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등을 떠밀기라도 한 것처럼 프리아는 기억도 나지 않는 꿈에서 순식간에 빠져나왔다. 장작불이 타오르고 있는 실내의 공기는 따뜻했으나 프리아의 몸은 온통 식은땀으로 젖어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일까. 오웬이 떠난 후 침대에 누워 생각을 갈무리하다 잠이 들었다. 뭐라도 좀 드셔야 한다며 귀찮게 깨우는 시녀들의 성화에 잠시 일어나 입안에 무언가를 밀어 넣었던 기억이 난다. 그녀들이 나간 후 다시 잠이 들었다.
프리아의 시선이 협탁 위에 놓인 시계로 향했다. 작은 바늘이 숫자 11을, 긴 바늘이 7을 가리킨다. 벌써 한밤중인가. 더는 잠이 오지 않아 프리아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로 향했다. 호수에 뜬 달을 보고 싶었다. 오웬의 고백이 있었던 밤, 호숫가 집에서 그와 함께 보았던 아름다운 풍경을 혼자서라도 다시 한번 보고 싶어졌다. 길게 드리워져 있는 커튼을 젖히자 구름이 잔뜩 끼어 온통 흐린 겨울 하늘이 올려다보였다.
어째서?
백야, 밤이 되어도 해가 지지 않는 곳이 있다며 언젠가 기르가 설명해 주었던 현상이 떠올랐으나 프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대부분 얼음으로 뒤덮인 머나먼 땅에서 여름과 겨울 동안 발생하는 일이라고 했다. 여름은 이미 지나갔고 지난겨울을 제국에서 보냈으나 밤이 낮으로 바뀌는 광경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설마.
단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린 프리아가 침실을 빠져나가 내실로 향했다. 등받이 의자에 몸을 기대지도 않고 꼿꼿하게 허리를 세워 앉아있던 시녀장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프리아 님, 일어나셨습니까?”
침대에 누워 오래 잠을 자느라 흐트러진 프리아의 매무새를 본 시녀장이 여상한 말투로 덧붙였다.
“목욕물을 준비하겠습니다. 식사부터 하시지요.”
목욕과 식사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프리아는 간절한 말투로 시녀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출정식은? 오늘 10시에 한다고 하지 않았어?”
“날이 궂어 잠시 미뤄졌습니다.”
다행이다. 아직 시작되지 않았구나. 출정식이 연기되었기에 시녀들이 깨우지 않은 모양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던 프리아의 귀에 시녀장의 다음 말이 들려왔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11시부터 재개되었습니다. 이제 슬슬 끝나갈 시간이네요.”
뭐?
그게 무슨 소리지?
잠시 눈을 깜빡이고 있던 프리아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
“지금 출정식을 하고 있다고?”
“예. 축포가 들려오는군요. 무사히 끝난 것 같습니다.”
멀리서 펑 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축포를 마지막으로 출정식은 종료되고 군대는 전장으로 향하는 첫걸음을 떼게 된다.
“왜 깨우지 않았어?”
출정식은 단순히 잠이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불참을 통보할 수 있는 행사가 아니었다. 궁의 일원이라면 당연히 참가해 박수를 보내야 하는 자리였다. 하물며 프리아는 황제의 후궁이자 알훼니아 공국의 대표이기도 했다.
“폐하께서 프리아 님의 출정식 참가를 금하셨습니다.”
“뭐?”
“아쉬우시겠지만 기록화가 완성되기를 기다려주십시오. 시종장께서 따로 복제화를 준비해 보내주신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오웬이 날 못 오게 했다고? 대체 왜?”
화가 나서? 레온의 일로 화가 나서 날 못 오게 한 거야? 충격을 받은 프리아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시녀장이 차분한 말투로 프리아를 달래기 시작했다.
“프리아 님의 안전을 염려하여 내리신 결정입니다.”
“……갈 거야.”
몸을 떨고 있던 프리아가 단호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늦게라도 가야 한다. 오웬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프리아 님,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몸에 해롭습니다. 지금 가신다 해도 폐하를 만나 뵙지 못하십니다.”
그런 것 따위 이미 알고 있다. 지금 달려간다 해도 이미 늦었다. 행렬의 끄트머리만 겨우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심을 굳힌 프리아가 침의 차림으로 내실을 빠져나갔다. 복도를 달려 계단을 내려가는 프리아의 뒤를 시녀장과 시녀들이 쫓았다.
“프리아 님! 그런 차림으로 나가시면 안 됩니다!”
“프리아 님! 감기 드세요! 밖에 비바람이!”
“문 열어! 당장!”
현관을 지키고 있던 시종이 프리아의 서슬에 놀라 황급히 문을 열었다. 현관문을 밀어젖힌 순간 매서운 겨울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바람이 온통 프리아의 머리카락을 흐트러 놓았다.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걸어가는 통에 얇은 침의가 펄럭이며 허벅지 위까지 끌어올려졌다. 어느새 신고 있던 실내화가 벗겨져 바닥을 뒹굴었다. 저걸 어떻게 해. 시녀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달려온 경비병들이 일제히 프리아의 앞을 막아섰다.
“비켜!”
전에 없이 화난 얼굴로 프리아가 경비병들을 향해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이 앞으로는 더 가실 수 없습니다.”
살갗에 달라붙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후궁의 침의를 보지 않으려 애쓰며 경비병이 고개를 숙였다.
“너희들이 뭔데 날 못 가게 해?”
