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43)화 (144/237)

“시녀장님, 다시 준비해 올릴까요?” 

싸늘하게 식은 요리를 내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쉰 시녀가 시녀장에게 물었다. 후궁의 지시대로 준비한 식사를 내실 테이블에 올려두고 자리를 피한 것이 정오 직전의 일이었다. 후궁이 손도 대지 않은 식사를 시녀들은 벌써 몇 번이나 다시 준비해 올렸다. 

“후궁께서 드실 생각이 없으신 듯하니 그냥 치우거라.”

“예, 시녀장님.”

세팅되어 있던 식기와 접시를 치우며 시녀가 또다시 시녀장에게 질문했다.

“곧 티타임 시간이온데 어찌하면 좋을런지요?”

어제도 하루 종일 굶다시피 잠이 든 것을 깨워 빵과 스프를 몇 입 먹였을 뿐이었다. 장신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또는 황제가 다른 후궁의 처소를 먼저 찾았다는 이유로 골이 나 밥을 먹지 않겠다 시위하는 후궁을 숱하게 보아왔다. 그녀들은 대부분 몇 끼 정도는 건너뛰어도 거뜬할 정도로 건강하고 뽀얗게 살이 올라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사내후궁은 그렇지 못했다. 한때 가녀린 미인을 선황이 총애하자 후궁들은 앞다투어 안색을 창백하게 해준다는 납분을 찍어 발랐었다. 사내후궁이 그때에도 후궁의 신분이었다면 굳이 납분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파리하니 얼마나 좋으시겠냐며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샀을지도 모를 일이다.

남색은커녕 여색조차 모르던 젊은 황제의 몸과 마음을 하룻밤 만에 앗아갔다던 사내후궁의 소문은 익히 들어왔다. 후궁전 관리를 맡은 다른 시녀장에게서 미색이 빼어나단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흥미 본위의 소문에는 애초에 믿음을 두지 않기에 어느 정도 과장된 면이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던 중 백조궁 주인이 간밤에 본궁에 머물렀으니 연회에 앞서 시중을 들고 단장을 도우란 명을 받았다. 

시녀장이 오전 시간을 다 흘려보내고 나서야 황제의 내실 문을 열고 나온 사내후궁은 자신에게 쏠린 시선들을 느끼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얼핏 보면 여인으로 보일 정도로 곱고 아름다웠으나 찬찬히 살펴보면 사내다운 강단 있는 선 또한 틀림없이 갖추고 있었다. 다만 안색이 창백하고 몸의 선이 가늘어 병약해 보이는 것이 흠이었다. 황제가 사내후궁을 유리 공예품처럼 깨질세라 소중히 대하는 이유가 단박에 이해되었다. 바람이 분다고 날아가지도 세게 쥔다고 깨지지도 않겠지만 생기 없는 인형 같은 나른한 자태가 보는 이들에게 보호 본능을 일으키고 있었다. 

백조궁을 맡으라는 지시를 받은 후, 시녀장은 시종장에게 후궁께서 건강에 이상이 있으신 것이 아니냐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러자 노인은 원래 늘씬한 체형이기는 해도 아파 보일 정도로 마르지는 않았었다며 황제의 정열이 큰 탓에 후궁의 원기가 쇠한 것 같다는 답을 내놓은 후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황제의 나이 이제 갓 스무 살이니 한창때이기는 했다. 그 넘치는 활력을 혼자서 받아냈으니 몸이 축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온궁의 시녀들을 쥐락펴락하던 본궁 시녀장에서 하루아침에 후궁의 수석 시녀로 좌천되었으니 딱하다 또는 고소하다 여길 이들도 있겠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황제의 사내후궁에 대한 총애를 일각에서는 여인을 안아보지 못한 풋내기의 일탈로 치부했지만 그녀는 확신했다. 황제의 마음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며 사내후궁에게 내린 연금형은 형벌이 아닌 보호 조치의 일환일 것이다. 자신과 같은 고급인력을 고작 밥 안 먹는다 시위하는 후궁을 챙기는데 써먹는 것만 보아도 짐작되지 않는가.

