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드셔야 할 텐데 스프라도 준비해 올리라고 할까요?”
“나중에.”
지금은 도저히 목 안으로 넘길 수 없을 것 같다. 힘없이 고개를 다시 내젓는 프리아를 보고 있던 올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꿀물이라도 내오라 하겠습니다. 이대로는 못 버티세요.”
마지못해 프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올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들려오는 내실문 닫히는 소리에 프리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약을 숨겨 둔 곳까지 걸어가는 몇 발자국이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약을 먹고 한숨 푹 자면 나아질 것이다.
프리아는 책이 가득 꽂힌 책장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잠시 후 손가락 끝에 끈으로 매듭지은 작은 주머니 하나가 딸려 나왔다. 백조궁으로 짐을 옮기던 중 책이 떨어져 쥐똥으로 오인받은 끝에 버려졌다 말하니 기르는 혀를 끌끌 차며 헝겊 주머니 여러 개에 약을 나눠 돌려주었다.
이미 주머니 두 개는 텅 비어 벽난로 불꽃 속에 사라졌다. 매듭을 풀러 들여다본 주머니 속에는 여남은 개의 환약이 들어 있었다. 다른 주머니는 여러 곳에 나눠 숨겨 놓았다. 일부는 침실에 있는 장식장 안쪽에 보관하고 나머지는 계절이 지난 옷들을 수납하는 나무 상자와 옷장 깊숙한 안쪽에 넣어두었다. 유디스가 돌아온다 하더라도 내년 여름이 오기 전까지는 열어 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언제 마지막으로 약을 먹었지?’
어제였던가, 그저께였던가 혹은 며칠 전인가? 통증으로 혼미하던 중에 급하게 털어 넣었기에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멍하니 주머니 안을 바라보고 있던 프리아가 환약 몇 알을 꺼내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쓴물이 올라와 헛구역질이 나는 것을 간신히 참아 냈다. 유리병 가득 담겨 있던 색 고운 사탕과자도 이미 동이 난 지 오래였다.
떨리는 손끝으로 주머니의 매듭을 다시 여며 원래 놓였던 곳으로 돌려놓았다. 힘이 풀려 중간에 한 번 놓쳤던 까닭에 꽉 다물리지 못한 입구에서 환약 한 알이 빠져나왔던 것을 프리아는 알아채지 못했다. 꿀물을 가지고 돌아올 올가를 기다리며 프리아는 다시 지친 몸을 장의자 위로 뉘었다.
“프리아 님? 주무시나요?”
내실로 돌아온 올가가 그사이 잠이 든 프리아 앞에 섰다. 여러 번 불러 보았지만 사내후궁에게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꿀물이 담긴 쟁반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올가는 어수선한 내실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방 청소를 하는 하녀들의 눈에 띄지 않게 혹여 떨어진 핏자국이 있지는 않는지 꼼꼼히 확인을 해야 했다. 바닥을 내려다보던 올가의 눈에 구슬처럼 보이는 작은 무언가가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게 뭐지?’
허리 굽혀 집어 든 것을 올가는 창문 아래로 가져와 찬찬히 살폈다. 찰흙을 뭉쳐 굴린 것처럼 단단한 표면은 짙은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손톱으로 표면을 긁자 가루가 떨어져 나왔다.
‘이것은…….’
이와 유사한 것을 어디선가 보았던 생각이 났다. 한참을 궁리하던 올가의 머릿속에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착오로 치수가 맞지 않게 제작되어 다시 제작에 들어갔던 프리아 님의 여름 의상이 가을도 지나 겨울이 된 이제야 도착했던 것이다.
‘프리아 님의 겨울코트를 맞춰 둔 게 있는데 혹시 들어오거든 치수가 잘 맞는지 확인해 주시고… 아니다, 그건 제가 돌아와서 직접 할게요. 그냥 옷장에 걸어 두시기만 하세요. 그리고 여름 의상 아직 들어오지 않은 게 있는데 어휴, 그건 내년에 갖다 줄 생각인지. 아무튼 혹시 그것도 들어오면 잘 챙겨 주세요. 이번에도 실수 있으면 제대로 따져야 하는데 올가 님은 너무 마음이 약하셔서……. 따지는 것도 돌아와서 제가 할 테니 그냥 받아 두기만 하세요.’
화려한 걸 좋아하는 유디스의 취향답게 도착한 의상은 매끄러운 표면을 온통 화려한 자수가 뒤덮고 있었다. 이토록 정교하고 섬세하니 재제작에도 이리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유디스의 대리를 하고 있다 보니 어느 틈에 물든 것일까. 이 아름다운 의상을 사내후궁에게 입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조부 때부터 이미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집안은 부친의 대에 들어 더욱 가파르게 몰락해 갔다. 유행하는 의복을 철마다 맞춰 입을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좋아하지 않는 척 했을 뿐이다. 실은 누구보다 뛰어난 심미안을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대신 가질 수 없는 것들을 화폭에 옮겨놓았다. 언젠가 마음껏 물감을 살 수 있게 되는 날이 온다면 온 지상의 색이 드디어 그녀의 것이 될 것이다.
