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눈에 익도록 기다릴 여유조차 없다. 무작정 뛰쳐나간 프리아가 곧 허리춤에 와닿는 무언가에 부딪쳐 짧게 신음했다. 이게 뭐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쌓여있던 것들이 와르르, 한순간에 무너지며 바닥을 뒤덮었다. 프리아는 손을 더듬어 가장 가까이에 떨어져 있는 것을 조심스럽게 확인했다.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딱딱한 외피, 각진 모서리, 손가락 끝에 걸리는 익숙한 종이의 감촉. 책이다.
그사이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바닥을 뒤덮은 책의 권수를 가늠했다. 수십 권 아니 적어도 수백 권은 되어 보인다. 한 번에 옮길 수 없는 양일 텐데 몇 번을 오가야 했을까.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책이나 읽고 있으란 건가.
처소에 갇힌 신세이긴 했지만 비밀 통로가 있어 오갈 수 있는 곳은 많았다. 온실이 있는 오웬의 개인정원을 비롯해 다락방 침실과 여러 개의 내실을 보는 이 없이 오갈 수 있었으며 호수와 자작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길도 있었다. 눈앞의 어두운 통로는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오웬도 다 알지 못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복잡한 개미굴 구조를 하고 있었다.
오웬 나름대로 연인을 지키고자 내린 결정이라는 걸 안다. 레온의 사고로 뒤숭숭한 이 상황에서 소문의 당사자인 프리아가 출정식에 모습을 보인다면 곱지 못한 눈길들이 쏟아질 뿐만 아니라 험담의 대상이 될 뿐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러나 오웬은 그런 것 따위 프리아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수군거리는 시선을 피해 책 더미에 파묻힌 채 그저 오웬을 기다리기만 하는 생활을 프리아는 원한 적이 없었다. 지금 프리아가 원하는 것은 오직 오웬을 만나는 것뿐이었다. 자신을 외면한 채 돌아보지 않던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채 영영 이별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한들 이 길 끝에서 프리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원한 안식이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냉정한 현실이 외려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프리아의 등을 떠밀어주었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까. 본궁으로 간다 한들 이미 늦었다. 만날 수는 없어도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을 수만 있다면. 여러 갈래로 나뉜 통로 앞에서 고민하던 프리아가 가장 어둠이 짙은 공동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쪽이 숲 방향이긴 한데 아직 정비를 못 했어. 뭐가 나올지 모르니까 가능한 지상을 이용해.’
유령도 해골도 무섭지 않다. 이미 예전에 끊어졌을지도 모르는 삶을 간신히 이어왔으니 멀지 않은 미래에 그들과 같은 신세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벌써 몇 번을 넘어졌는지 모른다. 발끝에 채이는 것이 돌인지, 해골인지 동물의 뼈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를 따라 걷고 또 걸어갔을 뿐이다. 자물쇠가 삭은 철문 두 개를 비틀어 열고 한참을 걸어간 끝에 희뿌연 빛이 쏟아지고 있는 동굴 입구에 닿았다.
밖으로 발을 떼놓기가 무섭게 세찬 바람이 휘몰아쳤다. 어깨에 걸치고 있는 숄이 날아가 버릴 것 같아 프리아는 양 끝을 잡아 가슴 앞에서 단단히 비끄러매었다. 흐린 하늘이었지만 동굴 안과는 비교 할 수 없이 밝았다. 그 덕분에 온통 흙먼지투성이가 된 다리와 신발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생채기가 나 피가 맺힌 무릎의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프리아는 힘차게 발끝에 힘을 실었다.
숲 입구였다면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했겠지만 다행히 동굴은 산 중턱에 걸쳐있었다. 잎을 모두 떨군 자작나무 숲이 자아내는 풍경은 스산하고도 쓸쓸했다. 나무들은 모두 거뭇거뭇한 상처를 흰 몸통 가득 달고 있었다. 프리아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마다 나무에 기대 짧은 휴식을 취했다.
