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40)화 (141/237)

“앞으로는…….” 

지친 음성이 힘겹게 입술을 뚫고 나왔다.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연인에게로 오웬은 씁쓸한 경고의 말을 건넸다.

“오해 살 행동을 하지 마.”

적어도 자신이 궁을 비우는 몇 달의 기간만이라도 그래줬으면 한다. 오웬은 프리아가 더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를 원했다. 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행동한다 한들 세간은 황제의 남첩을 고운 눈으로 봐주지 않을 것이다. 

프리아가 린드가르트를 만나 사과한다면 그녀의 마음이 풀릴까. 그렇지 않다.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것만으로도 더욱 분노에 불을 붙여 그 의도를 의심받을 것이다.

자신이 궁에 있는 동안에는 남색에 미친 황제 행세를 하는 것만으로도 프리아를 보호할 수 있다. 프리아가 사통했다는 소문이 퍼진다 한들 황제인 자신이 묵살하면 그만이었다. 

전쟁에 나간 자신이 그대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프리아는 어떻게 될까. 강요나 다름없는 선택지가 내려진다. 프리아의 선택에 따라 유폐궁 또는 수도원으로 보내져 평생을 나오지 못한 채 쓸쓸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만약…….”

차마 오웬 자신의 입으로 그다음 말을 남길 순 없었다. 

‘만약 내가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면 널 자유롭게 해줄게.’

황제의 손을 탄 후궁은 재가가 허락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오웬은 혼인을 무효로 돌려 프리아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줄 생각이었다. 관련 문서를 이미 작성해 남겨두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만에 하나의 결과일 뿐. 자신이 사망하고 장례까지 치러져 영영 돌아올 수 없음이 확실시되었을 때에만 봉인이 풀리게 될 것이다. 팔다리 하나쯤 잃는다 해도 아니 양다리 모두 잃어 걷지 못하게 된다 해도 돌아올 것이다. 죽지 않고서는 프리아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오웬의 눈동자를 올려다보고 있던 프리아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를 힘들게 하려던 것이 아니다. 오웬이 그토록 아끼는 조카를 위험에 빠뜨리려고 레온을 만났던 것이 아니었다. 투병하는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했던 노력이 사통을 의심받는 결과로 돌아올 줄도 몰랐다. 

먼 곳으로 떠나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될 그에게 이런 기억을 마지막으로 남겨주고 싶지 않았는데. 떠난 기르에게서는 소식이 없고 자신의 몸 상태는 날로 나빠져가고 있었다. 올가의 도움을 받아 감추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오웬의 출정이 조금만 늦어졌어도 꼼짝없이 들키고 말았을 것이다. 레온의 사고로 고통스러워하는 그에게 더 이상의 짐을 안겨주고 싶지 않다. 

잠은 좀 잤어요? 밥은 먹었어요? 평소 같았으면 쉽게 나올 말이었으나 도통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있던 프리아의 눈에 핏물이 번진 붕대로 감겨있는 오웬의 오른손이 보였다. 시녀를 부르려 했었으나 오웬에게 제지당한 이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급한 대로 손수건을 찾아 붕대 대신 묶어주기 위해 프리아가 몸을 돌렸다. 서랍에서 잘 다려진 손수건을 찾아 꺼내들었을 때 철컥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오웬이 프리아의 침실을 빠져나간 것이다. 

인사도 없이?

지끈. 손목에서 우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그만 놓쳐버린 손수건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레온을 잡고 있던 손목에 무리가 가해져 인대에 손상을 입고 말았다. 그 상태로 오웬의 뺨을 두 번이나 올려쳤기에 통증이 심해졌다. 눈물이 고이는 까닭은 그 때문일 것이다.

열린 서랍에서 새 손수건을 꺼낸 프리아가 내실로 향했다. 

“오웬!”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오웬의 걸음이 멈췄다. 뒤를 돌아볼 자신은 없었다. 자기혐오에 빠져 무력해진 모습을 마지막 기억으로 남겨주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감정이 들끓고 있어 자제력을 잃고 또 폭언을 퍼붓게 될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얼굴을 다시 보게 되면 프리아를 떼어놓고 갈 수 없을 것 같아 오웬은 끝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살며시 닿은 손길이 조심스럽게 오웬의 손등 위로 향했다. 부드러운 천이 손을 휘감는 감촉이 느껴졌다. 상처를 여며주고도 떠나지 못하던 손가락은 한참 동안이나 그 주변을 머물렀다. 붕대 바깥으로 비어져 나온 선 굵은 손가락 위로 프리아의 가는 손가락이 겹쳐진다. 

가지 말라는 말은 할 수가 없다.

결코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막막한 등을 껴안는 대신 프리아는 오웬의 옷자락 끝을 붙잡았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기를. 소리 내어 입 밖으로 말하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시큰거리는 손목 통증이 더욱 거세졌다. 내일 출정식에서는 웃는 얼굴로 잘 다녀오란 인사를 건넬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겨우 손가락 몇 개로 붙잡힌 것뿐인데 오웬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대로 몸을 돌려 프리아를 안고 싶은 충동과 싸우며 닫힌 문 손잡이만을 노려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프리아가 천천히 잡고 있던 옷자락을 놓았다. 

“문 열어.”