황제가 넘치는 힘을 전장에 쏟아붓는 동안 시녀장은 그의 남첩을 좀 사람답게, 생기 있는 모습으로 바꿔놓는 데 매진하기로 결심했다. 황제가 떠나는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떠나보냈으니 애간장이 끊어질 듯 슬픈 것 정도는 이해한다. 이 날씨에 침의 차림으로 뛰쳐나가던 후궁의 표정을 보니 황제의 일방적인 총애도 아닌 모양이었다.

“디저트는 식감이 부드럽고 위에 부담을 주지 않는 것으로 준비해달라 전하거라.”

볼살 통통하니 귀엽던 선황의 후궁들은 단식하는 시늉만 하며 방 안에서 몰래 과자를 챙겨 먹기 일쑤였지만 사내후궁은 그럴 주변머리도 없어 보였다. 벌써 몇 시간이나 흘렀으니 이별한 슬픔도 조금은 희석되었을 것이다. 시녀장은 손을 들어 굳게 닫힌 후궁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프리아 님, 깨어계시는지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시녀장은 조금 더 큰 동작으로 다시 문을 두드렸다.

“식사를 거르신지 한참 되셨습니다. 들어가 안부 여쭙겠습니다.”

통보를 마친 시녀장이 손잡이로 손을 가져갔다. 달칵거리는 소음이 들렸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사내후궁이 안에서 문을 잠가버린 것이다. 발을 동동 구르는 어린 시녀들과는 다르게 시녀장은 동요하지 않았다. 

“하녀장에게 가서 여벌 열쇠를 달라 하거라.”

“예, 시녀장님.”

어린 시녀가 자리를 떴다. 어머, 이게 무슨 일이야? 품에 안은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남일 보 듯하는 이사벨을 향해 시녀장이 지시를 내렸다.

“프리아 님을 가까이에서 모셨다지? 네가 말씀드려보거라.”

“예?”

“나는 낯설어하실 수도 있지만 너에게는 마음을 열어주실 것이 아니냐? 어서 고하거라.”

그럴 리가. 전혀 친하지 않은 사이다. 이런 일은 유디스가 제격인데 며칠만 일찍 돌아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다못해 올가라도 있었다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이사벨이 침실 문을 두드렸다. 

“프리아 님, 저 이사벨입니다. 저희들이 걱정이 되어 그러니 문 좀 열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여러 번 두드리며 호명하는 목소리에도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인 이사벨이 난처한 표정으로 시녀장을 돌아보았다. 우리 안 친해요.

“깊이 잠이 드신 게 아닐까요? 좀 더 기다려보시면 나오실 거예요.”

속이 들여다보이는 이사벨의 변명에 시녀장이 호통을 쳤다.

“한심한 것 같으니. 지금까지 그런 안일한 자세로 후궁을 모셨느냐? 목이 달아나고 싶어?”

아니, 문 잠그고 나오지 않는 건 사내후궁인데 왜 제 목이 달아나야 하나요. 억울해진 이사벨이 소심한 동작으로 강아지를 더욱 끌어안았다.

“그 개 좀 치우거라. 지금이 한가롭게 네 강아지나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로 보이느냐?”

“아닙니다. 이 아이는 프리아 님이 키우시는 강아지예요. 폐하께서 선물로 내리셨어요.”

정이 들어 가능하면 사직할 때 데려가고 싶지만 간 크게도 황제가 후궁에게 내린 하사품을 달라 할 순 없었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입술을 삐죽이는 수행 시녀의 한심한 꼴을 본 시녀장이 혀를 끌끌 찼다. 

“수행 시녀란 것들이 하나같이 한심하기 짝이 없어! 쓸만한 녀석 하나 없으니 후궁께서 그간 얼마나 불편하셨겠느냐? 휴가 갔다는 아이는 대체 언제 돌아온다는 것이야?”

사내후궁을 가장 따랐다던 수석 시녀가 부재중이지만 백조궁 꼴을 보아하니 기대도 되지 않는다. 이리 마음 붙이실 곳이 없으니 문을 잠그시는 게지. 

이런 취급은 처음 당해보는 이사벨이 시녀장에게 대들기 직전 여벌 열쇠를 가지러 갔던 시녀가 때맞춰 돌아왔다. 급히 받아든 시녀장이 틈새로 열쇠를 꽂아 넣었다. 

