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아 님! 프리아 님! 제 말 들리세요?”
다시 소리가 돌아오고 어두웠던 시야에 빛이 맺혔다. 몸을 흔든 손에 의해 정신을 차린 프리아는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흐린 눈을 깜빡였다. 마지막 기억은….
“…레온, 레온은!”
얼마나 기절해 있었던 걸까. 프리아는 올가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키며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의 모습이 없다. 보이는 것은 장미궁의 주인 로제타와 그녀의 시녀 그리고 멀찍이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낯선 사내들뿐이었다.
“폐하께서 황자님을 구하셨어요. 태의가 보고 있으니 곧 깨어나실 겁니다.”
“오웬이…?”
놀란 표정으로 되묻는 프리아를 향해 올가는 시종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밑에 계시던 폐하께서 다행히 때를 맞춰 황자님을 받아내셨다고 합니다. 아직 의식을 차리지는 못하고 계세요.”
올가의 말을 들은 프리아의 얼굴 위로 희비가 교차했다. 레온이 목숨을 구했다는 기쁨도 잠시, 의식을 차리지 못한다는 이야기에 얼마나 다쳤는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저분들이 프리아 님을 구해 주셨어요. 극단을 따라온 인부들인데 때마침 설치물을 회수하러 올라왔다고 합니다.”
무리지어 서 있는 낯선 사내들을 가리키며 올가가 말을 이었다. 험한 일에 익숙해져 있는 그들은 망설임 없이 자신들의 몸에 줄을 묶고 내려가 의식 없이 쓰러져 있던 프리아를 무사히 위로 데려와주었다.
처마 끝에서 정신을 잃었던 자신이 어떻게 위로 다시 올라왔는지 올가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화제에 오르자 호기심 어린 얼굴로 이쪽을 힐끔거리며 바라보고 있는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을 향해 프리아가 몸을 숙여 감사의 예를 표했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묘한 표정으로 프리아를 쳐다보고 있던 로제타가 말을 걸었다. 로제타가 왜 이곳에 있는지 짐작할 수 없어 의아해하며 프리아가 말을 받았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습니다.”
굴러떨어지며 여기저기 부딪친 몸에서 통증이 느껴지고 레온을 잡고 있었던 손목에서 시큰거리는 아픔이 올라왔지만 프리아는 괜찮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내후궁의 고운 얼굴에 생채기가 생겨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복잡한 심경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로제타를 사촌인 리엔이 끌어당겨 제지했다. 그리고는 시종장의 명을 받아 수습을 하기 위해 이곳으로 올라와 있던 시종들을 향해 날이 선 목소리로 외쳐댔다.
“뭣들 하시는 건가요? 저 사내가 황자님을 해하는 모습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리엔!”
당황한 로제타가 시녀를 말리려 애썼으나 역부족이었다. 무서운 표정으로 프리아를 노려보며 리엔이 고발을 이어갔다.
“당장 잡아 감옥에 가두어야 할 위험한 자입니다. 제가 폐하께 증언하겠어요!”
“시녀께서 잘못 보신 게 아닌가요? 프리아 님은 황자님을 구하기 위해 애쓰시다가 정신을 잃기까지 하셨어요.”
프리아 자신이 깨어나기 전부터 이미 실랑이가 이어져왔던 것 같다. 리엔의 말을 반박한 올가가 시종들을 바라보며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기절한 척 가증스럽게 연기를 한 거겠죠. 숨어계시던 황자님을 강제로 끌어내 밀치려다 실수로 본인까지 굴러 떨어지고, 기어코 처마 끝에 매달린 황자님의 손을 떼어내 버린 게 아닌가요?”
어처구니없는 리엔의 주장에 재반박하는 올가의 목소리 또한 격해져갔다.
