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37)화 (138/237)

찬물을 끼얹은 듯 머리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프리아가 레온을 해하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이가 장미궁 시녀 한 사람뿐인 것처럼 사통을 목격했다 주장하는 이 또한 백조궁 시녀 한 명뿐이다. 오웬은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시녀를 향해 재차 질문을 던졌다.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조금 전까지 프리아가 모함을 받았다 주장하던 그 입술로 사통을 입에 담다니. 순식간에 태도를 바꾼 자의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야?”

“저는 프리아 님을 믿는다 말씀드린 적이 없습니다. 어제 일이 모함이라 고했던 것은 황자님과 프리아 님, 두 분 사이에 그 어떤 접점도 없었다 여겼기 때문이지요. 근본이 악한 자가 아니라면 생면부지의 아이를 해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두 분이 오래전부터 알고 계셨던 사이라 하니 의문이 들었습니다.”

늘 오웬을 두려워하는 모습만 보이던 시녀가 막힘없이 말을 이어갔다.

“불순한 의도로 접근해 환심을 산 후, 어제와 같은 일을 벌이려 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프리아가 황자를 해하기 위해 오래 계획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건가? 어이가 없군. 그리한다 한들 프리아에게 무슨 이득이 있지?”  

오웬은 경멸하는 눈으로 올가를 내려다보며 냉소 지었지만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최소한 의심은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올가는 그리 확신했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이득은 없지요. 그래도 일종의 화풀이는 되지 않겠습니까? 사내의 몸으로, 오랜 정인도 고국에 떼놓은 채 후궁이 되어야 하셨으니까요. 폐하께서 아끼시는 황자님을 해하여 가슴속 응어리를 풀려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미리 황자님과 지붕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일을 마친 후 연회에 참석하시려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로제타 님이 우연히 프리아 님을 따라가시지만 않으셨다면 목격자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레온에게 자신의 관심이 쏠릴까 두려워 해쳤을 것이라는 장미궁 시녀의 주장보다 더 미친 헛소리였다. 그러나 오웬은 반박조차 하지 않은 채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아니 오웬은 다른 이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미 죽고 없는 자의 망령된 말. 지금 오웬을 뒤흔들고 있는 것은 시녀의 말이 아니라 열대 식물처럼 화려하고 기괴하게 아름다웠던 그 사내, 요난나의 말이었다.  

‘좋았던 적도 없었어. 네 아버지와 몸을 섞으며 늘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네 아비는 나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 갔다. 평생 연인을 안을 수도, 아이를 만들 수도 없게 하고는 손발을 묶어 별궁에 가두고 수시로 몸을 강탈했어. 색사? 그건 고문일 뿐이야. 맹세코 단 한순간도 즐겁지도, 네 아비를 사랑하지도 않았어. 나에게는 연인이 있었어. 네 아버지가 날 강제로 이곳으로 끌고 온 거야. 이 춥고 낯선 땅으로. 지옥으로.’

“폐하!”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오웬의 눈에 공포가 깃들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오웬이 휘청거리자 놀란 올가가 그를 부축하기 위해 다가섰다.

“나가.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올가의 손이 제 몸에 닿기도 전에 밀쳐낸 오웬이 상처 입은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내 말을 믿는구나. 폐하께서 내 말을 믿고 계셔. 시녀의 얼굴 위로 떠오른 기쁨을 발견한 순간 오웬은 자제력을 잃고 다시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폐…….”

숨 쉴 공기가 희박해져가는 상황 속에서 올가는 그토록 바라던 황제의 아래에 깔려 우는 듯 미소지었다. 

“말해. 프리아가 내게 감추고 있다는 게 무엇인지 하나도 남김없이 말해.”

폐하, 그자는 결국 당신 곁을 떠날 거예요. 뻐끔거리는 입술은 그저 고통스러운 신음만을 내뱉을 뿐이다. 

“폐하, 이제 내려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출정 전, 궁에 남게 될 대신들과의 마지막 회의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 안에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시종장이 다시 노크한 후,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폐하!”

