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44)화 (145/237)

이사벨의 시선도 그림으로 향했다. 황제의 초상이라면 이미 본 적이 있다. 산책길에서 들춰 보았던 올가의 수첩 그림일 것이라 생각해 시큰둥하던 그녀의 눈이 곧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그때 보았던 가벼운 스케치 수준이 아니었다. 시녀장의 손에 들린 것은 분명 오랜 시간을 들여 완성했을 정교한 초상화였다. 금방이라도 종이를 뚫고 나올 것처럼 생생했으나 얼마나 닮았는지,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황제의 얼굴뿐 아니라 윗옷을 걸치지 않은 반누드 초상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두 장도 아니다. 집었던 종이를 내려놓은 시녀장이 바닥을 헤쳐 남은 그림들을 확인했다. 다양한 옷차림을 한 황제의 초상에 이어 등장한 것은 한 몸으로 얽힌 연인의 그림이었다. 서로 입을 맞추는 장면에서부터 농염한 애무를 나누는 장면까지 은밀한 두 사람만의 시간이 그곳에 박제되어 있었다. 상당한 그림 실력 탓에 누가 봐도 두 사람이 황제와 사내후궁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렇게 망측할 데가…….”

탄식하는 시녀장 옆에서 이사벨은 몹시 당황해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다. 이상한 여자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미친 일까지 벌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황제와 소문의 사내후궁을 소재로 한 음란화가 시중에 나돌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그림들은 평생 궁 가까이 가보지도 못한 무지렁이들이 고정 관념을 거울삼아 그려낸 조잡한 물건들이었다. 

이런 걸 그려 어디다 쓰려고 한 것인지. 자기도 모르게 자꾸 그림으로 옮겨가는 시선이 남사스럽다. 보고 있자니 한 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황제와 사내후궁의 농염한 정사가 자꾸 상상이 돼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러면 안 된다. 체통을 지켜야지. 간신히 그림에서 시선을 뗀 이사벨이 부자연스럽게 헛기침을 뱉으며 손부채를 펼쳐 들었다.

황제의 여인들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수석 시녀들이 자의 혹은 타의로 정부가 되거나 새로운 후궁이 되는 예는 적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가문 좋은 귀족 처녀들 중에서 반반한 외모를 골라 뽑는 것이 수행 시녀였다. 그렇기에 황제에 대한 연심을 품었다 한들 죄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황제의 초상뿐 아니라 후궁과의 은밀한 시간까지 그림에 담아낸 시녀의 행동은 연심이라 포장하기에는 찜찜하고 더 나아가 소름 끼치기까지 했다. 관찰력과 재능이 뛰어난 그림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으나 대상을 향한 집요한 집착이 느껴져 불쾌한 감상이 들었다. 화가를 초빙한 것도 아니니 포즈를 취해주지도 않았을 텐데 이렇게 생생할 수가.  

“가관이로구나. 샅샅히 뒤져 남은 것이 없는지 모두 찾아내거라.”

얼굴을 찌푸린 시녀장이 살벌한 어조로 이사벨에게 지시를 내렸다. 괜히 앞장섰다가 이게 무슨 꼴이람. 이사벨이 툴툴거리며 남은 물건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사벨이 전에 보았던 작은 수첩은 평소 몸에 지니고 다니는지 방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마지못해 이사벨이 긁어모은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한곳에 모였다. 이미 발견한 그림 외에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폐하가 돌아오시면 보고드릴 것이니 너는 입을 다물도록 해.”

발견한 그림들을 돌돌 말아 한 뭉치로 만든 시녀장이 매서운 눈길을 이사벨에게로 돌렸다. 대답하며 고개를 숙이는 이사벨에게로 시녀장의 질문이 떨어졌다.

“후궁께서 전에도 빠져나가신 적이 있다고 했지?”

“예, 밤중에 홀로 창문으로 나가시어 본궁까지 걸어가셨습니다. 다음날 폐하께서 마차로 프리아 님을 데려다주러 오셨어요.”

“야밤에 홀로 움직이셨다고? 후궁께서 그리하시는 동안 너희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느냐?”

“송구하옵니다. 저희는 프리아 님께서 주무시는 줄로만 알았사옵니다.”

“한심한 것들. 후궁께서 무사하셨기에 너희들이 목숨을 부지한 것이다.”

백조궁 시녀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시녀장의 말에 이사벨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몰랐던 건 매한가지면서 직책 좀 높다고 이래라저래라야. 그나저나 사내후궁이 또 사라졌으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번엔 데려다줄 황제도 없었다. 황제도 없는 마당에 누구를 보러 간 거지? 몰래 정인이라도 만들었나? 

수행 시녀의 발칙한 연심을 보여주는 그림들 외엔 별다른 소득 없이 두 사람이 올가의 방을 빠져나왔다. 혹시 놓친 게 있을까 싶어 후궁의 침실로 돌아간 시녀장이 창문을 열고 아래를 살폈다. 침실 창문에 덧대놓았던 장치의 못이 빠져있었다. 창문을 이용해 밖으로 나가는 방법을 시연해 보인 경비병은 여인들은 무리일 수 있으나 사내라면 어렵지 않게 내려올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후궁은 창문을 이용해 밖으로 나갔을 가능성이 높다. 백조궁의 모든 궁인들이 계단 아래 모였다. 

