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본궁에 있었다고 했지?”
“예?”
눈에 띄게 당황하는 올가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낀 오웬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시종장이 그리 말하던데 아닌가? 재정대신이 추천했다고 하던데?”
폐하께서 날 알아보신 걸까. 순간적으로 동요했던 올가가 간신히 정신을 붙잡았다. 이제는 익숙해져 본인조차 참으로 여기게 된 거짓말이 입밖으로 술술 흘러나왔다.
“먼 친척 어르신입니다. 본궁에 잠시 있다가 처소를 옮겨 린드가르트 님을 모셨습니다.”
그리 된 거로군. 올가의 답을 감흥 없이 듣고 있던 오웬이 용건으로 들어갔다.
“잠시 궁을 비울 예정이다. 시종장은 나와 동행할 예정이니 앞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본궁 시녀장에게 알리도록 해.”
그간 시녀장이 할 일까지 시종장이 맡아 왔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유일한 사내후궁이라는 명분 아래 묵인된 일이었다. 오웬이 부재하는 동안은 다시 시녀장에게 그 역할이 돌아갈 것이다. 자리를 비우는 동안 아예 본궁 시녀장에게 백조궁을 맡길 생각이었던 오웬이 마음을 바꾸었다. 괜히 주변 사람을 바꾸어 프리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예, 그리 하겠습니다. 폐하.”
대답을 마친 시녀가 고개를 숙인 채 자리를 지키고 있자 오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자리를 지킬 때와 지키지 않아야 때를 여전히 구분할 줄 모르는군. 물러가라고 매번 꼭 말을 해야 아는 건가.”
온실에서의 일을 다시 한번 언급하는 오웬의 말에 올가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이곳은 침실이고 사내후궁은 잠이 들었다 해도 황제가 그를 찾았으니 어서 자리를 비켜줘야 하는 것이 맞았다. 할 말이 남은 사람처럼 입술을 벌렸다 다물기를 되풀이하던 올가가 뒤늦게 예를 표하며 침실에서 물러났다.
문 앞에서 돌아본 올가의 눈에 침대에 몸을 뉘이는 황제의 모습이 들어왔다. 잠든 후궁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그의 얼굴 위로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내후궁의 사통과 투병, 감춰둔 수상한 약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도 황제에게 털어놓지 못했다. 고된 정무로 수척해진 그에게 걱정의 말 한마디 건넬 수 없었다.
자신이 그날 밤 보았던 것은 진정 사통이 맞을까. 저렇게 약해진 몸 상태로 황제가 떠난 사이 죽기라도 한다면. 올가는 지금 자신이 걱정하는 것이 황제인지 사내후궁인지 또는 스스로의 안위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저 아직은 때가 아니다. 다시 한번 조용히 되뇌었을 뿐이었다.
“음식도 가리고 사람도 가리고. 그래도 잠은 가리지 않아 다행이네.”
간신히 짬을 내어 찾아왔는데도 예쁜 눈동자 한 번 보여 줄 기미 없이 푹 잠들어 있는 연인에게 오웬이 투정의 말을 건넸다.
“나 곧 떠나야 하는데 잠든 모습만 보여 줄 거야?”
이 모습도 예쁘기야 하지. 그러나 오웬은 눈 뜬 프리아 앞에서 힘들고 그리웠다 마음껏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너를 놓고 가고 싶지 않다 말하면 또 따라와 준다 말해 줄 것인가. 위험한 전장에 데리고 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오웬은 어디든 기꺼이 함께하겠다 말하던 프리아의 그 얼굴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자신을 향한 순수한 애정과 굳은 믿음으로 채워진 그 눈동자를 다시 한번 볼 수 있다면 전쟁터가 아닌 지옥으로 향하는 길이라 해도 흔들림 없이 걸어갈 수 있는 용기가 솟아날 것만 같았다.
아쉬운 마음에 감긴 눈꺼풀 위로 잔 입맞춤을 새기고 있던 오웬이 잠시 후 몸을 일으켰다. 회의는 끝이 없고 오웬이 결정해야 할 것들은 태산처럼 쌓인 채 집무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본궁으로 돌아간 오웬이 회의를 막 재개한 시각, 노을이 내리기 시작한 창 아래에서 프리아가 눈을 떴다.
“일어나셨어요? 좀 전에 폐하께서 오셨….”
이사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발조차 신지 않은 프리아가 침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내실에서도 찾는 이를 발견하지 못하자 복도로 향했다.
“프리아 님!”
말릴 새도 없이 계단을 뛰다시피 걸어 내려가는 프리아를 보며 이사벨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일 또 들르겠다 전해 달라 했는데 듣기도 전에 뛰쳐나간 사람이 문제지. 내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오웬은?”
“예?”
“못 봤어? 벌써 갔어?”
정원에서 빗질을 하고 있던 하녀를 발견한 프리아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 황제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어린 하녀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소녀가 아둔해 주인께서 찾으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옵니다.”
또래보다 영민한 그녀는 다행히 상황에 맞는 대답을 유추해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뵌 적은 없었는데 참으로 고운 사내가 아니더냐. 슬쩍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에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금빛 머리칼이 보였다. 전에 있던 곳에서 주인 아가씨가 가지고 놀던 인형이 꼭 저렇게 생겼었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이색의 눈동자를 이리 가까이 본 것도 처음이었다.
“프리아 님.”