정교한 자수가 자아내는 찬란한 빛을 홀린 듯 바라보았으나 이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옷의 주인에게 입혀 보는 일 또한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옷장의 문을 열어 빈 곳에 들고 있던 옷을 걸어놓았다. 그림을 감상하듯 올가가 걸려 있던 옷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푸른 실크의 색감에 감탄하며 옷감을 쓸어 보던 그때, 걸려 있던 옷들 사이에서 툭 떨어지는 것이 있었다. 아무런 표시도 없는 헝겊 주머니를 살펴보던 올가가 매듭을 끌러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좀벌레를 방지하는 약인가?’
주머니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보라색 환약에 코를 가져가 맡아 보았으나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옷장을 관리하는 건 유디스의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구석에 놓아둔 채 그대로 문을 닫았다. 그때 보았던 것과 똑같은 것을 오늘 다시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왜 이곳에…….’
그때는 옷장 안, 그리고 지금은. 올가의 시선이 물건을 발견했던 자리로 향했다. 그곳에는 책이 빼곡하게 꽂힌 책장이 서 있었다. 내가 갈아입힌 셔츠가 마음에 들지 않아 사내후궁이 옷방에 다녀온 것일까. 잠시 생각하던 올가가 고개를 내저었다. 유디스의 의견에 따라 주기만 할 뿐 사내후궁은 옷차림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혹시.’
생각을 멈춘 올가가 아래 칸부터 하나씩 책장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발돋움의자가 필요할 정도로 높은 위 칸 뒤쪽 공간에서 끈 달린 주머니 하나가 딸려 나왔다. 열어 본 주머니 안에는 올가가 바닥에서 발견한 것과 똑같은 동그란 환약이 들어 있었다.
‘개수가 차이나면 아니 되겠지?’
주웠던 약은 손에 감추고 주머니를 매듭지어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은 올가가 옷방으로 향했다. 옷장 문을 열자 주머니는 자신이 놓아 둔 그 자리에 여전히 놓여 있었다. 대충 보아도 약의 개수는 변함이 없어 보였다. 주머니에서 환약을 꺼내 두 알을 들여다보고 있던 올가가 혀를 내밀어 표면으로 가져갔다.
‘약 먹으면 괜찮아져.’
어쩌면 이것이 사내후궁이 복용한다는 심장약일까. 맛만 보고 다시 내려놓을 참이다. 입술 가까이 가져간 약에 혀가 닿으려던 순간 밖에서 올가를 찾는 시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가 님! 여기 계세요? 폐하께서 오셨어요!”
폐하가.
당황한 그녀가 꺼내들었던 약을 덧옷에 달린 주머니 안에 넣었다. 옷장에서 꺼냈던 것을 다시 제자리에 두고 황급히 옷장 문을 닫자마자 방문이 열렸다.
“올가 님, 여기 계셨군요. 폐하가 오셔서 올가 님을 찾으세요!”
폐하가 나를?
시녀의 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차피 사내후궁과 관련된 일임을 알면서도 내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에 힘이 풀렸다. 도착한 내실이 비어 있자 돌아본 올가를 향해 시녀가 손짓했다.
“침실에 계시나 봐요. 들어가 보세요.”
그러고 보니 장의자에 누워 있던 사내후궁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따로 불렀다고 하니 설마 일을 치르는 모습을 보여 주진 않겠지. 온실에서 정사를 훔쳐보다 호되게 혼이 났던 일을 떠올리던 올가가 손을 들어 침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안에서 들려오는 황제의 말에 올가가 문을 열었다. 침실로 들어선 올가의 눈에 사내후궁을 안아 든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더없이 소중한 것을 품에 안은 것처럼 조심히 움직이던 황제가 침대 위로 사내후궁을 내려놓았다.
“제가…….”
이부자리 시중을 들기 위해 다가선 올가를 향해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얼굴 외에 이불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꼼꼼히 덮어 준 황제가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왜 자리를 비웠지?”
시중드는 이 하나 없이 내실 장의자 위에서 홀로 잠든 프리아를 발견했던 오웬이 차가운 시선을 시녀에게로 돌렸다.
“송구합니다. 갈아입으실 옷을 가지러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순간적으로 생각한 임기응변을 입에 올리자 황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여기 시녀가 너 하나뿐이야?”
“…아닙니다. 그저, 프리아 님께서 다른 이는 불편해하시어. 나가 있으라 했습니다.”
“…까다로워.”
하여간 까다롭다니까. 올가의 변명에 수긍한 오웬이 한숨을 내쉬었다. 늘 프리아의 곁을 지키던 시끄럽던 녀석 대신 요즘 들어 시중을 들고 있는 것이 이 아이였다. 수행시녀를 불러오란 자신의 지시에 등장한 올가를 오웬이 감정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녀석이고 저 녀석이고 미덥지 않다. 자신이 없는 동안 프리아가 걱정돼 연륜 있는 시녀장을 붙여놓으려고 했는데 불편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유디스는 언제 돌아오지?”
“돌아오는 길에 본가에 들러 잠시 머문다 하였습니다. 늦어도 열흘 안에는 돌아올 것입니다.”
황제의 말을 들은 올가가 입술을 깨물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녀의 말을 흘려들으며 오웬이 다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