“프리아 님께서 그리 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본인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었어요! 사견으로 매도를 계속하시면 저희도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시녀께서는 늦게 도착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제 눈으로 보았고 시녀께서는 보지 못하셨습니다. 보지 못한 자가 목격한 이에게 감히 사견이라 하다니요, 진정한 매도는 시녀께서 하고 계십니다.”
로제타는 리엔을 말릴 수도, 그렇다고 프리아를 두둔할 수도 없어 당황한 얼굴로 입술만 깨물었다. 사내후궁과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어 시녀들을 물렸는데 기어코 리엔이 따라나와 이 사달이 나고 만 것이다. 사내후궁의 뒤를 쫓아 이곳까지 올라오긴 했는데 워낙 넓은 곳이라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뒤따라 올라온 리엔에게 사실대로 말하자 그녀는 자신이 나서 찾아보고 오겠다며 로제타를 안심시켰다.
잠시 후, 리엔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로제타가 그녀를 향해 달려왔을 때, 리엔은 지붕 아래쪽을 가리키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지붕에 반사된 해가 눈부셔 실눈을 뜨고 있던 로제타의 눈에 위태롭게 처마 끝에 매달린 아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이의 얼굴쪽은 엎드려 있는 사내후궁의 뒷모습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흔들리고 있는 아이의 작은 다리만이 보였을 뿐이다.
놀란 로제타가 숨도 쉬지 못하고 있을 때, 순식간에 떨어져 버린 아이가 작은 점이 되어 나무 밑으로 사라졌다. 충격에 휩싸인 로제타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을 때, 뒤늦게 도착한 사내후궁의 시녀가 그녀를 따라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도착한 인부들이 처마 끝 장식 난간에 위태롭게 걸려 있는 사내후궁을 구해 올라왔다.
모든 걸 목격한 이는 리엔뿐이지만 로제타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어 갈팡질팡 그저 흔들리고만 있었다. 리엔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내후궁은 중죄인이 될 것이고, 모함이라면 리엔이 큰 벌을 받게 될 것이다. 평소 사내후궁을 증오하고 있던 리엔이 거짓을 입에 올렸는지, 아니면 그간 누구도 보지 못했던 사내후궁의 죄악을 리엔이 처음으로 목격한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시녀님의 말대로 프리아 님께서 황자님을 해하셨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죠? 프리아 님께 득이 될 것 하나 없는데 자신의 목숨까지 위험에 빠뜨리며 그리 하셨다고요?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올가의 논리적인 반박에 리엔이 눈에 불을 켜고 다시 맞섰다.
“저하께서 황자로 입적된다는 소식을 듣고 불안을 느낀 거겠죠. 황자님을 해해서 폐하의 관심을 독차지하려는 수작이었을 겁니다. 벌써 이번이 두 번째가 아닙니까? 폐하께서 장미궁에 오셨을 때도 억지를 부려 폐하의 발걸음을 돌리게 하지 않았습니까?”
“말도 안 되는 억측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때는 프리아 님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지신 상황이었어요. 정신을 잃고 쓰러지셨단 말입니다.”
“그것 참 편리하네요? 불리한 상황이 올 때마다 픽픽 쓰러지시니. 오늘도 때마침 정신을 놓지 않으셨습니까? 심각한 지병이라도 갖고 계신 게 아니라면 충분히 의심할만한 상황 아닙니까?”
리엔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비아냥의 강도를 높였다. 상황이 그쯤 되자 시종이 그녀들을 제지하기 위해 끼어들었다. 시종들 또한 난감한 상황이었다. 한쪽은 현재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는 사내후궁이요, 다른 한쪽은 황후를 논할 때 가장 많은 이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력한 후보자였다. 어느 쪽을 두둔하더라도 불똥이 튈 것이다. 우선은 이 팽팽한 대치를 이쯤에서 마무리 지어야 했다.
“두 시녀님께서는 고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어난 상황을 빠짐없이 폐하께 고할 것이니 이만 처소로 돌아가 주십시오.”
리엔의 폭언에도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프리아에게로 시종이 다가왔다.
