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38)화 (139/237)

한때는 무시했고 그 후엔 도구로 쓰고자 했으며 언젠가부터 신경이 쓰이다 못해 어느새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내 사람이라 여겼다. 린드가르트나 레온을 향한 마음과는 다르게 부채감 없이 그와는 온전히 사랑만을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놀릴 때면 골이 나 금방 빨개지는 얼굴을 보며,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 속이 환히 읽힌다 착각했다. 다시 마주하게 된 연인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맑은 눈동자는 제 속을 꽁꽁 감춘 채 그저 오웬의 얼굴만을 비춰 되돌려 주고 있었다.  

“대답해. 언제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레온에게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어제 그곳에서 일어난 일까지 전부 말해.”

전에 없이 싸늘한 목소리였다. 몹시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오웬은 의자에 앉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손 뻗어도 닿지 못할 정도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프리아에게서 떨어져 서 있었다. 프리아 역시 다가서지 못하고 막막한 마음을 숨긴 채 연인의 추궁에 답하기 위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지난 여름, 다락방에서 지낼 때 지붕에 올라갔다가 아이 울음소리를 들었어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이는 자신을 천사라 착각했고 그 선한 마음을 지켜주기 위해 아이의 아버지가 보낸 사자인 척 행동했다는 그날의 이야기를 오웬에게 털어놓았다. 프리아의 입에서 나온 아이 아버지란 단어에 오웬의 눈썹이 불쾌한 듯 꿈틀거렸다. 

“백조궁으로 옮기기 전 한 번 더 만났고 더는 찾아가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저를 잊어주기를 바랐습니다.”

“비밀 친구라……. 어린 공녀들과 내 사촌에 이어 이제는 내 조카라니. 네 친구 선택 기준이 유별나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어.”

빈정거리는 오웬의 말들이 날아와 가슴에 아프게 박혔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거짓말로 인해 레온이 다치게 되었으니 프리아는 묵묵히 그 날선 말들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선한 의도였고 아이와 놀아준 것뿐이다. 그 말을 지금 믿으라는 거야? 너의 그 가벼운 장난 때문에 레온은 목숨을 잃을 뻔했어.”

의식이 끊기던 순간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멀어져 가던 아이의 얼굴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채 실감하지도 못한 표정이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프리아를 보며 오웬이 다시금 분노를 터트렸다.

“어째서 내게 말하지 않았지? 밤을 틈타 내 조카를 몰래 만나놓고 언제까지 숨길 수 있다 생각한 거야? 공연이 있던 날 복도에서 그 아이가 널 봤다는 사실을 몰랐어?”

처음 듣는 이야기에 프리아의 눈이 다시 뜨였다. 발을 옮겨 거리를 좁힌 오웬이 손을 내려 프리아의 어깨를 잡고 거세게 흔들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 지금 궁에 무슨 소문이 돌고 있는지 알기나 해?”

소문이라니. 전혀 알지 못한다. 세게 잡힌 어깨가 아파왔으나 신음을 안으로 삼킨 채 프리아는 도움을 구하듯 오웬을 올려다보았다. 

“네가 일부러 황자를 꾀어내 해쳤다는 소문이다. 아이의 어미조차 그 말을 듣고 너를 만나겠다고 하는데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뭣들 하시는 건가요? 저 사내가 황자님을 해하는 모습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장 잡아 감옥에 가두어야 할 위험한 자입니다. 제가 폐하께 증언하겠어요!’

그 날 의식을 차린 후에 들었던 장미궁 시녀의 폭언이 다시 귓가에 메아리쳤다. 탈진한 자신 대신 열심히 반박 해주던 올가의 열띤 목소리 또한 함께 떠올랐다. 프리아는 멍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린드가르트 님을 만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사과드리고 싶어요.”

“네가 왜 린드가르트를 만나? 허락할 수 없어!”

프리아의 어깨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고통을 참고 있는 프리아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는 모습을 보면서도 오웬은 자신의 분노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 지붕에서 굴러떨어지며 쓸린 것인지 프리아의 흰 얼굴 위로 붉은 생채기가 생겨나 있었다. 어째서일까. 안타까운 마음에 상처를 보듬어주고 싶다 생각하면서도 꽉 잡은 손아귀의 힘을 풀 수가 없었다. 안아주는 동시에 상처 입히고 싶었다. 달콤한 악마처럼 요난나가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왜 너에게 이러냐고? 글쎄. 너처럼 약하고 착한 아이를 괴롭히면 조금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아서? 기분은 여전히 더럽긴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이유 없이 욕먹는 것도 이제 지쳤으니까 욕먹을 이유를 만들면 덜 억울하지 않을까? 내가 운이 없어 끌려와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너도 운이 없는 거겠지.’ 

오웬의 입술 사이로 더없이 잔인한 추궁이 흘러나왔다. 

“사과를 하겠다니. 왜지? 정말 그 아이에게 화풀이라도 한 건가? 꾀어서 다치게 만들고 싶었어?”

프리아의 눈동자로 파란이 일었다. 깊이 상처받은 눈동자가 맞부딪쳐 온다. 어느새 오웬의 손아귀에 힘이 풀렸다. 그 틈을 타 오웬에게서 한 발짝 멀어진 프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이 아끼는 사람을 해칠 거라고 믿어요?”