바닥에 엎드려 시녀의 목을 조르고 있는 황제의 모습을 발견한 시종장이 대경실색하여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다른 시종들까지 합세한 후에야 간신히 황제의 손이 시녀의 목에서 떨어져 나갔다. 콜록거리며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올가를 무정한 눈으로 내려다본 오웬이 더러운 것을 만지기라도 한 것처럼 손수건을 집어 손을 닦아냈다. 

“저것이 다시는 백조궁 앞을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해. 시녀장을 대신 백조궁으로 보내고 층마다 경비를 강화해서 다시는 몰래 빠져나오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

“그리하겠습니다.”

레온의 추락 이후, 오웬은 단 한순간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핏발이 선 오웬의 눈이 시종장에게로 향했다. 시종장은 마음 깊이 안쓰러워하면서도 예정된 일정이 코앞에 다가왔음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폐하, 대신들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잠시 미뤄. 다녀와야 할 곳이 있어.”

“예?”

어리둥절해하던 노인은 오웬이 걸어나가자 빠르게 그의 뒤를 쫓았다. 백조궁에 가시려는 겁니까? 평소처럼 편히 질문할 수도 없었다. 프리아를 만나러 갈 때면 늘 행복해 보이던 황제의 얼굴이 지금은 차가운 분노로 굳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설마 장미궁 시녀의 얼토당토않은 모함을 믿으시는 건 아니시겠지. 황제는 묻지 않았으나 시종장은 시종을 시켜 백조궁의 동태를 알아오게 했다. 

‘많이 놀라셨을 뿐 별다른 이상은 없다 하였습니다. 시녀들 말로는 안정을 취하며 쉬고 계신다 하십니다.’

보고를 들은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시종장은 그가 프리아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의심치 않았다. 백조궁 시녀를 내치고 본궁 핵심 인력인 시녀장을 보내라 지시한 것 또한 염려의 발로로 느껴졌다. 다른 참고인의 조사가 끝났으니 직접 가서 물으시려는 것일 게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불길한 예감이 들어 시종장은 앞서가는 황제의 단단한 등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출정식까지 만 하루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프리아 님께서 황자님을 해하셨다는 게 정말일까요?”

나이 어린 시녀가 눈치 없이 꺼낸 말에 다른 시녀들의 따가운 눈총이 모여들었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장미궁 시녀들이 떠들어대는 말을 귀담아듣다니. 수행시녀들이 들었다면 당장 회초리를 맞을 발언이었다.

“그런 헛소리할 거면 장미궁으로 소속을 옮기든지 해. 아무리 친구가 거기 있대도 그렇지. 어찌 프리아 님을 모함하는 말을 새겨들을 수 있어?”

“짐 쌀 준비나 해. 올가 님께서 들으셨으면 넌 백조궁이 아니라 온 궁안에서 쫓겨났을 테니까.”

“아니, 제가 그 말을 믿겠다는 것이 아니오라…….”

쏟아지는 힐난에 겁을 먹은 어린 시녀가 말끝을 흐리며 울먹였다. 장미궁 수석시녀님이 분명히 목격했다고, 그래서 프리아 님은 처벌을 받고 백조궁 시녀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될 거란 말을 들어 걱정이 들었을 뿐이지. 프리아 님을 모함하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을 향한 불신의 시선을 피하듯 소심하게 고개를 숙이던 그녀의 손에 축축한 무언가가 와닿았다. 요란스럽게 비명을 질러대며 그녀가 일어서자 이사벨이 혀를 차며 다가와 강아지를 안아들었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시면 어떻게 해요? 그레첸이 놀랐잖아요.”

냉소와 비소를 달고 사는 이사벨이었으나 동물에게만은 상냥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귀여운 강아지의 등장에 이제 좀 백조궁 생활에 정을 붙여볼까 하던 참이었는데 하루 만에 이 사달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레첸. 언니랑 산책 갈까?”

늘 퉁명스럽던 이사벨의 입에서 혀 짧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시녀들은 모두 경악했다. 강아지를 품에 안고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남은 시녀들이 혀를 차댔다.