“황명이 내려왔습니다. 이제부터 이 담장 밖으로는 나가실 수 없습니다.”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경비병의 예상치 못한 발언에 넋이 빠진 프리아의 몸을 이사벨이 달려와 숄로 감쌌다.
“프리아 님, 날이 찹니다. 안으로 들어가셔야 해요.”
“올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사람처럼 프리아는 어제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 수행 시녀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흠칫 놀란 이사벨이 난처한 표정으로 프리아의 시선을 피했다.
“……올가 님은. 몸이 좋지 않아 요양 중이세요. 아마 돌아오시지 못할 거예요.”
시녀장은 올가가 건강상의 이유로 사직한다고 했지만 이사벨은 연줄을 통해 진상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황제와 독대한 자리에서 물의를 일으켜 엄청난 분노를 사게 되었다는 것이다. 설마 몸을 던져 유혹을 시도하기라도 한 것인가. 생각이 있나 없나. 상대를 봐 가며 도전할 것이지. 기어코 일을 저지르다니. 입궁 초기와는 다르게 황제의 눈에 드는 일은 말끔하게 포기한 이사벨이 올가의 만용에 혀를 내둘렀다.
총애를 받으면 뭘 하나. 자신이 없는 동안 사내 후궁이 다른 이와 눈이 맞을 것을 두려워하기라도 했는지 황제는 백조궁의 주인에게 연금형을 내리고 떠났다. 장미궁 시녀들은 사내 후궁이 황자에게 해코지를 한 벌을 받은 게 아니냐며 신나게 떠들어대는 모양이지만 이사벨의 생각은 달랐다. 황제가 진정 사내후궁이 황손에게 해를 끼쳤다고 생각했다면 겨우 이 정도로 끝날 리 있겠는가. 참수형이라면 모를까 연금이라니. 외출하는 동안 아끼는 새를 새장에 고이 가두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사내 후궁이 연금을 당하건 말건 이사벨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으나 올가의 부재는 큰 타격이었다. 당황스럽게도 본궁의 시녀장이 수석 시녀로 부임해온 까닭에 수석 시녀 대리를 맡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으나 워낙에 깐깐하고 엄격한 성격으로 유명한 터라 전처럼 마음편히 농땡이를 부릴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이사벨은 관리부에 가 사직을 요청했다. 유디스가 돌아오는 대로 이 살벌한 곳을 탈출할 계획이다.
“폐하께서 프리아 님에게 연금을 명하셨습니다. 백조궁내에서는 자유롭게 지내실 수 있고 정원에 나가시는 것 또한 가능하지만 그 밖으로는 나가실 수 없습니다. 기한은 폐하께서 환궁하실 때까지입니다.”
이제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경비병의 통보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프리아는 그 이후로 입을 닫은 채 얌전히 내실로 돌아왔다. 시녀장의 설명을 듣고 있던 프리아가 멍한 얼굴로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호수는? 거기도 갈 수 없어?”
“죄송합니다. 정원 밖으로는 나가실 수 없습니다. 호수 경관은 실내와 정원에서도 감상하실 수 있고 정원 안에 연못도 있으니 안전한 곳에서 경치를 즐기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안전이라. 시녀장의 말을 듣고 있던 프리아가 헛웃음을 지었다. 출정식에 가지 못하게 한 것도 내 안전을 위해서고 온실 속 새처럼 가둬 자유를 빼앗은 것도 안전을 위해서라. 어떤 말로 포장해도 이것은 형벌이었다. 고작 뺨 두 대만 때리고 말았던 것이 후회된다. 프리아가 사랑하는 젊은 폭군의 애정은 지독히도 이기적이었다.
“시종장은?”
“폐하와 함께 떠나셨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본궁의 시녀장을 후궁의 수석 시녀로 앉힌 것 또한 지나치게 과보호적인 처사였다. 그녀는 시종장에 필적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백조궁에 있는 이상 그 어떤 지원이라도 아낌없이 받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프리아가 단 한 번이라도 이러한 것을 원했던가.
“나가줬으면 좋겠어. 혼자 있고 싶어.”
“오래 굶으셨습니다. 식사를 들이고 물러나겠습니다.”
“지금은 먹고 싶지 않아. 씻고 나서 먹을 테니 내실에 두고 가.”
“시중들 아이를 부르겠습니다.”
“혼자 있겠다고 했지? 아무도 들이지 마. 명령이야.”
작은 짐승이 발톱을 세우듯 으름장을 놓는 프리아의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던 시녀장이 고개를 숙였다. 젊은 시절 까다롭기로 소문난 후궁 여럿을 모셨던 그녀다. 애첩을 가두고 떠난 철부지 황제는 물론 출정식에 가지 못해 골이 난 후궁의 속마음 정도는 훤히 내다볼 수 있었다. 우선은 제풀에 지쳐 화가 풀릴 때까지 말을 들어주는 시늉을 해주어야 했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필요하면 불러주십시오.”
시녀장이 내실 밖으로 나가자 프리아가 앉아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욕실과 침실 어디에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그고 만일을 대비해 침실 창문은 일부러 반쯤 열어놓았다.
오랜만에 비밀 통로로 향하는 위장 패널 앞에 섰다. 한동안은 프리아의 몽유병을 걱정하며 오웬이 통로를 막아둔 까닭에 이용할 수 없었다. 태의에게서 몽유병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서도 바로 열어주지 않았는데 오늘은 어쩐지 문이 막혀있지 않을 거란 확신이 섰다. 숨겨진 손잡이인 월계수 잎을 아래로 당기자 소리도 없이 패널이 안쪽으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