겉은 하얗지만 한 겹 벗겨내면 시커먼 속을 드러내는 나무가 프리아는 마치 자신의 병든 몸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몸 또한 흰 피부 아래 독에 절은 피가 맴돌고 있어 벗겨내면 금방이라도 썩은 검은 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오직 빽빽한 나무들뿐이다. 가지가 떨어져 나간 옹이마다 거인의 눈동자처럼 커다란 상흔이 패였다. 수백수천 개의 눈동자가 프리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이 가늠되지 않았다. 수도를 빠져나가기 전까지는 군은 행군의 속도를 높이지 않는다. 황군의 위용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말 탄 기사들은 환호하는 이를 향해 손을 흔들고 병사들은 묵묵히 걸어 그 뒤를 따랐다. 행렬의 선두에 오웬이 있을 것이다. 이미 늦었다 하더라도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리에 힘이 빠졌다. 발을 잘못 디뎌 뒹굴어도 나무들이 빽빽하게 심어져 있어 얼마 가지 못해 멈추곤 했다. 그때마다 등을 대고 누워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까마귀 한 마리가 프리아의 뒤를 쫓아 천천히 나무 사이를 이동하고 있었다.
‘나 아직 죽지 않았어.’
중얼거릴 때마다 뜨거운 입김이 새어 나와 공중으로 흩어졌다.
겨우 도착한 정상에서 프리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지난가을 기르가 앉혀주었던 바위 위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황궁을 빠져나가는 행렬의 모습이 보인다. 커다란 깃발이 나부끼는 곳에 오웬이 있을 것이다.
시종장이 준비한 정복은 어떤 옷일까. 분명 잘 어울릴 것이다. 어떤 표정으로, 어떤 목소리로 출정을 명하고 저 수많은 병사들을 지휘할까. 전장까지 가는 길은 멀지 않을까. 힘들지 않을까.
부디 건강하기를.
많이 힘들지 않길.
가까이서 보았다면 좋았겠지만 멀리서나마 인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고생해서 올라온 것이 허무하도록 행렬은 짧은 시간에 방향을 꺾어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않는 자취를 프리아는 오래 바라보았다.
세찬 바람 속 흔들리고 있는 프리아의 어깨 위로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얼굴에 와닿는 차가운 감촉에 고개를 들었다. 조금씩 내리던 비가 얼어붙어 싸라기눈이 되었다. 올해 첫눈이었다.
오늘은 프리아가 세상에 태어난 날이었다. 자신을 세상에 내보내며 짧은 생을 마감한 어머니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뿐이라 하루를 온전히 애도로 보냈다. 무사히 겨울을 지나 봄이 되면 그제야 한 해를 무사히 보낸 것을 기뻐하며 기르와 둘이서 축하했다.
‘네 생일은 언제지?’
지난여름, 온 나라가 탄신제로 들썩이던 밤에 오웬이 질문을 던졌다. 태어난 날 만큼은 온전히 어머니에 대한 추모로 보내고 싶어 날짜를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고 얼버무렸었다.
‘첫 서리가 내릴 때 즈음이기도 하고 가끔은 첫눈이 내릴 때이기도 합니다.’
‘첫 서리라 하면 머지않아 곧 내릴 터인데?’
‘제국과는 기후가 다르니까요. 겨우내 눈 한번 내리지 않고 지나가는 일도 잦습니다. 제 고향에 첫 서리가 내릴 때쯤이면 제국은 한겨울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자신이 끝내 생일을 말해주지 않자 오웬은 제멋대로 생일을 지정한 후 축하해 주겠다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네 생일은 첫눈이 오는 날로 하지.’
제국에서도 오늘은 첫눈이 내린다.
“신기해.”