“사람을 불러 모시게 하겠습니다. 많이 놀라셨을 테니 안정을 취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로제타에게 다가간 다른 시종 또한 비슷한 말을 건넸다. 여전히 사내후궁을 노려보고 있는 리엔을 잡아끈 로제타가 시종을 따라 먼저 자리를 떴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마자 한숨을 쉬는 그녀에게 리엔이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속살거렸다.
“두고 봐, 저 파렴치한을 내가 꼭 몰아내고 말테니. 저 놈만 사라지면 폐하께서도 다시 혜안을 되찾으실 거야. 그러면 로제타 네가 틀림없이 황후가 될 수 있어.”
이러려던 것이 아니다. 그저 자존심을 되찾으려 했던 것뿐인데. 로제타의 행동이 리엔을 자극해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오고 말았다.
“리엔, 솔직히 말해줘. 정말 프리아 님이 황자님을 해하는 광경을 본 게 맞아?”
어두운 얼굴로 자신에게 묻는 로제타를 향해 리엔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답했다.
“내가 아무리 너를 위해도 생사람을 잡진 않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 억지로 믿지 않아도 돼. 폐하께서 조사하시면 다 밝혀질 일이야.”
자신을 향한 리엔의 충정은 맹목적이었으나 무고한 이를 모함할 성정은 못되었다. 로제타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냐! 황자께서 잘못 되시기라도 한다면 너희 모두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야!”
의식을 잃은 채 오래도록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레온을 초조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린드가르트가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진땀을 흘리며 아이 곁에 붙어있는 태의와 궁정의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송구하옵니다. 외상은 입으셨지만 다행히 뇌와 장기에 큰 손상은 없으신 듯하니 곧 깨어나시리라 사료되옵니다.”
태의의 답을 들은 린드가르트의 시선이 다시 매섭게 변했다.
“다행이라니! 황자께서 이리 험한 일을 당하셨는데 그 무슨 망발인가! 뼈를 다쳐 회복에 오래 시간이 걸릴 것이라 했던 건 그대들이 아니었던가!”
나무 위로 떨어져 낙하 속도가 줄어들었고 때마침 오웬이 아이를 받아내기는 했으나 부상을 피하지는 못했다. 아이의 작은 몸에는 나뭇가지에 부딪쳐 생겨난 생채기와 멍이 가득했고 오른 팔과 왼쪽 다리는 부어올라 부목을 덧대야했다.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실금이 가 있는 상태라 한 달 이상 자중해야 한다고 태의는 진단을 내렸다.
“오웬.”
오랜만에 린드가르트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에 오웬이 고개를 들었다. 오웬 역시 침통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레온의 얼굴만을 내내 응시하고 있던 차였다.
“나는 알아야겠어요. 황자께서, 아니 내 아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했는지. 왜 혼자서 그 높은 곳에 올라가게 된 것인지. 이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누워있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꼭 알아야겠습니다.”
황자에서 내 아이로. 다시 호칭을 바꿔 부른 린드가르트가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오웬을 올려다보았다. 납득할만한 답을 오웬이 내려주지 않는다면 다시 아이를 돌려받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결연한 태도였다.
네가 레온을 지켜준다고 했잖아?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지? 자신을 향한 눈이 그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아 오웬은 신음을 삼키며 굳게 닫고 있던 입술에 더욱 힘을 주었다.
얼마나 더 잃어야하는가. 린드가르트는 이미 자신 때문에 아서를 떠나보내야 했다. 레온이 이렇듯 처참한 모습으로 무력하게 누워 있게 된 것은 온전히 자신의 탓이다. 아서가 남겨준 소중한 아이였다. 다치지 않도록 세상 그 무엇에도 상처입지 않도록 자신이 돌봐야했다.
소리 없는 원망을 묵묵히 감내하며 오웬이 길었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약속할게. 레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알아내겠어. 더는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할 거야. 맹세할게, 린드가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