내실 앞을 지키고 있던 시종장이 안쪽에서 들려온 오웬의 말을 듣고 문을 열었다. 굳은 표정을 한 오웬이 홀로 내실을 빠져나왔다. 

“폐하, 프리아 님은…….”

오웬이 백조궁을 떠날 때면 늘 정원까지 배웅을 나오던 프리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시종장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침실로 뛰어들어가는 프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상황을 짐작한 시종장이 오웬의 눈치를 살폈다. 프리아 님이 황자님을 해쳤다는 장미궁 시녀의 증언을 믿으셨을리는 없으나 성격상 당사자에게 확인을 해보려 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서로 마음을 상하게 되었을 것이다. 

선황처럼 향락에 빠져 여성편력을 탐닉하지 않고 황태자처럼 책임과 의무를 방기한 채 한 사람을 향한 비뚤어진 집착과 소유욕에 휩싸이지도 않아 성군이 될 거란 기대를 모으고 있는 젊은 황제의 유일한 약점은 피붙이였다. 자신을 구하려다 부상을 입고 세상을 떠난 아서에 대한 부채감이 오웬을 괴롭히고 있었다. 형의 핏줄인 레온을 향한 염려가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으나 가끔은 지나칠 때가 있었다. 

“출정식까지는 마음이 풀리실 겁니다. 제가 회의 끝나는 대로 찾아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프리아를 찾아가 달래보겠다는 시종장의 말에 오웬이 걸음을 멈춰 섰다. 

“네가 왜 프리아를 만나?”

“예? 제가 이래뵈도 프리아 님과 말이 잘 통하는 사이입니다. 프리아 님이 좋아하시는 화제에 대한 이야기거리도 풍부하고요.”

시종장은 사랑하는 황손 저하, 어린 오웬에 대한 이야기라면 밤새도록 떠들 수가 있었다. 

“한가한 소리를 하는군. 괜히 가서 귀찮게 하지 말고 일이나 해.”

“아니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시다니요. 프리아 님께서는 저를 꽤 좋아하십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얼쩡거리는 꼴 보기 싫어.”

흰머리가 수북한 시종장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오웬이 자신도 모르게 프리아의 주치의를 떠올리고 눈썹을 찌푸렸다. 생김새도 연령대도 다르건만 왜 비슷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폐하, 너무하십니다. 저의 충정을 의심하시다니요.”

억울한 표정으로 늘어놓기 시작한 시종장의 불평을 오웬이 단칼에 잘라냈다. 

“입 닫아. 프리아는 내일 출정식에 부르지 않을 거니까.”

“예? 아니 될 말씀이십니다. 출정식이란 사랑하는 연인과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용기를 얻고 투지를 다지는 자리인 동시에 늠름한 폐하의 모습을 만인에게 선보이는….”

“구경거리로 내세우기 싫어.”

언제까지나 감춰둘 생각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황자를 해쳤다는 모함이야 엄벌로 다스리면 쥐 죽은 듯 사라지겠지만 황제의 비호를 잃게 될 사내후궁에게 쏠릴 호기심 어린 시선들 속에 프리아를 남겨두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

“프리아 님께서 섭섭해하실 텐데요.”

엄청난 인파가 모이는 자리라 시종장은 시간을 들여 신경 써서 준비한 정복을 오웬에게 입힐 예정이었다. 그 멋진 모습을 보여드릴 생각에 기대에 부풀어있던 시종장의 어깨가 가라앉았다.

“화공에게 신경써서 그리라 하겠습니다.”

특별히 전신화를 주문해 프리아 님께 보내드려야겠군. 시종장이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보니 그림 한 장도 갖고 있는 게 없군.”

쓸쓸한 표정으로 오웬이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시종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그림을 말씀하시는지요? 폐하. 원하시는 게 있으시면 준비하겠습니다.”

“됐어. 이미 늦었어.”

목탄이나 펜으로 그리는 스케치가 아니고서는 단기간에 초상화를 완성할 수 없었다. 출정을 앞둔 병사들은 연인과 서로의 초상이 담긴 로켓을 눈물 흘리며 주고받고 있을터였다. 오웬이 목에 걸고 있던 로켓줄을 빼내 잠금쇠를 비틀어 열었다. 언젠가 그가 잘라냈던 프리아의 금발 머리카락 가닥이 실크 리본에 묶여 들어있었다. 애틋한 눈으로 로켓을 내려다보던 오웬이 또 엄청난 발언을 꺼내 시종장을 놀라게 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할 거야.”

“예?”

설마 프리아 님이요? 시종장은 불길한 예감에 손끝을 떨었다. 

“그렇게 하면 안전하겠지. 더는 사고도 치지 못할테고.”

“폐하, 그 말씀은…….”

“그래. 프리아를 백조궁에 연금시킬 거야.”

황가의 피에 문제가 있는 걸까. 잠시 불경한 생각에 빠졌던 시종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폐하, 프리아 님을 위해서라지만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니실까요?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추위를 많이 타니까 크게 돌아다닐 일도 없을 거야. 가고 싶은 곳 정도는 알아서 잘 다닐테고.”

연금 상태인데 어딜 간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오웬의 말에 시종장이 눈을 깜빡였다. 멀어져 가고 있는 백조궁을 돌아보며 오웬이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풀어놓았다가 잃게 되는 것보단 백번 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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