이사벨에게서 사정을 들은 올가가 프리아의 뒤를 따라 내려왔다. 그녀를 발견한 하녀가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만져 보지도 못한 인형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호되게 종아리질을 당했던 과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새 인형을 가지고 싶었던 어린 주인의 자작극이었음이 밝혀진 뒤에도 그녀는 사과 한마디 듣지 못했다.
먼저 입궁한 친척 언니의 뒤를 따라 백조궁에 오게 된 그녀는 쑥덕거리는 하녀들의 말을 들으면서도 자신이 오게 된 곳의 사정이 어떠한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친척 언니는 그녀의 질문에 귀찮아하며 인형놀이에 빗대 설명해 주었다. 후궁은 황제가 가지고 노는 비싸고 예쁜 인형이며 그중 사내후궁이 가장 예쁨을 받고 있다고. 그런데 왜 저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있을까.
“폐하께선 이미 본궁으로 돌아가셨어요. 날이 차니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소녀가 보기에는 역시나 까마득하게 높은 신분인 시녀님이 걸치고 있던 숄을 벗어 사내후궁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뒤돌아 걸어가는 맨발조차 희고 아름다워 소녀는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발 다치세요.”
신발조차 신지 않고 뛰쳐나온 자신에게 제 신발을 벗어주는 올가에게 프리아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몸이 큰 편이 아니라 해도 사내의 발이 작은 여인의 신발에 들어갈 리 만무하다.
“괜찮아.”
꿈에서 오웬을 만났다. 지난여름 함께 보냈던 시간들처럼 함께 책을 읽고 밥을 먹고 밤의 정원을 산책하는 꿈을 꾸었다. 눈을 떴을 때 아직 꿈속에 있는 것인지, 현실이 꿈인지 알 수 없었다. 바닥에 느껴지는 이 차가운 흙의 감촉이 현실이다. 이미 낙엽도 다 떨어져내린 황량한 정원이 현실이었다.
“걱정 마세요. 내일 다시 들르신다고 하셨어요.”
신발도 신지 않고 황제를 찾아 뛰쳐나온 사내후궁이 순간 애처롭게 느껴져 올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여전히 싫고 미운 사내지만 이렇게 가끔 사람 마음을 누그러뜨릴 때가 있었다. 얼토당토않은 자부심을 부리던 유디스의 마음이 가끔 이해되는 순간이 있었다. 점차 생기를 잃어가는 예쁜 얼굴과 저항 없는 육체를 제 손으로 씻기고 입히고 있노라면 값비싼 인형을 사람들 앞에 선보이는 주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폐하를 향한 마음이 진심이기만 한다면 눈감아줄까.
이사벨이 들었다면 수십 번 코웃음을 쳤을 생각에 잠겨 올가는 주머니에 든 환약 두 알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우선은 이게 무언지 알아보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게 뭐죠?”
바구니의 뚜껑을 열자마자 나타난 털뭉치를 내려다보며 프리아가 당황한 목소리로 오웬에게 물었다.
“설마 개를 처음 본다는 말은 아니겠지? 태어난 지 세 달쯤 되었다. 젖도 이미 떼었고 크게 손 갈 일은 없을 거야.”
누가 이게 뭔지 몰라서 물어봤겠는가? 연유를 묻는 것이지. 대답에 수긍하지 못한 프리아가 다시 자신을 올려다보자 오웬이 태연한 얼굴로 바구니에서 강아지를 꺼내들었다.
“어떻게 하지? 주인님이 네가 맘에 들지 않는가본데.”
“예?”
곱슬거리는 이마의 잔털 위로 가볍게 입맞춤을 한 오웬의 들고 있던 강아지를 프리아의 무릎 위로 올려놓았다. 영문 모를 검은 눈동자가 자신에게로 향하자 프리아가 당황하며 작고 어린 몸이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움켜쥐었다. 얼결에 쓰다듬고 만 손이 촉촉하게 젖어있는 코 위로 향하자 강아지가 잽싸게 꼬리를 흔들었다.
“얘는 네가 좋다는데? 너는 싫어?”
“싫은 게 아니라…. 갑자기 뭐예요?”
싫다는 말을 행여 들을세라 강아지의 귀를 막은 프리아가 오웬에게 재차 물었다.
“나 없는 동안에 심심할 것 같아서.”
아무렇지 않게 부재를 입에 담는 오웬의 말에 프리아의 목이 메었다. 떠난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하는 거야?
“그럼 새도 키우고 얘도 키워요?”
온실의 새들에게 간식을 주고 구관조에게 존경심을 가르치는 임무에 이어 어린 강아지까지 도맡게 되었다. 강아지는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오웬의 부재를 기정사실화하는 통보인 것 같아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리고 돌아오면 나도 키워줘.”
아직도 덜 자랐단 말입니까? 얼마나 더 크려고. 초야 때보다 반 뼘은 더 넓어진 것 같은 오웬의 어깨가 프리아의 몸에 체중을 실었다. 프리아의 몸이 기울어지자 품안의 강아지가 낑낑거리는 소리를 냈다.
“곧 출정식이 있을 거야.”
“…언제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려고 했는데 벌써 목소리에 울음이 서렸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담담하게 이별을 고했다.
“3일 후.”
“그렇게 빨리?”
“그래야 빨리 돌아오지. 내년 봄꽃은 너와 함께 이곳에서 볼 거야.”
가지 말란 말도 따라간단 말도 할 수 없다. 이것은 황제인 오웬의 운명이고 후궁인 자신의 운명이었다.
“오늘밤 함께 있자.”
목이 메어 대답할 수 없어서 프리아는 말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