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36)화 (137/237)

“한치도 거짓이 없는 참말이옵니다. 제가 거짓을 고했다면 하늘이 놀라 벼락을 내리셨을 것이옵니다. 부디 폐하께서 혜안으로 굽어살피시어 시비를 가려내주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장미궁의 시녀 리엔이 길었던 증언을 마쳤다. 간크게도 황제의 애첩을 모함한 장본인이면서도 그녀의 태도는 당당했다. 기묘한 열기로 달아오른 눈동자는 본인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가득 차있었다.

“천벌이라니. 지난여름 벼락사한 노공작의 혼이 듣고 있다면 화를 내고도 남겠어.”

리엔을 먼저 내보내고 로제타만을 남겨둔 오웬이 재미있는 농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러나 차갑게 식어버린 눈에는 한점의 웃음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특한 재주로 내 눈을 흐리게 했던 이를 벌하라니 누굴 말하는지도 도통 모르겠고 말이지. 진실로 나를 사모하며 충성으로 모실 이가 있다는데 이건 또 떠오르는 이가 너무 많아 골라내기도 쉽지 않군.”

황제는 리엔이 했던 발언을 꼬집어 자신에게 돌려주고 있었다. 로제타는 모욕감에 표정을 굳혔으나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다. 여차하면 리엔의 구명을 요청하기 위해 황제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성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제타는 리엔을 말리려 했으나 오히려 장미궁 시녀들을 부추기는 결과만을 낳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 아파하며 사내후궁의 악행을 알리는 일에 더욱 열을 올리게 된 것이다. 그릇된 충성심은 흥미로운 소문으로 바뀌고 일의 전말을 알지 못해 답답해하던 사람들은 덜컥 미끼를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지? 내가 네 시녀의 말을 믿어 주어야 할까?”

시험하듯 던지는 황제의 물음에 로제타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한자리에 있었으되 자신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프리아 님께서 황자님을 해하시는 광경을 저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리엔이 거짓을 고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프리아 님 역시 황자님을 해하실 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네 시녀가 잘못 본 거다? 그리 주장하고 싶은 건가?”

“폐하께서 판단 내리실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영리한 대답이군. 그럼 이것도 대답해 봐. 왜 프리아를 따라갔지?”

정숙한 후궁은 최소 두 명 이상의 수행시녀를 동반하지 않고는 처소 밖으로 발끝도 내밀어서는 안 된다고 고릿적 예법서는 주장하고 있었으나 케케묵은 권고일 뿐이었다. 여인인 로제타가 사내인 프리아가 홀로 다니는 것이 걱정되어 따라갔다는 주장은 실소만 자아낼 뿐 설득력이 없었다. 누가 봤다면 오히려 사통을 의심받았을 것이다.

“곧 연회가 시작된다고 전하려 했을 뿐입니다. 시녀장에게 마침 소식을 들었으니까요.”

“사려 깊은 배려로군.”

자존심을 지키려 했다가 엄청난 일에 휘말리고 말았다. 사내후궁에게 자신이 고의로 그를 방해한 것이 아니라는 인정을 받는 것이 뭐가 중요했을까. 로제타는 무력함을 느끼며 자기혐오에 빠져들었다.

긴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후궁이 서슴없이 ‘레온’이라 황자를 칭하며 아이부터 찾으라 했다는 침실 시녀들의 증언에 이어 프리아의 수행 시녀인 이사벨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자의 외모 묘사는 물론 신장까지 알려주었다는 이사벨의 말에 오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상 대회 날 레온도 참석했으니 수련관 위층에서 그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먼 거리에서 아이의 신장까지 가늠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만나 친분을 쌓은 것인지.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또 무슨 일을 벌였는지. 당장 달려가 캐묻고 싶었지만 아직 마지막 증언자가 남아있었다. 

“프리아가 너에게 내려가서 황자의 소식을 알리라고 했다고?”

“아닙니다. 제가 먼저 프리아 님께 허락을 구했습니다.”

수수한 옷차림에 작은 체구를 지닌 시녀가 오웬의 물음에 대답했다. 최근 들어 프리아의 곁에서 자주 모습을 보이던 시녀였다. 그리 좋은 기억은 남아있지 않아 오웬은 딱딱한 표정으로 심문을 이어갔다.

“이유가 뭐지? 그게 네 할 일은 아니었을 텐데.”

“린드가르트 님께 은혜를 입은 몸이라 황자님의 소식을 빨리 알려드려야 한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중간에 되돌아갔지?”

“저까지 내려가 린드가르트 님을 혼란스럽게 해드리는 것보다 한시라도 빨리 황자님을 찾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어 황자가 떨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프리아가 황자를 해치는 모습을 보았다는 증언이 있는데 그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지? 솔직하게 답해주길 원해.”

올가의 머릿속을 꿰뚫을 것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와닿았다. 시체나 다름없는 선황의 이부자리를 데우던 허울뿐인 정부였던 그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순간이다. 올가는 모골마저 송연해질듯한 전율과 희열을 동시에 느끼며 입술을 다시 열었다.

