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는 낯선 이들로 인해 평소보다 북적이는 복도를 레온은 날쌘 다람쥐처럼 빠져나갔다. 상기된 얼굴로 계단을 뛰어올라가는 어린 아이와 마주친 이도 있었으나 그저 혀를 쯧쯧 차며 자리를 비켜주었을 뿐이다. 뼛속까지 귀족인 그들은 아이를 돌보는 유모나 시종이 근거리에서 지켜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곧 연회가 시작될 시간이었기에 제 식구를 챙겨 계단을 내려가기 바빴다.
‘위로 올라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꼭대기 층에 도착한 레온이 막힌 복도 앞에서 발을 굴렀다. 선조들의 초상화가 걸린 넓은 복도에서 레온이 헤매고 있을 때 저편에서 자루를 짊어진 사내들이 나타났다.
“어이, 이쪽이야!”
두리번거리던 사내들은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레온은 사내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몸을 움직였다. 저쪽에 길이 있는 걸까. 바삐 뛰어온 작은 발이 융단에 떨어진 흰 깃털 앞에서 멈췄다. 사내들이 어깨에 메고 있던 자루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었다.
‘그 놈들이야! 나쁜 사람들!’
떨리는 시선으로 고개를 든 레온 앞에 위로 향하는 계단 하나가 보였다. 그리고 그 계단 끝에는 선명한 푸른 하늘이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작은 주먹을 움켜쥐고 계단을 오르는 레온의 눈에 긴장이 들어찼다. 마지막 계단을 딛자 레온의 눈앞에 뾰족하게 솟은 첨탑과 거대한 크기의 종탑이 나타났다. 시선을 압도하는 웅장한 자태에 절로 뒷걸음이 쳐졌다.
‘무서워.’
그러나 마티아를 두고 갈 순 없었다. 난 용감한 기사니까. 할 수 있어. 레온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들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위로 향했던 시선을 아래로 내려 보니 탑과 탑 사이 마당처럼 널찍한 공간이 눈에 띄었다. 탑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끼이익거리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지? 마티아, 어디에 있어?’
소리의 행방을 찾아 고개를 돌린 레온의 시선 속으로 하늘에 떠 있는 천사의 모습이 보였다. 커다란 날개를 펼친 천사가 줄에 칭칭 묶여 자유를 뺏긴 채 살려 달라 애원하고 있었다.
“아프다고 했잖아요! 피멍 들면 당신들이 책임질 거예요?”
허공에 매달린 여인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겉옷 안에 숨긴 밧줄이 아프게 몸을 옥죄인 까닭이다. 그녀의 몸을 지탱하는 밧줄이 도르래를 걸쳐 사내들의 손에 잡혀 있었다. 그들은 영웅에게 신의 계시를 내리는 천사의 등장을 연출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뭘 그렇게 엄살이 심해? 새빠지게 힘주느라 죽어나는 건 이쪽이라고.”
장갑을 끼고 있어도 화끈거리는 통증에 얼굴을 찌푸리며 덩치 큰 사내가 말을 받았다.
“아까처럼 줄 놓치기만 해 봐요! 내가 혼자 죽을 줄 알아? 당신들 다 데려갈 거라고! 힘 좀 제대로 써 보라니까!”
앙칼지게 대답하던 배우의 입에서 다시 비명이 흘러나왔다. 묶여 있던 여러 갈래의 밧줄 중 하나가 풀려 몸의 중심을 잃게 된 것이다. 불안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연출가가 결국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간만에 선보이는 야외극이라 욕심을 부렸는데 이러다간 황제와 귀족들 앞에서 망신을 톡톡히 당하게 될 판이다.
무대 장치가 완비된 전용극장에서와 같은 연출을 야외에서 재현하려 했던 그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원래 천사 역을 맡았던 몸집 작은 어린 배우가 배탈로 쓰러진 까닭에 급하게 다른 배우로 교체했으나 무게가 달라 생각했던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배우가 크게 다칠 위험이 있었다.
“안 되겠어. 아무래도 무리야. 그냥 철수하고 무대 뒤에서 등장하는 걸로 가자고.”
연출가가 쓴 입맛을 다시며 철수를 지시했다. 그의 말을 들은 사내들이 배우를 내리기 위해 느린 속도로 밧줄을 움직였다.
“진작 그렇게 할 것이지! 이게 뭐예요? 이봐요! 살살 하라니까!”
휘청거리며 바닥에 내려앉은 배우가 불평을 거듭했다. 연출가가 능숙한 말솜씨로 그녀를 달래는 동안 단원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던 소도구를 정리했다.
“저건 어떻게 할까요?”
임시로 설치한 도르래와 무대장치를 가리키며 묻는 단원의 말에 연출가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냥 둬. 인부들 올려 보내서 치우게 할 테니까 문 잠그지 말라고 부탁해 두고.”
단원들이 빠져나가며 아래층 내실에서 대기 중이던 관리에게 연출가의 말을 전했다. 고개를 끄덕인 관리의 시선이 창문 밖 본궁 대정원 앞에 설치된 야외무대로 향했다.
사람들이 사라진 후 첨탑 그늘 아래 몸을 숨겼던 레온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지붕 위로 떨어진 깃털이 어지럽게 날리고 있었다.
‘그 놈들이 천사를 끌고 갔어.’
