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본인에게까지 들린 모양이다. 겁먹은 표정으로 로제타의 뒤로 몸을 숨긴 베카를 힐끗 내려다보며 레지나가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애석하게도 그렇습니다. 잠깐 바깥바람만 쐬어도 열이 나고 쓰러지는 몸이라 그간 본의 아니게 다회에 불참하는 결례를 저질렀네요. 송구하게도 결례를 계속 저지르게 될 것 같아 이렇게 뵌 김에 양해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술술 해 대는 레지나를 바라보며 그녀를 따라왔던 시녀가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앙다물었다.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낸 다른 시녀 하나가 한술 더 떠 땀 한 방울 흐르지 않은 레지나의 튼튼한 이마를 닦아 내기 시작했다.
“레지나 님, 힘드시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막 회복하신 참인데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그간 제멋대로 행사에 불참해 왔으나 출정을 앞둔 황제가 여는 궁중연회까지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탄신제 기간에 열렸던 가장 무도회에 참가하기는 했으나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도 즐길 수 있었기에 프리아 외의 누구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더니 찍히면 안 되니 이번만큼은 레지나 님을 끌고서라도 데려가자 시녀들이 결론을 내린 탓에 응접실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프리아와 황제의 애정 행각이나 구경하자 싶었는데 연회가 통 시작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응접실 장식장에 올려져 있던 책 한 권을 가져와 읽던 중에 후궁들의 대화가 들려왔던 것이다.
잠시 레지나와 베카, 로제타가 통성명을 하는 광경을 바라보던 다른 후궁들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끝없이 이어지던 대기에 그녀들이 불평을 터트리기 시작할 무렵 시녀장이 시종관을 데리고 응접실로 돌아왔다. 곧 연회가 시작되니 준비된 자리까지 안내하겠다는 그녀의 말에 후궁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장 마지막으로 응접실을 빠져나온 로제타가 시녀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복도를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복도 건너편에서 나타난 사내 후궁이 초조한 얼굴로 내실 안으로 사라졌다가 곧 다시 모습을 보였다.
‘프리아 님?’
발을 멈춘 로제타의 시선을 따라가 사내후궁을 발견한 수석 시녀의 얼굴이 금세 분노로 차가워졌다. 꾀병을 부려 장미궁을 찾은 황제를 기어코 꼬여 내더니 또 무슨 여우짓을 하려고.
“다 한때입니다. 신경 쓰실 가치도 없으세요.”
다독이는 시녀의 말에도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하던 로제타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 너희는 여기서 기다리도록 해.”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시녀들이 놀란 얼굴을 했다.
“로제타 님, 연회가 곧 시작됩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저희가 다녀올게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그러니 따라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습관처럼 그녀의 뒤를 따르는 리엔을 향해 로제타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로제타!”
공국에서부터 그녀를 따라와 수석시녀가 된 사촌 리엔이 당황한 얼굴로 등 뒤에서 소리쳤다. 동요하는 시녀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로제타가 이미 사라진 프리아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장미궁을 찾았던 황제가 사내후궁이 쓰러졌다는 소리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자 로제타는 궁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시녀들은 요사스러운 사내후궁이 잔꾀를 부린 거라며 분노했지만 로제타는 분노가 아닌 수치로 오랜 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스문드의 고귀한 꽃으로 태어나 단 한 번도 자존심을 다친 적이 없던 그녀다. 황제를 동경하는 마음을 가졌고 언젠가 황후가 되리란 꿈을 꾸었지만 채 피워 보지도 못한 연심보다는 빼앗긴 자존심을 되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사내후궁 프리아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당신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노라고 꼭 말하고 싶었다. 사내후궁을 향한 황제의 총애는 일시적인 것이며 곧 자신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 다른 후궁들은 생각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로제타의 생각은 달랐다. 차갑게 미소 짓던 아름다운 얼굴이 순식간에 깨어지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 역시 로제타와 아스문드 공국의 가치를 인정했기에 장미궁을 찾았을 것이다. 아비를 핑계로 그를 불러낸 자신의 말을 비웃듯 흘려들으면서도 그는 그녀가 최적의 황후감이라는 것에는 동의한다는 말을 했었다. ‘아직’ 그리하지는 않겠다는 말은 언젠가는 그리 하겠다는 의미와 다름없었다.
냉소와 여유를 몸에 두르고 로제타를 꿰뚫어보던 그의 표정은 백조궁 시녀가 달려와 전한 소식에 순식간에 조각나 깨어졌다. 로제타를 향해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은 그가 눈앞에서 사라진 후에야 그녀는 자신이 뱉었던 말의 의미와 무게를 실감할 수 있었다.
‘마음에 품지 않아도 좋다, 그저 황손을 보게 해 달라.’
황제가 로제타를 진심으로 품을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여인임을 내세워 황손을 볼 수 있게 해 달라니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발언이었던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은 제 입술을 저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아스문드를 아끼고 아버지를 존경한다 해도 더 이상의 구걸은 사절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황제를 찾아가 그때의 발언을 철회하고 싶었다.