“프리아 님, 저희 들어가겠습니다.”

드디어 침실문이 열렸다. 황급히 안으로 들어선 시녀장이 서늘한 공기에 놀라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어서 가서 창문을 닫거라.”

시녀가 창문을 닫으러 바삐 움직이자 시녀장도 후궁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침대로 향했다. 그러나 커다란 침대 위에는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이불을 들어보아도 나오는 것이 없었다. 

“욕실에 계신 게 아닐까요?”

어떻게든 제 효용을 증명하려 나선 이사벨이 말과 동시에 욕실 방향으로 뛰었다. 한발 늦게 도착한 시녀장이 욕실에 들어서자 이사벨이 고개를 저으며 안에서 뛰쳐나왔다.

“여기에도 계시지 아니합니다.”

이사벨의 말을 들었음에도 시녀장은 직접 욕실 안으로 들어가 하나하나 뒤지며 후궁의 부재를 확인했다. 

“저희가 보지 못한 사이에 안에서 나오신 게 아닐까요?”

“안에서 문이 잠겨있지 않았느냐?”

“열쇠를 쓰셨을 거예요.”

“후궁께서 열쇠를 갖고 계셨어?”

침실과 내실의 문은 열쇠가 없어도 안쪽에서 잠글 수 있도록 간단한 장치가 붙어있었다. 시녀장의 물음에 이사벨이 말끝을 흐렸다. 열쇠관리는 유디스의 소관이라 지금까지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저는 잘 모르는…….”

“그럼 누가 알고 있지?”

“……아! 올가! 올가 님이 갖고 계세요!”

유디스가 교육을 빙자한 장황한 수다를 떨며 올가에게 열쇠를 넘기던 장면이 이제야 생각이 났다. 분한 마음에 적극성이 살아난 이사벨이 급히 뛰어나갔다.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여전히 이사벨에 대한 믿음이 없는 시녀장이 그녀의 뒤를 따라 복도로 향했다. 먼저 올가의 방에 당도한 이사벨이 서둘러 안을 살폈다. 아직 짐을 챙겨가지 못한 것인지 방주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방주인이 없는 새 개인 짐을 뒤지는 것은 옳지 못한 행위였으나 사내후궁의 행방을 알기 위해서는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이사벨은 얼굴을 찌푸리며 하는 수없이 전 동료의 사물을 헤집기 시작했다. 

서랍에 들어있는 것이 꽤 많아 수습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거친 손길로 물건부터 꺼내놓았다. 수수한 옷 몇 벌과 신발, 보잘것없는 장신구가 보금자리에서 끌려나와 바닥으로 던져졌다. 서랍 깊숙한 곳에 무언가 숨겨진 것이 있다. 손끝으로 더듬어가던 이사벨이 눈을 빛냈다. 손을 더럽혀가며 기껏 꺼낸 것이 한 뭉치의 종이임을 알아채자 실망하며 그것 역시 아무렇지 않게 바닥으로 내던졌다. 

“혹시 이것 아니더냐?”

어수선한 이사벨과는 다르게 꼼꼼한 눈길로 방안을 확인하던 시녀장이 구석에 박힌 못에 걸린 열쇠 꾸러미를 발견했다. 

“아……. 맞는 것 같아요.”

멀쩡히 벽에 걸려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어수선하게 방을 뒤진 자신이 부끄러워진 이사벨이 소심하게 동의했다. 시녀장이 챙겨왔던 여벌 열쇠와 겹치자 다른 곳 없이 들어맞았다. 

“열쇠가 총 두 세트인데 유디스님과 하녀장이 한 세트씩 갖고 있었다고 들었어요.”

“그렇다면 후궁께선 내실로 나오신 적이 없다는 말이 되는구나.”

“예, 그렇……. 아! 창문! 창문이 열려있었잖아요. 창문으로 나가신 게 틀림없어요. 예전에도 그렇게 창문으로 빠져나가신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페하께서 장치를 덧대라고… 엇? 어떻게 나가셨지?”

황제의 지시로 분명 창문를 수리한 것이 생각났다. 이사벨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종이를 발견한 시녀장이 그중 한 장을 집어 올렸다.

“이건 폐하의 초상이 아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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