레온은 숨죽인 채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 입이 거친 사내들에 의해 줄에 묶인 채 고통스러워하던 천사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티아 역시 그놈들의 눈에 띈다면 꼼짝없이 잡혀가고 말 것이다. 끌려간 천사도 구하고 싶었지만 마티아를 위험에 빠지게 둘 수는 없었다.
‘미안해.’
갈등하던 레온이 다시 탑 그늘 아래 몸을 숨겼다. 마티아는 늘 하늘에서 날아왔으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가장 먼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마티아에게 다른 천사가 잡혀갔다는 말도 꼭 전해야 했다.
“괜찮으세요?”
백조궁에서 챙겨온 의상을 프리아에게 입혀 주고 있던 올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함께 따라왔던 이사벨은 가족들에게 인사하고 오겠다며 프리아의 허락을 받아 자리를 비웠다.
“괜찮아.”
몸 상태를 묻는 올가의 질문에 프리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본궁에 오기 전, 혹시 몰라 약을 미리 먹어두었다. 그 덕분인지 발작 없이 무사히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다. 이틀 후면 오웬이 떠난다. 그를 배웅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모습만을 보이고 싶었다.
프리아의 대답을 들은 올가의 시선이 슬며시 뒤로 향했다. 황제의 공식 침실 관리를 맡은 시녀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프리아의 지시를 기다리며 도열해 있었다. 다행히 아는 얼굴은 없었다. 황제가 바뀌며 시녀들 역시 전원 물갈이된 모양이었다.
바깥은 벌써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본궁 중앙과 마주한 곳에 야외무대가 설치되고 그 뒤로 수십 개의 테이블과 수백 개의 의자가 놓였다. 가장 넓은 테이블은 황제의 차지였으며 주변을 황족들이 감싸고 있었다.
후궁들의 자리는 따로 마련되어 있으나 오늘 프리아는 황제와 같은 테이블에 앉을 예정이었다. 황자 입적이 발표될 레온이 황제의 왼쪽에 앉게 될 것이며 오른쪽은 원래 황후의 자리였으나 아직 결정되지 않은 까닭에 태후의 몫이었다. 레온의 옆이 린드가르트의 자리이고 프리아는 태후의 곁에 앉게 될 것이라 했다. 사내후궁이 공식적으로 황제의 옆에 모습을 보인다는 소식에 사람들의 호기심 많은 눈길이 아직 채워지지 않은 빈자리에 모이고 있었다.
그 앞에 나설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긴장으로 목이 마르기 시작했다. 이사벨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마른침을 삼키고 있을 때 문밖에서 실랑이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중년 시녀의 눈짓을 받은 젊은 시녀가 빠르게 상황을 살피러 밖으로 나갔다. 다시 돌아온 그녀가 굳은 얼굴로 중년 시녀에게 말을 전했다.
“무슨 일이지?”
프리아가 묻는 말에 나이 든 시녀가 앞으로 나서며 공손히 자세를 낮췄다. 젊은 시녀와 달리 그녀의 표정에는 어떠한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황자님의 유모가 폐하를 뵙겠다며 왔습니다. 황자님이 모습을 보이지 않아 찾고 있다 하옵니다.”
황자라고 하면 온 궁 안에 단 한명, 레온밖에 없었다. 놀란 프리아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온이 없어졌다고? 어서 안으로 들어오게 해.”
무심코 경칭 없이 황자의 이름을 부른 프리아의 태도에 여인이 멈칫했으나 곧 눈짓으로 다른 시녀에게 지시를 내렸다. 젊은 시녀가 다시 밖으로 나가 참한 인상을 지닌 중년 귀족 여성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후궁께 예를 표하세요.”
프리아가 누군지 몰라 당황하던 여인이 뒤늦게 정체를 깨닫고 예를 표했다.
“폐하는 연회에 참석중이십니다. 저희가 내려가 바로 폐하께 고하겠습니다.”
중년 시녀의 말에 여인이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 없어진 거죠?”
폐하의 애첩이 왜 황자님께 관심을 보일까. 그녀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공손히 대답했다.
“잠시 간식을 가지러 간 사이에 사라지셨습니다. 평소 자주 가시던 곳은 모두 찾아보았으나 아직 찾지 못하였습니다.”
복도를 지키던 시종들도 레온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궁의 곳곳을 뛰어다니며 황손을 찾고 있지만 아직 희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린드가르트 님께 알리고 오겠습니다.”
얼굴이 창백해진 올가가 프리아의 허락을 구하자 중년 시녀가 발 빠르게 그녀를 제지했다.
“그 또한 저희가 할 일입니다. 시녀께서는 맡은 소임에 충실해 주세요.”
그녀의 말에 대항할 수 없는 올가 대신 프리아가 나섰다.
“나머지는 모두 나가서 레온을 찾아. 어서 빨리!”
“후궁께서는 연회에 참석하셔야 합니다.”
“내 시녀가 돌아오면 내려갈 거야. 내 시녀들로 충분하니 빨리 나가서 레온부터 찾아.”
프리아가 팽팽히 맞서자 여인이 한발짝 물러났다. 후궁을 따라온 시녀도 여럿이니 황자를 찾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의견에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아래에서 뵙겠습니다. 후궁께서 준비가 되면 내려오신다고 폐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녀들이 나가는 것과 동시에 자리를 비웠던 이사벨이 돌아왔다. 그리고 프리아의 허락을 받은 올가가 급히 연회장으로 향했다. 어리둥절해하는 이사벨을 데리고 프리아는 빠르게 방을 빠져나왔다. 두 사람은 아이를 찾기 위해 분주히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