어느새 바람이 잦아들고 눈송이가 더욱 굵어졌다. 프리아는 고개를 하늘로 젖히고 쉼 없이 떨어져내리는 흰 눈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내린 비로 출정식이 미뤄졌다.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려 재개했지만 끝나고 나서도 바닥이 진창이라 물이 어느 정도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출발했다.
오웬의 시선이 뒤로 향할 때마다 긴장한 기사들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황제가 냉랭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는 이유를 알고 있는 시종장이 푹푹 한숨을 쉬며 딱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아쉬우시면서 왜 출정식에 오지도 못하게 하신 겁니까.’
백조궁을 제외한 모든 후궁전의 주인이 모여 황제를 배웅했지만 가장 보고 싶은 이가 없으니 표정이 풀어질 리 없었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첫 전쟁에 나선 젊은 황제가 긴장하고 있는 것으로만 보일 것이다.
혹사당한 늙은 육체가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시종장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삐에서 한 손을 떼어 다른 팔을 바삐 주물렀다. 어젯밤에 쉬지도 못하고 황제를 도와 수백 권이 넘는 책을 백조궁까지 운반했기 때문이었다. 소리가 울릴 수 있다며 수레 사용을 거부한 까닭에 순수하게 팔 힘으로만 그 많은 책을 옮겨야 했다.
길이 익숙한 오웬은 막힘없이 걸어갔지만 시종장은 가뜩이나 침침해진 눈이 밤이면 더욱 어두워진 탓에 몇 번이나 낯선 통로를 구를 수밖에 없었다. 한 손에는 등불을 들었기에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책의 권수가 제한되었다. 폐하께 짐을 들게 할 수 없다며 시종장이 책과 등불을 모두 빼앗은 탓에 오웬은 할 수 없이 빈손으로 통로를 걸어갔다. 결국 진척이 느려 짜증이 나자 등불만을 시종장에게 들게 하고 책의 운반을 도맡았다.
연금시켜 장서관 출입을 막아놓고 책을 가져다주다니 병 주고 약 주는 셈이었다.
‘이러신다고 좋아하시겠습니까?’
시종장은 지적하는 잔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고생해서 그 많은 책을 옮겨놓고도 오웬은 아쉬운 표정으로 닫힌 문만을 바라보았다. 뵙고 가시지 않겠냐는 시종장의 말에도 오웬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내저었다.
황군의 행렬이 황성을 거의 다 빠져나왔을 무렵이었다. 소리도 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차가운 것에 진저리를 치며 시종장이 우장을 꺼내들었다. 비가 그쳐 더는 내리지 않을 것 같더니 어느새 눈이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폐하, 잠시 멈춰주십시오. 눈이 내리니 우장을 씌워드리겠습니다.”
황제에게서 답이 없었다. 시종장은 더욱 소리를 높여 황제가 탄 말 가까이 다가갔다.
“폐하, 눈이 옵니다. 올해 첫눈이 옵니다.”
시종장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멍하니 앞을 바라보던 오웬이 손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 위로 희고 차가운 결정체가 떨어졌다가 금세 녹아 사라진다.
“폐하?”
기온이 낮은 편이라 겨울이면 지겹게도 퍼붓는 눈을 볼 수 있는 곳이 제국이었다. 남국에서 온 이방인처럼 오웬은 낯선 것을 보는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잔뜩 찌푸린 잿빛 하늘이 싸라기눈을 연신 땅 위로 내려보내고 있었다.
“……선물을…….”
오웬의 입이 달싹거리는 것을 본 시종장이 귀를 기울였지만 소리가 작아 들려오지 않았다.
“폐하? 외람되지만 듣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오웬의 고개가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입술이 다시 열렸으나 시종장은 이번에도 듣을 수 없었다.
준비해두었던 생일 선물을 주지 못하고 떠나왔다. 너무 멀어 듣지 못하겠지만 오웬은 그리운 이를 떠올리며 입술을 움직였다.
생일 축하해, 프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