“후궁께서 사라지셨다. 궁내에 계실 수도 있으니 모든 방과 가구 안까지 샅샅히 뒤지고 근방은 물론 본궁에 가 오늘 후궁을 목격한 이가 없는지 알아보고 오너라. 후궁께선 지금 연금 중이니 부재하신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아니 된다. 물어본 후엔 금전을 주어 꼭 입막음을 해야 한다. 명심하거라.”

사내후궁이 사라졌다는 말에 궁인들이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수군거림이 퍼져 나가고 있을 때 이사벨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시녀장의 지시에 끼어들었다.

“장서관에 가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목련궁 레지나 님과 친분이 있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찾아가신 게 아닌지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수색 장소에 장서관이 추가되었다. 정원과 호수, 자작나무 숲까지 프리아를 찾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시간이 흘렀으나 사내후궁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출정식에 가고 싶어 했기에 틀림없이 본궁에 갔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후궁을 목격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곧 날이 어두워진다. 날이 완전히 저물기 전에 후궁을 찾아야 했다.

초조해진 시녀장이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실내를 서성거리고 있을 때였다. 나이 어린 시녀 하나가 당황한 얼굴로 걸어와 시녀장 앞에 섰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프리아 님을 뵙고 싶다고 하시는데 어찌할까요?”

이런 상황에 손님이라니. 골치가 지끈 아파 온 시녀장이 지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어디에서 오신 누구시지? 지금 후궁께서는 오수에 드시어 뵙기 어려우시다고 전하여라.”

“그것이…….”

어린 시녀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설마. 불길한 예감에 따라서 뒤를 응시한 시녀장의 눈에 전신을 상복으로 감싼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오수라고 하기엔 꽤 늦은 시간이구나, 마르타 .”

수년째 검은 상복과 긴 베일로 자신을 감추고 있는 여인. 황자의 생모인 린드가르트다. 그리고 그녀는 시녀장인 마르타가 한때 모셨던 전 황손비이기도 했다. 린드가르트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며 검은 베일을 걷어올렸다.  

“황손비 저하!”

자신도 모르게 시녀장의 입에서 나온 호칭을 들은 린드가르트의 입가에 웃음이 패였다. 유폐를 자처할 때 시녀의 규모를 줄였던 터라 수행 시녀였던 마르타를 본궁으로 보냈었다. 

“오랜만에 들어보네. 그래도 이제는 황손비가 아니니까 이름으로 불러주길 바라.”

“미리 말씀해 주셨다면 제가 찾아뵈었을 텐데요. 송구스럽게도 프리아 님은 지금 주무시고 계시어…….”

한때 지척에서 일상을 가까이했던 사이로서 서회를 나누기도 전에 자신을 내쫓으려는 마르타의 발언에 린드가르트의 얼굴이 굳었다. 다른 수행 시녀들은 린드가르트의 요청에 의해 친구처럼, 언니처럼, 여동생처럼 살갑게 굴었으나 마르타만은 언제나 깍듯이 거리를 지켰고 그녀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전하네. 난 그래서 네가 참 좋아. 레온이 잘 지내는지 가끔 들여다봐달라고도 했는데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며?”

“레온 저하를 보살피는 분들은 따로 계시니까요. 잘 지내신다는 말을 전해 듣곤 했는데 안타까운 사고를 당하시어 심려가 큽니다. 건강한 분이셨으니 곧 의식을 차리고 회복하시리라 믿습니다.”

원칙주의자 마르타의 입에서 한치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뻔한 위로가 흘러나왔다. 이 여인은 설령 자식이 죄를 지어도 감싸지 않고 제 손으로 고발할 인물이었다. 그 완고함이 오웬의 마음에 든 것일 게다. 한때 황손비의 수행 시녀였으며 시녀장의 지위에까지 오른 이를 겨우 남첩의 보모로 보내다니. 홀리면 앞뒤 구분하지 못하고 감싸는 것이 황가 사내들에게만 내려오는 자랑스러운 내력인 것인가.

“그래, 내 아이가 아파. 그러니 어서 가서 네 후궁을 깨워. 출정식엔 오지도 않고 지금까지 잠을 자고 있다니 태평스럽기 짝이 없군.”

싸늘한 표정으로 말한 린드가르트의 지시에도 시녀장은 동요하지 않았다. 후궁이 황자를 해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생각하기에 그 소문은 인과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모함에 불과했다. 황자를 구하든 구하지 않든 후궁에게는 그 어떤 이익도 돌아오지 않았다. 후궁이 황자를 구하려 했다면 오직 황제에 대한 연심 때문이었으리라. 

“후궁께서 일어나시면 다녀가셨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후궁께서는 린드가르트 님께 따로 하실 말씀이 없으실 것으로 사료됩니다.”

시녀장의 대답을 들은 린드가르트의 얼굴이 분노로 물들었다. 그녀는 후궁의 침실이 있는 곳으로 한 발짝 다가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왜 할 말이 없어? 왜 그 자리에 있었는지. 왜 내 아이를 구하지 못했는지 어미인 나에게 말해야 될 것 아니야? 뜬 소문을 믿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나에겐 진상을 알아야 할 자격이 있으니까. 그래서 묻겠다는 거야.”

“린드가르트 님, 황자 전하의 일로 마음 아프신 것은 이해하나…….”

시녀장이 린드가르트의 앞을 막아선 순간, 내실 안쪽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문이 열리고 공포에 질린 시녀 아이가 뛰어나와 목소리를 높였다.

“마르타 님! 큰일 났습니다! 힐다가…, 힐다가 옷장에서 나온 약을 먹고 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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