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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타 (135)화 (136/237)

레온은 그 후로 다시 의식을 차리지 못했으나 언제까지나 아이만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눈 붙일 틈도 없이 정무에 복귀한 오웬은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와 씨름하고 있었다. 황제가 전장으로 떠나기 전에 미리 허가를 받으려는 문서가 눈코 뜰 새 없이 밀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레온이 추락했던 지붕의 상태를 조사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던 시종관이 돌아왔다. 강한 비바람을 맞으며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지붕은 단단한 외피로 스스로를 무장하고 있었다. 관리를 맡은 궁인이 정기적으로 하인들을 시켜 묵은 때를 벗겨내곤 했으나 경사가 시작되는 처마 쪽은 낙하의 위험이 있어 위에서 물을 흘려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이는 총 열두 명으로, 후궁 두 분과  수행 시녀 둘 그리고 극단이 고용한 인부가 넷, 나머지는 지붕 관리인과 시종들이었습니다. 이중 직접적으로 황자님의 추락을 목격한 사람은 로제타 님과 수행 시녀 한 명뿐이라고 합니다. 나머지는 그 이후에 도착했습니다.”

“백조궁 시녀들은 왜 자리를 비웠지?”

오웬의 물음을 들은 시종관이 자신이 조사해 온 결과를 보고했다. “한 명은 황자님의 실종을 알리기 위해 연회장으로 떠났고 다른 한 명은 후궁께서 지시를 내려 유모와 함께 황자님을 찾고 있었다 합니다.”

“장미궁 후궁과 그 시녀는 왜 그곳에 있었다고 했지?”

“프리아 님께서 홀로 움직이시는 걸 목격하고 걱정되어 따라가셨다고 합니다.”

걱정이라.

시종의 말을 들은 오웬이 헛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시종이 보고를 이어갔다.  

“인부들이 줄을 잡고 내려간 탓에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어 확언할 수는 없지만 작은 몸집을 지닌 이가 미끄러진 것으로 보이는 흔적을 일부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궁께서는 신발을 신지 않고 그 위를 디디셨기에 발자국이 따로 남아 있었습니다. 지붕 중간까지는 발자국이 남아 있었고 그 이후로는 뭉개진 흔적이 이어진 것으로 보아 발을 헛디뎌 넘어지신 것으로 추측됩니다.”

“레온이 떨어진 곳은 어떠했지?”

“처마 끝에서 일부가 떨어져 나간 난간 장식을 발견했습니다.”

“인위적인 충격이 가해졌을 가능성은?”

“이미 부식이 진행된 상태라 작은 충격에도 간단히 떨어져 나갔을 겁니다. 황자님께서 난간에 몸을 지탱하고 계셨다면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더 추워지기 전에 수리를 끝내. 황자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시종들과 지붕 관리인, 경비병 모두 옥에 가두고 앞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경비를 강화하도록.”

“예, 폐하. 말씀하신 대로 조치하겠습니다.”

“인부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로군.”

“예, 그리고 후궁께서는 인부의 도움을 받아 안전한 곳으로 몸을 옮기셨는데 내내 혼절 상태였다고 합니다.”

“입단속 시킨 후에 적당히 치하하고 보상해 줘.”

“입이 무거운 자들이라 염려하실 것 없다는 극단주의 확답을 받았습니다. 또한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천사 역을 맡은 배우를 공중에 매달았다가 줄이 끊어지는 소동이 발생해 그대로 중지했다는 증언을 받았습니다. 황자님께서 그 장면을 보시고 실제 상황이라 오해하신 듯합니다. 다만…….”

중간에 말을 멈춘 시종관의 얼굴 위로 난감한 빛이 떠올랐다. 

“다만?”

“어제 이후 궁 안에 망측한 소문이 퍼지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후궁께서 폐하의 관심이 황자님께 옮겨가는 것을 두려워해 지붕으로 꾀어내 해를 입혔다는 주장입니다.”

“소문의 근원은?”

“황자님의 추락 장면을 목격했던 장미궁 시녀입니다.”

조심스럽게 답한 시종관을 쳐다보는 오웬의 눈빛은 싸늘했다. 

“어처구니가 없군. 어제 그 자리에 있었던 자들 모두 끌고 와. 내가 직접 심문할 테니 한명씩 들여보내도록 해.”

시종관이 지시를 따르기 위해 문으로 향했을 때였다. 무심한 말투가 날아와 지시에 살을 붙였다. 

“백조궁 후궁은 제외하고 그때 자리를 비웠다고 했던 시녀 둘만 데려와. 어제 함께 있었던 본궁 시녀들의 증언도 들어야겠어.”

차례로 도착할 증인들을 기다리며 오웬이 서류작업을 이어가고 있을 때였다. 복도에서 실랑이 소리가 들려오더니 예고 없이 문이 열렸다.

“폐하!”

작은 몸 가득 분노를 발산하며 집무실 안으로 린드가르트가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방문 목적을 짐작한 오웬이 지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지금 궁을 떠돌고 있는 소문 들으셨지요?”

“진정해. 지금 조사 중이야.”

오웬이 자리를 권했음에도 그녀는 착석을 거부하며 노려보는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이상하다 여겼습니다. 폐하의 후궁이, 그것도 두 명이나 왜 그 자리에 있었을까요?”

