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들려오는 소음에 눈이 뜨였다. 무언가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 그리고 시끄럽게 떠드는 낯선 사내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는 프리아의 얼굴 위로 차가운 손이 와 닿았다. 세안을 마친 오웬이 손의 물기를 닦지도 않고 프리아의 뺨에 원을 그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예요?”
이제는 목으로 내려가 간지러움을 태우는 손을 붙잡아 제지하며 프리아가 오웬에게 물었다.
“무대 설치 중이야. 오후에 요란한 연회를 열 예정이거든.”
곧 출정을 앞둔 귀족들이 모두 궁으로 모였다. 그들을 격려하기 위한 연회가 밤낮으로 벌어질 예정이었다. 그들을 배웅하기 위한 가족들까지 궁으로 몰려든 까닭에 손님맞이를 하느라 곳곳이 분주했다.
그러고 보니 올가에게서 후궁들이 모두 참가하는 궁중 연회가 있을 거란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유디스가 있었더라면 며칠 전부터 요란하게 치장할 준비를 했겠지만 올가는 동요 없이 어떤 의상을 준비하면 되겠냐는 질문을 던졌다. 격식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분위기를 맞춘 야회복이면 된다고 대답했다. 잊고 있었는데 올가가 말한 연회가 오늘이었나 보다.
“구경할래?”
프리아를 안아 일으킨 오웬이 그 자세 그대로 창문가로 향했다. 알몸에 시트 한 장을 두른 차림새인 프리아가 당황해 벗어나기 위해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누가 보면 어떻게 해? 내려 줘요!”
“저기에선 보이지도 않을걸. 보인다한들 뭐 어때. 사이 좋구나 여기겠지.”
뻔뻔한 미소를 지은 오웬이 프리아를 높이 안아 유리 창문 가까이 대주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저기 봐.”
아래쪽으로 시선을 내리며 오웬이 말했다. 그 시선을 따라 프리아가 내려다본 곳에는 수십 명의 인부가 모여 나무를 옮기고 망치질을 하고, 톱질을 하며 간이무대를 설치하고 있었다.
사기 진작 겸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수백 년 전 벌어진 제국의 영토 확장 전쟁을 소재로 한 야외극을 올리기로 했다. 굳이 그럴 것까지 있겠냐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오웬을 향해 시종장은 용기와 희망을 강조하며 열띤 연설을 펼쳐 보였다. 고된 행군을 앞둔 이들에게 잠깐의 유희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리랴마는 오웬은 시종장의 의욕을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뭘 어찌나 요란하게 준비하는지 지붕에도 장치를 설치한다더군.”
오웬이 이번에는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우선은 무대설치에 집중하기로 한 모양인지 천장에서는 아직 소음이 들려오지 않았다.
“지붕에요? 줄타기라도 하는 건가요?”
호기심이 생긴 프리아가 덩달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자기 욕심으로 일으킨 전쟁이면서 그 노친네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거든.”
먼 과거의 조상에게 박한 평가를 내리며 오웬이 말을 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에게 계시를 받는 장면을 연출할 거래.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는 모르지만.”
이따 저 아래서 지켜보자고.
프리아를 다시 침대에 내려놓은 오웬이 미소 지었다.
“더 있다가 나와. 먼저 나갈게.”
여전히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침대에서 일어서려는 오웬의 등으로 프리아의 무게가 쏠렸다. 등 뒤에서 안아 온 손을 토닥거리며 오웬이 달래듯 말했다.
“나도 가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어. 아니면 내가 게을러서 폐위되는 게 좋아?”
그렇다는 듯 프리아 역시 장난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폐위되면 뭘 하지? 알훼니아로 가서 막내공자의 첩이 되어 볼까?”
“좋아요. 듬뿍 예뻐해 줄게요.”
“그대는 하루를 어떻게 보내지? 대공의 일을 돕나? 내가 가끔 찾아가서 방해해도 돼?”
“약초를 찾고 구분하는 걸 알려 줄게요.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진짜 오래 걸리겠다. 노숙해야겠네.”
“노숙을 시킬 거야? 호강시켜 주는 게 아니고?”
“남편이 하자는 대로 따라주세요, 부인. 목이 마르면 냇물을 마시면 되고, 물고기 잡아서 구워 줄게요. 밤이면 돌을 베개 삼아 잠이 들고 새소리를 들으며 눈뜨는 거예요.”
이렇게 곱게 자랐는데 고생시킨다고? 그런데 내가 부인이야?
엄살을 부리는 오웬의 등에 뺨을 비비면서 프리아는 이룰 수 없는 꿈들을 이야기했다. 봄이 오면, 여름이 오면, 가을이 오면.
후일 전장에서 오웬은 그날 아침을 떠올리곤 했다. 시종장이 수통에 담아온 냇물을 마실 때마다, 사냥한 짐승을 거칠게 찢어 병사들과 나눠 먹으며, 밤이면 천막을 걷어 쏟아질 듯 가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프리아를 생각했다. 그것이 프리아와 함께한 마지막 평화의 순간이었다.
“의젓하게 행동하셔야죠. 저하는 이제 황손 아기씨가 아니라 폐하의 아드님이 되실 거랍니다. 황자 전하가 되시는 거예요.”