“이사벨 님은 걱정도 안 되시나 봐요.”

“저희와는 처지가 다르잖아요. 영지가 그리 넓다던데 혼인 전에 잠깐 경험을 쌓으러 들어오신 거잖아요. 그 집 공자들이 셋이나 자원해서 군에 들어갔대요. 공적을 쌓아 돌아올 테니 앞길도 탄탄대로죠.”

“설마 폐하께서 이번 일로 프리아 님을 내치시는 건 아니시겠죠?”

한 시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걱정에 다른 시녀들의 얼굴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자신과 별다를 것도 없는 말임에도 구박받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어린 시녀의 입술이 불만스럽게 튀어나왔다. 

“참 다들 쓸데없이 걱정이 많다니까. 그렇지? 그레첸?”

강아지를 안고 백조궁 바깥으로 나온 이사벨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쭈쭈 소리를 냈다. 한참을 이사벨과 사냥 놀이를 하며 신나게 꼬리를 흔들어대던 강아지가 귀를 쫑긋하더니 뒤를 향해 달려나간다. 

“폐하!”

말에서 내리는 황제의 모습을 본 이사벨이 놀라며 황급히 몸을 숙였다. 혹시 말발굽에 그레첸이 밟히지 않을까 발을 동동 굴렀으나 윤기 흐르는 갈기를 가진 흑마는 파리 쫓듯 무심하게 꼬리를 흔들어댈 뿐이었다. 

‘어머, 뭐야.’

백조궁을 찾은 황제의 얼굴이 무섭도록 창백했다. 몸을 휘감고 있는 기운 또한 지독히도 사나워 이사벨은 산짐승을 피하듯 강아지를 품에 안고 천천히 뒷걸음쳤다. 백조궁에 날벼락이 떨어질까 두려워하던 다른 시녀들의 걱정을 그녀는 코웃음쳤으나 지금 황제의 기분이 무척 좋지 않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내일이면 출정식인데 무슨 일이야 있겠어?’

이사벨은 떨고 있는 강아지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황제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뒤를 따르는 시늉은 했지만 틈을 보아서 자신의 방으로 도망칠 생각이다. 접대야 올가를 시키면 되겠지. 황제의 방문을 알리는 경비병의 외침에 시녀들이 모두 달려 나왔다. 어째서일까. 황제가 왔다 하면 사내후궁보다 먼저 몸이 달아 달려오던 올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며 시중을 들기 위해 후궁의 내실로 향하던 이사벨의 눈앞에서 쾅 소리를 내며 거세게 문이 닫혔다. 

“차를 준비할까요?”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녀를 향해 시종장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됐다. 부를 때까지 나가있거라.”

강아지를 품에 안은 시녀가 시종장의 눈치를 살피며 방 밖으로 나갔다. 시종장은 안쪽의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응접실과 연결된 방의 문까지 굳게 닫아걸었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버티고 서서 묵묵히 그 앞을 지켰다. 

“오웬!”

갑자기 들려온 거친 문소리에 프리아의 얼굴이 들렸다. 생각에 빠져 황제의 방문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도 듣지 못했던 것이다. 

프리아 역시 사건 이후 한순간도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황자가 깨어났다는 소식은 백조궁에도 전해졌으나 육체에 부상을 입었다는 말에 걱정이 커지기만 했을 뿐이다. 레온은 물론 오웬의 상태도 염려되어 당장 달려가고 싶었으나 사건과 관련된 증인을 소환해 조사가 이뤄지고 있으니 처소에서 대기하라는 명을 받았다. 두문불출한 채 잠도 자지 않고 방안을 서성이기를 하루하고도 꼬박 반나절. 이제야 애타게 기다리던 이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레온은 괜찮아요? 많이 다쳤다고 들었는데 걱정이 되어서…….”

“언제부터 그 아이를 몰래 만나고 있었지?”

반가움과 염려가 반쯤 섞인 얼굴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프리아를 오웬은 낯선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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