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런 대답도 생각나지 않았다. 초점을 잃고 흔들리던 프리아의 눈동자가 오웬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것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발작으로 쓰러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지금 이 순간에도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오웬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왜 대답을 하지 못하지? 지난번에는 나에게 화가 나서 그랬다고. 내가 미안하다고 하면 열어줄 생각이었는데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고 말하지 않았었나?”
오웬의 삐딱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프리아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처럼 그 말에 매달렸다.
“맞, 맞아요! 제가 화, 화가 나서 그랬던 거예요. 갑자기 여쭤보시니까 생각이 나지 않아서…….”
무언가 감추고 있다. 허둥대는 프리아의 모습을 본 오웬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날 바보로 아는군.”
바보로 알다니? 오웬의 차가운 반응에 당황하던 프리아는 이어지는 다음 말을 듣고서야 함정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다.
“본인이 했던 말도 기억하지 못하는군. 그때는 감기에 걸려 나에게 옮기지 않기 위해 그랬다고 말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이제야 생각이 났다. 어설픈 변명에도 웃으며 넘어가 주었던 연인이 무서운 얼굴로 그날의 일을 다시 묻고 있었다.
“그때 넌 뭘 하고 있었지?”
한 발짝 더 다가온 오웬이 떨고 있는 프리아의 얼굴을 탐색하듯 내려다보았다.
“그 자와 함께 있었나?”
프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오웬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누구를 말하는 거냐고? 너도 알고 나도 아는데 굳이 이름을 입에 올려야 할까. 네 주치의 말이야. 알훼니아에서부터 이미 그런 관계였어?”
처음부터 거슬리던 사내였다. 자신과 프리아가 함께 한 시간은 고작 일 년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자는 프리아와 이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 보냈다. 그자와 프리아가 함께 보냈을 수많은 날들을 생각하면 질투가 나고 심기가 뒤틀렸다.
필부처럼 위장하고 있지만 어쩌면 자신과 피가 섞였을지도 모르는 자. 잠시도 쉬지 못하도록 얽어오는 정무와 각종 이해관계 때문에 간신히 짬을 내야 프리아를 보러 올 수 있는 자신과 늘 곁에서 있어주는 그. 오랜 기간 떨어져 있다 다시 만나도 변함없는 서로를 향한 신뢰.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시간차가 오웬을 질투로 미치게 만들었다. 그래서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굳이 시녀가 했던 말을 입에 담았다.
“그 사내의 품에 안겨 방으로 들어가 무얼 했지? 네 침실에서도 툭하면 시녀들을 물리고 함께 있었다던데. 남들에게는 보일 수 없는 은밀한 치료라도 한 건가? 아니면 아니라고 말을 해 봐.”
제발 부정을 해.
근거 없는 모함이라고. 그 시녀가 누군지 당장 불러오라고 호통을 치고 네 결백을 증명해 줘.
후궁의 사통을 추궁하는 입장이면서도 오웬은 애원하듯 끓어오르는 눈동자로 굳게 닫힌 프리아의 입술만을 바라보았다.
“이게 다 꾸며낸 말이야? 아니면 네 입으로 부정해. 시녀를 데려와 대질시켜야만 입을 열겠어?”
가슴으로 서늘한 바람이 분다. 사통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실이었기에 반박할 의지마저 생기지 않았다. 그 밤,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지친 몸으로 기르의 방을 찾았었다. 품에 안겨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면 충분히 오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약을 먹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시녀들을 내보냈고 발작이 심해진 후엔 들키지 않기 위해 되도록 커튼을 내리고 어두운 침실 안에 머물렀다. 시녀들은 오해할 수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오웬만은. 세상 모두가 자신을 사통했다 손가락질한다 해도 오웬만은 그래서는 아니 되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다 사실이니까.”
“사실이라고?”
그렇게 입을 열라고 추궁했으면서도 오웬은 프리아가 답하기 시작하자 겁에 질린 사람처럼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날 밤, 기르의 방에 간 것도 사실이고 기르가 안아서 안으로 들여보낸 것도 맞아요. 제 침실에서 둘만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이번엔 오웬에게서 말이 사라졌다. 충격을 받아 흔들리는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며 프리아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몸이 좋지 않아서 일어설 수 없었어요. 그래서 기르가 옮겨준 거예요. 당신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막았던 건… 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고. 치료 과정에서 피를 보는 일이 있어 시녀들을 내보냈어요. 그리고 기르와는…….”
잠시 말을 멈춘 프리아가 입술을 깨물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한 번도 성적인 접촉을 가진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저는 폐하 이외의 사람과 잠자리를 가진 일이 없습니다. 제 답변이 부족하다고 생각되시면 저를 폐하셔도 좋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여기까지입니다.”
이것이 진실이지만 증명은 할 수 없다. 믿겠는가, 믿지 않겠는가. 침묵이 이어졌다. 얼굴을 굳히고 있으나 방황하는 눈동자 속에서 안도를 읽어낸 프리아가 오웬에게로 한 발짝 다가섰다. 곧이어 살과 살이 부딪치는 마찰음이 방안에 울려 퍼졌다.
오웬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 그의 뺨을 다정하게 감싸던 프리아의 손이 순식간에 날아와 날카로운 아픔만을 남기고 물러간 것이다.
“아파요? 아프라고 때린 거예요. 당신은 나와 기르를 모욕했으니까.”