요즘 들어 부쩍 산만해진 레온을 유모가 달랬다. 오늘 연회에는 모든 황족과 귀족들, 후궁들은 물론 레온의 모친인 린드가르트 역시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 자리를 빌려 레온의 황자 입적이 발표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치만….”
예식용 정복을 입혀 주는 유모의 손을 벗어나려 애쓰며 레온이 입술을 내밀었다. 아직 아버지 허락도 받지 못했는데 숙부님의 아이가 될 순 없었다.
“폐하의 아드님이 되는 게 싫으세요?”
황제를 유독 따랐던 레온이었기에 그저 기뻐할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레온은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 안절부절못하며 툭하면 저를 방에서 나가라며 떠밀거나 바람이 찬 날에도 창문을 닫지 말라며 소리 높여 화를 내곤 했다.
“…그건 아니야.”
고개 숙인 레온이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이러시는 걸까. 얌전하던 황손의 반항에 유모가 난색을 표했다. 황자 입적이라니. 고작 유모인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레온에게는 다시 없을 기회였다. 황제에게 아직 자식이 없다하나 이제 고작 스무 살이었다. 지금은 사내후궁을 끼고 사느라 여인인 후궁들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해도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를 일이다. 황제가 전쟁으로 궁을 비워야 하는 일만 아니었다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이러다 태자가 되실 수도 있지 않을까? 혹, 황제가 이대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렇게 된다면 눈앞에 있는 어린 아이가 황제로 등극할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상상에 진저리를 치며 유모가 다시 어린 황손을 달랬다.
“그럼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러셔요? 린드가르트 님이 보내오신 옷이에요. 이걸 입고 뵈러 가시면 정말 기뻐하실 거랍니다.”
그것도 아니라며 레온이 고개를 흔들었다. 벌써 오후가 다 되었는데 정작 행사의 주인공이 이리 뻗대고 있으니 큰일이었다. 혹시 배가 고프신 걸까. 태반이 남긴 채였던 점심 메뉴를 떠올리며 유모가 한숨을 쉬었다.
“저하께서 좋아하시는 사탕과자를 좀 가져다 드릴까요? 배고프지 않으세요?”
배는 고프지만 먹고 싶지 않다. 레온에게서 답이 없자 유모가 입히려던 정복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조금만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연회가 시작되면 맛있는 음식이 많이 나올 거예요. 조금만 참으세요.”
유모가 문밖으로 나가기 무섭게 레온이 까치발을 들어 창문을 밀어냈다. 부쩍 차가워진 바람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마티아, 왜 안 와?’
창틀에 몸을 기대며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던 레온이 발을 동동 굴렀다. 숙부님의 아이가 되는 건 좋지만 그전에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숙부님이 좋지만, 세상에서 아버지, 어머니 다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자신이 숙부님의 아이가 되어 버리면 아버지가 섭섭해하실 수도 있지 않은가?
‘저번에 마티아가 찾아왔던 건 분명 이 일 때문이었을 거야.’
하늘에서 아버지는 언제나 레온을 지켜보고 계시니까 마티아에게 말을 전해 달라 부탁했을 것이다. 그래서 찾아왔던 거지?
‘미안해. 내가 그때 넘어져서 마티아를 놓치고 말았어.’
왜 찾아오질 않지? 레온의 작은 머리가 고민으로 가득 찼다.
‘레온이 날 생각할 때면 나도 레온을 볼 수 있어.’
맨날맨날 생각했는데 보이지 않는 걸까?
‘레온이 나를 기다리지 않고 잘 지내고 있는 그 어떤 날에 우리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마티아가 남긴 당부를 떠올리던 레온이 억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기다려서 안 오는 거야? 그치만…. 어떻게 안 기다려.”
다섯 살 아이에겐 너무나 어려운 고민이었다. 숙부님의 아이가 되고 싶지만 아버지가 싫다고 하면 거절할 생각이다. 그런데 그러면 또 숙부님이 섭섭하다 하실 텐데? 어쩌면 좋지.
“어?”
목을 빼고 하늘을 올려다보던 레온의 눈에 희고 나풀거리는 무언가가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마치 천사의 날개와도 같은 깃털 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다.
“마티아!”
마티아가 왔다, 마티아가 온 거야. 날 만나러 왔어!
레온은 힘껏 손을 뻗어 위를 향해 흔들었다.
“마티아!”
소리쳐 불러보아도, 손 아프도록 계속 흔들어 보여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간간이 깃털 한두 개만 위에서 떨어져 내릴 뿐이었다. 그때였다. 쿵하고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낯설고 거친 어른들의 고성이 들려왔다.
“어어어어!! 떨어진다!”
“저기 잡아!”
“그러다 놓치겠어!”
“시간이 없어! 뭣들 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뒤를 이은 순간 레온은 마티아가 나쁜 인간들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마티아다! 마티아가 잡혔어! 그래서 나를 만나러 올 수 없었던 거야.
충격으로 흔들리던 레온의 눈동자가 차츰 평온을 되찾았다. 마티아는 레온의 소중한 비밀친구였다. 그리고 레온은 용감한 기사였다. 자신만이 마티아를 구할 수 있었다. 결심을 마친 레온이 주먹을 쥐고 뛰쳐나갔다.
내가 갈게, 마티아. 내가 지금 가서 구해 줄 거야. 조금만 기다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