프리아는 물론 로제타 역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을 린드가르트는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불러오라 했으니 이제 곧 밝혀질 거야.”

“폐하께서 아끼는 그 사내후궁이 제 시녀들도 물리고 홀로 올라갔다면서요? 황자께서 험한 일을 당하실 때 가장 가까이에 있던 자가 아닙니까? 그자부터 불러오세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 귀로 직접 들어야겠습니다.”

“지금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시녀들부터 불러 증언을 듣기로 했어.”

오웬의 말을 들은 린드가르트의 눈이 분노로 타올랐다. 제 새끼를 지키는 암사자가 되어 린드가르트는 제왕에게 달려들었다. 

“지금 몸 상태라고 했어? 벌써 잊은 거야? 내 아이는 쓰러져 정신조차 차리지 못하고 있다고!”

“지금 이 상황에서 본궁으로 불러와 봤자 헛된 소문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 될 거야. 이성적으로 판단해.”

“헛된 소문인지 진실인지 내가 들어야겠다고! 레온을 구하려 했던 거면 내가 사과하고 감사를 전할게. 그냥 말 몇 마디 묻겠다는데 왜 감싸고도는 거야? 내가 네 후궁을 해하기라도 할 것 같아서?”

오웬이 그 ‘사내후궁’을 가까이하게 된 이유는 제 자식을 만들지 않고 레온에게 후계를 물려주기 위함이었다. 굳이 전하지 않아도 진심이 전달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눈앞에서 제 아이가 다치는 모습을 본 어미에게는 그저 어설픈 변명으로만 들릴 뿐이었다. 

“그런 게 아니야. 린드가르트, 내가 약속했잖아. 레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빠짐없이 알아내겠다고.”

“네 후궁이 레온을 꾀어내 해쳤다고 하면? 처벌할 수 있어?”

“내 후궁이 무슨 이득이 있어 황자를 해하지? 조금만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잖아?”

프리아를 처벌할 수 있냐는 린드가르트의 물음을 오웬은 다른 질문으로 빠져나갔다. 그런 오웬의 속내를 들여다본 린드가르트가 냉소하며 다시 화제를 원점으로 돌렸다. 

“처벌할 수 있냐고 물었잖아? 그런 각오도 없이 아서의 아이를 지키겠다는 거야?”

아서의 아이. 

린드가르트가 선택한 단어 하나하나가 아프게 오웬에게 날아와 박혔다.

“애첩이란 그런 거잖아. 관심받고 싶어서 안달 난 존재. 세상에서 네가 제일 알고 있잖아. 그렇다면 요난나는 무슨 이득이 있어 너를 괴롭혔다고 생각해?”

린드가르트를 달래려 노력하던 오웬의 얼굴에도 찬 기운이 깃들기 시작했다. 요난나. 그자의 이야기는 이렇게 함부로 꺼낼 것이 아니었다. 걱정을 끼칠까 두려워 형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비밀을 믿었던 누이에게 고백했었다. 네 잘못이 아니라 달래주며 안아주던 그녀였다. 그랬던 그녀가 오웬의 가장 아픈 과거를 무기로 삼아 제 아이를 지키려 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황태자와 똑같은 망나니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아비라 칭하기도 싫어 꼭 입에 담아야 할 때는 황태자라 말하곤 했다. 세상 모든 이들이 오웬을 제 아비를 닮은 남색가라 손가락질해도, 사내후궁에게 푹 빠져 체면을 차리지 못한다고 비웃어도 오직 한 사람. 린드가르트만은 그래서는 아니 되었다. 

“암만 후궁이라고 해도 사내잖아. 다섯 살 아이 한 명 정도는 손쉽게 끌어올릴 수 있다고 생각해. 레온이 말한 천사니 비밀친구니 하는 것도 난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어. 어쨌거나 마지막 순간에 내 아이와 있었던 건 그 사람이잖아. 추궁하려는 게 아니야. 레온이 어떻게 떨어지게 된 건지 그 이유를 듣고 싶을 뿐이라고.”

오웬의 역린을 건드렸음을 깨달은 린드가르트가 뒤로 살짝 물러났다. 변명하듯 부연한 그녀가 오웬의 상처받은 눈동자를 회피했다. 

“나를 이해해 주길 바라. 저렇게 누워있는 레온을 나는 더 이상 보지 못하겠어. 꼭 아서처럼…. 내 곁을 떠나버릴 것만 같아. 레온마저 그리된다면 난 살아갈 수 없을 거야.”

한때 서로를 아끼던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먼저 시선을 피한 린드가르트가 자리를 떠났다. 뒤이어 내실 안에서 들려온 파열음에 시종장이 뛰어 들어갔다. 

“폐하!”

기껏 오웬을 달래 시종장이 감아주었던 붕대가 풀려 너덜거리고 있었다. 다시 흘러나온 피가 나풀거리는 붕대를 타고 똑똑 떨어져 내린다. 

“여봐라! 어서 태의를 불러라! 폐하께서 손을 다치셨다!”

여러 개로 조각난 거울이 오웬의 얼굴을 비추고 있다. 너도 똑같아, 너도 똑같아. 저마다의 조각 속 일그러진 얼굴이 오웬을 비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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