충격으로 입을 열지 못하는 오웬을 바라보며 프리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체벌의 이유를 설명했다. 오웬은 태어나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뺨을 맞아 본 적이 없었다. 고귀한 황손으로 태어나 혹 잘못을 저지른다 하여도 대신 매 맞아줄 이가 존재했으며 황제로 등극한 이후에는 더더욱 손찌검을 당할 일이 없었다. 어느 간 큰 이가 황제의 몸에 손을 대겠는가.
언젠가 오웬이 같은 방식으로 프리아의 뺨을 때린 적이 있었다. 지난여름 행궁을 떠났던 곳에서 위험하게 나무 위에 오른 프리아를 보고 화가 나 자신도 모르게 손을 대고 말았던 것이다. 처음 맞아보는 뺨이라 불쾌감이 앞섰지만 그때 일을 돌려받는 것이라 생각하면 간신히 참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오웬이 분노를 삼키고 있을 때 또다시 짝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더욱 강도가 세진 통증에 오웬이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더는 손을 올리지 못하도록 프리아의 손목을 빠르게 잡아챘다.
“이번 건 뭐지? 처음은 네 몫이고 이번이 그자의 몫인가?”
본인이 때려놓고도 놀랐는지 프리아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눈앞이 반짝할 정도로 꽤 매서운 손찌검이었다. 그렇게 있는 힘껏 올려붙였으니 때린 손에도 꽤 통증이 느껴질 것이다. 프리아의 붉어진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오웬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사람이 맹탕은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는 건지 사내라면 주먹을 날려야 하는 법이라고 가르쳐 주어야 할지. 그때 오웬의 귀에 예상치 못한 말이 들려왔다.
“아니, 한 대는 당신 몫이야. 당신은 당신 마음까지 모욕했으니까.”
정신이 멍해졌다. 그 틈에 오웬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빼낸 프리아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납득되지 않으면 날 때려요. 규정대로 옥에 가둔다 해도 후회하지 않으니까.”
맞을 것을 각오했는지 프리아가 어서 때리라며 제 뺨을 오웬에게 내밀었다. 자신이 어떻게 프리아를 때릴 수 있을까. 폭력을 행사했던 과거의 자신을 후회한다 해도 이미 저지른 일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눈을 감고 오웬에게 제 뺨을 내밀었으나 통증은 찾아오지 않았다. 후궁이 황제의 뺨을 때리는 엄청난 일을 저질렀으니 그의 성격상 바로 체벌이 날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이어지는 침묵에 눈을 떴다. 얼굴을 찌푸린 오웬이 말없이 프리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가 났겠지. 겨우 이걸로는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아직 사통을 의심하고 있는 걸까. 레온이 다치기까지 했으니 용서받을 수 없겠지.
오래 얼굴을 굳히고 있던 오웬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잠깐 사이에 목이 잠겨있었다.
“마지막으로 물어볼 게 있어.”
프리아 역시 목이 메어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레온이 너에게 물어볼 게 있어 매일 기다렸다고 했는데 무슨 내용인지 알고 있어?”
프리아가 경사진 지붕을 내려와 레온에게 다가갔을 때, 아이는 손을 흔들며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발작 직전이었기에 정신이 흐려져 제대로 듣지 못했으나 끊어졌던 단어를 이어붙이면 뜻을 파악할 수는 있었다.
‘마티아! 나… 마…한테 물어볼 … 있었! 내가 …님의 아이가 …거래. … 숙부님이 …아버지가…! … 그러면 아버지께서 섭섭… 실까? …아버지께서 싫다… 면 숙부… 아이가 되지 않을…. 근데 … 또 숙부님… 하시면…어떻게 하지?’
레온이 프리아를 기다린 이유가 따로 있었다. 하늘에 있는 아버지에게 말을 전해줄 수 있으며 숙부님의 마음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는 천사에게 사랑하는 두 사람이 상처받지 않을 수 있도록 조언을 구하려 했던 것이다. 당시 아이를 구하는 일이 다급해 프리아는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아이의 순수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져 꿀꺽 침을 삼키고 나서야 프리아는 입을 열 수 있었다.
“레온은……. 폐하의 아이가 되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아서 저하께서 슬퍼하시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어요. 저에게 아서 저하의 마음을 알아봐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아서 저하께서 원하시지 않는다면 황자가 되지 않겠지만 만약 그리한다면 폐하께서도 섭섭해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황자가 되는 것은 경사라며 모두가 기뻐했다. 그러나 아이는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친부를 떠올리며 그리움과 죄책감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레온의 속마음을 알게 된 오웬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레온을 위한 일이라며 입적을 빨리 진행할 생각만 했을 뿐 당사자를 만나 허락을 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왜 레온을 황자로 만들려 했는지, 떠난 아서와 자신은 어떤 약속을 했는지 자신에게 레온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해 주었야 했다.
아서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그대로 레온에게 돌려주겠다고 맹세했으나 지킨 것이 없다.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는 사이 시간이 나면 애첩만을 찾아댔으면서 그저 레온을 위한 일을 하고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오웬.”
고통이 서린 오웬의 얼굴을 보고 있던 프리아가 다가와 손을 잡아주려 했다. 자신도 모르게 그 손을 쳐내버린 오웬이 더욱 얼굴을 굳혔다.
한심하다. 오웬은 무력감과 함께 수치심을 느꼈다. 만인을 지키기 위해 전쟁에 나간다 한들 무얼 할까. 고작 둘. 지키겠다 했던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만 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