그리고 사내후궁을 만나게 된다면 그의 마음을 묻고 황제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라면 두 사람을 축복한다 말해 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잃어버린 자존심을 되찾아오고 싶었다. 서로의 시녀를 물리고 프리아를 홀로 만나 이야기 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로제타에게 찾아온 기회였다. 그러나 이것 또한 치기임을 그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로비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던 올가의 발이 멈췄다. 지금 린드가르트 님을 찾아가 소식을 전한다 해도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다른 시녀들이 고한다 했으니 자신까지 내려가 혼란을 더할 필요는 없었다. 차라리 레온 저하를 찾는 일에 합류하는 것이 더 보탬이 될 것이었다. 급한 마음에 앞뒤 가리지 않고 무작정 연회장으로 가려고 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올가가 몸을 돌려세웠다.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온 올가가 유모와 함께 아이를 찾고 있던 이사벨과 마주쳤다. 사내후궁의 행방을 묻는 올가의 말에 이사벨이 난처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오시면서 보지 못하셨어요? 저에게 유모님과 함께 행동하라 하시곤 다른 곳으로 사라져 버리셨어요. 혼자 황자님을 찾고 계신 것 같은데 어서 따라가 보세요. 올가 님이 돌아오시면 함께 있겠다 하셨거든요.”
얼굴도 모르면서 무작정 찾으려하다니. 아무리 사내라고는 하나 후궁의 신분으로 혼자 돌아다니고 있는 프리아를 올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졸지에 찾아야 할 이가 둘로 늘어난 셈이다.
“그럼 프리아 님은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어느 쪽으로 가셨는지 아시나요?”
“아까 3층으로 올라가시는 것 같았어요.”
아무리 지시를 따랐다고는 하지만 후궁을 홀로 두었다는 실책을 실감한 이사벨이 울상을 지었다. 사내후궁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던 유디스를 그저 과잉충성이라 비웃었는데 오늘은 그녀의 부재가 이리 뼈아프게 다가올 수가 없었다. 야단 들으면 어떻게 하지? 발을 동동 구르는 그녀를 뒤로 하고 올가가 빠르게 위층으로 향했다.
본궁의 꼭대기 층까지 올라온 프리아가 텅 빈 복도를 빠르게 훑었다. 붉은 융단 바닥에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깃털이 눈에 띄었다. 길을 알려 주는 것처럼 얌전히 놓여 있는 깃털의 궤적을 따라가며 프리아는 출구를 찾아 시선을 바삐 움직였다.
너무 멀어 잘 보이지 않던 복도 끝에 다다랐을 때 기적처럼 열린 문 하나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 문은 성의 지붕으로 향하는 여러 개의 출구 중 하나였으며 다른 출구와 마찬가지로 평소에는 늘 잠겨 있었다. 탑과 지붕의 청소를 하거나 수리가 필요할 때만 열렸는데 연극 단원들이 아직 설치했던 장치를 회수하지 못한 까닭에 여전히 개방되어 있었다.
뛰다시피 빠르게 계단을 걸어 올라가자 곧 눈앞에 청명한 초겨울 하늘이 나타났다. 차가운 바람이 탑과 탑 사이를 넘나들며 바닥에 떨어진 흰 깃털을 장난치듯 이곳저곳으로 옮기고 있었다. 레온이 과연 여기에 있을까.
장대한 궁의 면적만큼이나 지붕은 광활한 넓이를 자랑하고 있었다. 한눈에 다 보이지 않는다. 언젠가 오웬과 함께 올라와 별을 보았던 곳이 어디쯤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마리포사를 따기 위해 올라왔던 밤에는 어두워 실감하지 못했는데 밝은 한낮에 보니 곳곳에 올려진 거대한 첨탑과 종탑이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위압감을 안기고 있었다. 흘러간 세월을 말해 주듯 돌에는 이끼가 끼어 있고 깨어진 곳에는 잡초가 자라나 있다. 잘못 디디면 위험할 정도로 가파른 경사로 이루어진 지붕면도 있었는데 내리쬐는 해에 반사되어 눈부시기까지 했다.
“레온? 여기에 있니?”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기며 프리아는 레온의 이름을 불렀다. 사방은 고요해 프리아의 목소리만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레온! 들리면 대답해 줄래? 모두들 너를 찾고 있어.”
바람이 매서웠다. 그늘에 있다 보니 더욱 추워져 해가 비치는 곳으로 장소를 옮겨 쪼그리고 앉아 있던 아이의 귀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티아?’
귀를 쫑긋 세운 레온이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내밀었다. 목소리는 들려오는데 마티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마티아? 마티아야?”
천천히 몸을 일으킨 레온이 해를 가리기 위해 손차양을 이마에 올리고 발뒤꿈치를 들어올렸다.
“마티아!”
순간 환청인가 싶었다. 멀리서 들려온 아이 목소리에 프리아가 걸음을 멈춰 섰다. 마티아! 반가운 아이의 음성이 돌림노래처럼 따라온다.
“레온! 어디 있는지 말해 줘. 내가 그곳으로 갈게.”
잘못하다가는 미끄러져 몸을 다칠 수 있다. 아직 어린 아이에게는 너무나 위험한 장소였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걸어가는 프리아의 망막에 작은 형체가 맺히기 시작했다.
“마티아! 나 여기 있어!”
여기야, 여기. 마티아를 만난 기쁨에 펄쩍 뛰던 레온이 표정을 굳혔다. 천사를 매달았던 끔찍한 장치로 마티아가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놈들이 다시 오면 어떻게 해? 마티아가 잡히면 어떻게 하지?
“마티아! 도망 가! 나쁜 놈들이 있어! 네 친구를 잡아갔어!”
있던 자리에서 기다리라는 프리아의 말을 듣지 않고 아이가 멀리서 달려오기 시작했다. 아이의 짧은 팔다리가 위태롭게 흔들리며 속도를 높였다.
“레온, 위험하니까 달리면 안….”
프리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작은 몸체가 중심을 잃었다. 뜨거운 철제지붕 위로 떨어진 아이가 미끄러져 내려가는 광경이 느린 속도로 프리아의 눈앞에 펼쳐졌다.
“레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