아니란 걸 안다. 알면서도 오웬은 요난나와 올가가 걸어놓은 저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프리아마저 그 지옥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오웬은 대답 대신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왜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한 거야? 너 역시도 죽을 뻔했다는 걸 몰라?”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것처럼 프리아의 눈이 멍하니 깜빡였다. 그 모습을 보자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너는 왜 늘 그렇게…….”

제 몸도 아끼지 않고 멋대로 행동하는가. 죽을 날 받아놓은 사람처럼. 더는 이 세상에 미련이 없다는 듯 과감하게 행동할 때면 오웬의 속이 타들어갔다. 

“레온을 구하고 싶었어요. 제가 죽어도.”

자신의 거짓말을 믿고 친구를 구하겠다며 위험을 무릎쓴 다섯 살 아이다. 설령 자신이 죽는다 해도 아이를 구할 수 있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일이었다. 자신은 어차피 죽을 목숨이고 아이는 오웬의 소중한 조카였으니까. 

프리아의 대답을 들은 오웬의 눈에 불이 치솟았다. 어찌 그리 쉽게 죽음을 입에 담는가. 레온을 지키는 것도, 프리아를 지키는 것도 다 자신이 할 일이었다. 둘 중 누구도 잃어서는 아니 되었다. 아무리 황손이라지만 레온은 겨우 다섯 살이니 세상 물정을 모른다 해도 흠이 되지 않았다. 아이는 이제 황자가 되었으니 하나씩 천천히 궁에서 살아남는 법을, 황제가 되는 법을 익히게 될 것이다. 자신이 궁을 비워도 걱정할 것이 없었다. 외조부인 재정 대신이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건강하게 살아있기만 한다면 문제없이 다음 대 황제로 등극할 것이었다. 

문제는 프리아였다. 다른 후궁의 시녀에게 모함을 받는 것도 모자라 본인이 거두고 있는 수행시녀에게 사통을 한다는 고발을 당하다니. 온 사방이 적임을 모르고 있는 천진한 눈동자에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자신이 없으면 어디서 건 환영받지 못할 처지. 그리고 그가 그런 취급을 당하는 이유는 오직 자신 때문이었다.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시작한 거짓 총애가 어느새 진실이 되었다. 처음엔 사내 후궁이 어찌 되든 상관이 없었고 그를 아끼게 된 후로는 자신이 곁에서 지켜주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풍전등화의 상황 속에 프리아를 홀로 남겨두고 떠나게 될 줄은 몰랐다. 

‘프리아 님은 폐하를 속이고 다른 이와 사통을 하고 계시니까요. 제가 직접 목격했습니다.’

뚜렷한 증거도 없는 말에 정신이 돌아가 이성을 잃고 날뛰고 말았다. 지금껏 수없이 프리아를 안으면서 다른 사내의 흔적을 발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모함이라는 걸 안다. 그 여인의 주장 속에서 진실은 하나. 자신이 프리아에게 공작새 구이를 보냈다는 것뿐이었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 한 가지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나머지 거짓 역시 덩달아 신빙성을 얻게 된다. 

‘후궁께서는 폐하께 감추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놓지 마세요.’

이 또한 실체가 없는 말로 의혹을 증폭시키기 위한 화술일 뿐이었다. 프리아가 자신에게 감추는 것이 있을 리 없다. 

“오웬! 손 다쳤어요? 피가!”

오래 힘을 주고 있었던 탓에 상처가 벌어져 붕대 바깥으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시녀들을 부르기 위해 돌아서는 프리아의 팔을 오웬이 붙잡았다. 프리아의 영문 모를 눈동자가 오웬을 올려다보았다. 

“네 시녀가 널 사통으로 고발했어.”

“……예?”

사통이라니. 너무나 뜬금없는 혐의에 프리아의 사고가 정지되어 버렸다. 도대체 누구와 내가 사통을 했다는 거지? 내 시녀라니. 백조궁안에 자신에게 그런 혐의를 씌울만한 사람은 없었다. 오웬의 새로운 농일까. 이렇게 기분 나쁜 농담은 싫었다. 

“내가 너에게 공작새 구이를 보냈던 날을 기억해?”

“공작새요?”

잠시 생각하던 프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웬이 음식을 보낸 적은 여러 번이었으나 연회 장식을 그대로 재현한 공작새 구이를 보내온 것은 단 한 번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기억해요.”

“그날 밤에 내가 찾아왔을 때 비밀통로의 문이 열리지 않았어. 여러 번 네 이름을 불렀지만 넌 열어주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쳐 선물로 가져왔던 종달새 문진을 문 앞에 두고 돌아갔어.”

오웬의 말을 들은 프리아의 시선이 종달새 문진이 놓인 장식장 앞으로 향했다. 그날 새벽 갑자기 발작이 일어나 장식장을 밀어 통로 문을 가려놓았었다. 다음날 아침 문 뒤에서 종달새를 발견했을 때의 설렘을 기억한다.

프리아의 시선을 따라 장식장으로 향했던 오웬의 시선이 돌아와 맞부딪쳐왔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그날밤 네가 사내의 품에 안겨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어.”

오웬의 까만 눈동자가 꿰뚫을 것처럼 프리아의 파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대답해 봐, 프리아. 그날 왜 문을 막아놓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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