이어갔다.

“린드가르트 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모시는 분은 프리아 님이십니다. 모시는 분의 안위를 우선할 수밖에 없는 제 입장을 이해해 주십시오.”

순식간에 매섭게 표정을 바꾼 린드가르트가 시녀장을 노려보았다. 

“돌아가 주십시오. 이 일은 백조궁에서 해결하겠습니다.”

“사망자가 발생하고 심지어 증거품인 독까지 발견되었는데도 말이냐?”

“아직 독이라 확정 지을 수 없습니다.”

“네 주인이 내 아이에게도 독을 먹였을지 모르는 일이야. 이래도 내가 두 손 놓고 돌아가야 하느냐?”

“황자 님께서는 팔과 다리를 다치셨을 뿐 다른 이상은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왜 깨어나지 않는 거야? 분명 저 후궁이 무슨 일을 꾸몄을 것이다.”

“말씀을 삼가주십시오. 억측이 소문으로 돌아오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하시던 분이 아니십니까?”

아서가 죽은 후, 혼자된 린드가르트를 두고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입방아를 찧어댔다. 아직 어렸던 오웬과 엮기까지 하며 함부로 떠들어대던 그들이 지금은 그녀에게 정숙의 표본이라 말하며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린드가르트는 문란한 여인도, 인내와 정숙의 표본도 아니었다. 그저 실의와 우울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유폐를 자청했을 뿐. 이제는 사람들의 눈길 때문에라도 상복을 벗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린드가르트가 대답 없이 쏘아보기만 하자 시녀장이 고개를 숙이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만약, 이 주머니가 프리아 님의 것이라 밝혀진다 해도 사건을 무마하거나 일을 덮어 조용히 처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를 믿고 돌아가 주십시오.”

한때 자신의 시녀였던 마르타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린드가르트가 시녀의 손에서 주머니를 가져와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넌 항상 공명정대하고 심지가 곧은 사람이었지. 가끔 네 그런 면이 섭섭하기도 했어. 마르타, 너를 믿어보도록 하지.”

주머니를 돌려받은 시녀장이 린드가르트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시종을 불러 궁정의를 불러올 것을 지시한 후, 다른 시녀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사망자가 발생한 내실의 출입을 통제했다. 동료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어린 시녀는 처소로 돌아가 안정을 취하도록 했다. 

린드가르트가 돌아간 후 시녀장은 궁인들을 불러 모았다. 각 방으로 흩어져 수색에 여념이 없던 시녀들과 하녀들이 또다시 계단 아래로 모였다. 그녀들 앞에서 죽은 시녀가 발견한 헝겊 주머니를 들어 보이며 시녀장이 입을 열었다.

“모두 똑똑히 보아라. 이것과 같은 물건을 본 적이 있느냐? 전에 본 적이 있다면 자세히 고하거라. 또한 앞으로 이것과 같은 것을 보게 된다면 함부로 열어보지 말고 그대로 나에게 가져오거라.”

처음 보는 물건이다, 본 적이 없다 수군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 여인이 손을 들었다. 제비궁에서부터 따라와 프리아의 침실 청소를 맡고 있는 중년 하녀 헬사였다.

“전에 프리아 님의 침실을 청소하다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프리아 님의 침실에서 말이더냐?”

그녀의 말을 들은 시녀장이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예, 그렇습니다. 책장 선반에서 발견했지요. 위험하게도 높은 곳에 두꺼운 책들이 꽂혀있어서 위치를 바꿔드릴까 프리아 님께 여쭈었더니 그대로 두라 하셨습니다. 그 책들 뒤에 주머니가 숨겨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머니를 열어보았느냐?”

“아니요, 어찌 함부로 손을 댈 수 있겠습니까. 어제도 청소하면서 보았으니 아직 그 자리에 있을 것이옵니다.”

하녀의 증언에 이어 유디스와 유독 친하던 시녀 하나도 손을 들었다. 

“저도 본 적이 있습니다. 유디스 님이 휴가 가시기 전에 계절 지난 옷을 궤짝으로 옮기라 하셨는데 그 궤짝 안에 들어있었어요. 좀약이라고 생각해 그냥 두었습니다.”

후궁의 침실 그리고 후궁의 옷을 수납하는 전용 공간. 공교롭게도 두 곳 모두 후궁과 관련된 공간이었다. 동요를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시녀장이 모인 그녀들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다른 곳에서 같은 것을 한 번이라도 본 이가 있느냐? 잘 기억나지 않아도 좋고 비슷한 것이라도 좋다. 생각나는 게 있다면 말해보거라.”

하다못해 총애 받는 사내후궁을 저주하려고 다른 궁에서 사주한 주술 도구로 밝혀지기를 바랐으나 앞서 말한 두 사람 외에 같은 물건을 보았다는 이는 없었다. 깊어가는 침묵 속에서 해산을 명한 시녀장이 두 사람을 데리고 2층으로 향했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말했던 곳에서 어렵지 않게 헝겊 주머니를 찾아냈다. 그녀들을 돌려보낸 후, 혼자가 된 시녀장이 그 안을 확인하자 주머니는 어김없이 품고 있던 보랓빛 환약들을 꺼내 보였다. 

알 수 없는 이 주머니들만을 남기고 후궁은 어디로 간 걸까. 마르타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들이 진짜 독으로 밝혀진다면 후궁은 틀림없이 역모를 의심받을 것이다. 가장 가까이에서 황제를 모시는 후궁이 독을 가지고 있었단 이유만으로도 궁에는 피바람이 불 것이다. 

황제에게서 후궁의 보호를 부탁받았으나 독을 소지한 것조차 감싸줄 수는 없었다. 궁정의가 도착해 시녀의 사인이 독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밝혀진다면 이 일 역시 그저 오해였을 뿐이라고 웃고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맹독으로 밝혀진다면 마르타는 이 환약들을 전부 제출해 조사에 협조해야만 했다. 소식 없는 후궁이 안전하고 따뜻한 곳에서 눈을 피하고 있기를, 이 약들의 정체가 부디 흔한 좀약으로 밝혀지기를 마르타는 간절히 빌었다. 

마르타가 그렇게 내실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르타 님! 프리아 님을 찾았습니다! 산속 구덩이에 떨어져 계신 것을 경비병들이 발견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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