“근거 없는 모함입니다. 프리아 님을 질시하는 이들이 꾸며낸 거짓이에요.”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프리아 님께서 그리하신다 한들 이득이 없고, 혹 그리하고자 싶으셨다 해도 지나치게 위험한 계획입니다. 본인 목숨조차 위태로운 상태셨는데 황자님을 해치고자 그런 무리수를 두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오히려 황자님을 돕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신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평소 눈치 없이 행동하던 것치고는 꽤 논리적인 대답이었다. 흥미를 느낀 오웬이 빠르게 다음 질문을 던졌다. 

“프리아와 황자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

“예? 제가 알기로는 지금껏 두 분이 만나신 적이 없었습니다.”

“침실 시녀들의 말에 따르면 친근하게 아는 사이인 것처럼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또한 생김새도 알고 있었다고 하는데 한 번도 마주친 일이 없이 가능한 일인가?”

당황한 기색의 시녀가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나온 답변 또한 오웬의 예상 그대로였다.

“마상 대회 날 관람석에 계신 모습을 보았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너희들이 앉았던 위치에서 황자를 보는 건 가능했어도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황자는 프리아를 알고 있었어. 수차례 만나본 사이로 보였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그럴 리가……. 저희의 눈을 피하시기도 어려울뿐더러 황자님 또한 늘 곁을 지키시는 분들이 있는데……. 어찌 프리아 님이 황자님과 만나실 수 있었는지요?”

이제부터 그걸 물으러 갈 참이다. 눈앞의 수행시녀 또한 전혀 짐작 가지 않는다는 눈을 하고 있으니 진실은 본인에게 들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수많은 이의 눈을 피해 아이에게 장난질을 치다니. 무슨 의도였던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오웬이 이만 나가보라 말하려 했을 때, 침묵하던 시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제 답변을 수정하고자 합니다. 프리아 님께서 황자님과 원래 아시던 사이라면, 그것도 누구도 모르게 따로 만나던 사이였다면 황자님을 해하려 접근하셨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지?”

레온과 이미 알던 사이라한들 프리아의 고의성에 무게를 더 두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친한 사이였기에 더 위험을 감수하며 구하려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오웬이 화가 난 이유는 프리아가 레온을 해하려 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등 뒤에서 몰래 아이를 만나 천사라는 장난질을 쳐 결과적으로 위험에 빠뜨리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변한 시녀의 태도에 오웬은 의문을 느꼈다.

“신뢰할 수 없는 분이시니까요.”

“신뢰할 수 없다니 무슨 이유지?”

모시는 후궁을 신뢰할 수 없다 단언하는 수행시녀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오웬의 얼굴이 불쾌감으로 찌푸려졌다.

“프리아 님은 폐하를 속이고 다른 이와 사통을 하고 계시니까요. 제가 직접 목격했습니다.”

사통이라니.

자그마한 몸집의 시녀는 형형한 눈빛을 발산하며 담백한 어조로 엄청난 말을 하고 있었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모함이라면 네 목숨을 내놓아야 할 거야. 잘 생각해서 대답해.”

올가의 코앞으로 다가온 오웬이 으름장을 놓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온몸이 짜릿하도록 황홀한 감각. 자신이 말을 아꼈던 이유는 오로지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늦은 시간에 홀로 사내의 방을 찾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불길한 예감을 느끼면서도 오웬은 부정하려 애썼다.

“늦은 밤에 홀로 사내의 방을 찾았다. 사통의 증거는 그거뿐인가?”

“프리아 님께서는 그 사내의 품에 안겨 방으로 들어가셨고 오래 나오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사내의 태도 또한 익숙한 듯 스스럼이 없었으며 그날 외에도 저희들을 침실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 후, 두 사람이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았습니다. 사내가 밖으로 나온 후 들어가 보면 프리아 님의 옷차림이 흐트러져 있었으며 통 기운을 차리지 못하셨습니다.”

“닥쳐!”

뻗어 나온 오웬의 두 손이 시녀의 가녀린 목을 움켜쥐었다. 핏줄이 불거진 오웬의 손등으로 거센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폐하, 께서… 공…작새…구이를…….”

목이 졸린 상황에서도 말을 이어나가며 올가가 오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일순 손아귀에 힘이 풀린 틈을 타 올가가 남은 말을 토해냈다.

“……폐하께서, 공작새 구이를 보내오셨던 밤에, 있었던 일입니다. 프리아 님께서 주치의와 사통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날은 프리아가 통로를 막아놓아 오웬이 방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날이었다. 차가운 통로에 웅크리고 앉아 프리아가 문을 열어주기만을 기다리며 선물로 가져갔던 종달새 조각품을 오래도록 만지작거렸었다. 

‘내가 잘못했어. 문 열어주세요.’

기다리다 지쳐 문 앞에 선물을 놓고 가면서도 마음이 설레어 연신 닫힌 문만을 돌아보았었다. 

어쩌면 한동안 찾아오지 말라 거부했던 것 또한 그 때문이었을까. 

‘여긴 제 처소고 사적인 공간입니다. 앞으로는 이렇게 비밀통로로 불쑥 찾아오시지도 않으셨으면 해요. 정식으로 방문해 주셨으면 합니다’

파랗게 얼어붙은 오웬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올가가 미소 지었다. 진정으로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생겨 기쁘다는 것처럼.

“후궁께서는 폐하께 감추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놓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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