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24)화 (125/237)

곧 전쟁이 터진다. 불길한 소문은 황궁을 넘어 수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미 징병이 시작된 지역도 있었다. 계절은 이미 겨울 초입에 접어들어 농사일에 지장을 주지는 않았지만 내년 봄이 시작되기 전에 돌아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집집마다 눈물의 이별이 이어졌다. 지아비를, 형제를, 맏아들을 전쟁터로 보내야 하는 여인들의 눈물은 끊이지 않았다. 황궁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 그만 울어, 그 얼굴로 어떻게 프리아 님 시중을 들 거야? 어휴, 안되겠다. 내가 들어갈 테니 너는 좀 더 쉬고 있도록 해.”

연인에게서 도착한 편지를 읽은 뒤 우느라 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여인을 다른 이가 달랬다. 그녀들은 프리아의 시중을 근거리에서 드는 내실 담당 시녀들이었다.

“돌아오지 못하면 어떻게 해? 내년 여름에 혼례를 올리기로 했단 말이야.”

“생과부가 되는 것보단 낫잖아요? 혼인전이니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하세요.”

훌쩍이는 소리를 내는 시녀를 보며 진절머리 난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이사벨이 참견했다. 그 소리에 더욱 울음을 터트리는 그녀를 안아 주고 있던 시녀가 울컥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말이 너무 심하세요, 이사벨 님. 형제분들도 출전하신다 하지 않으셨나요?”

“저희 집 바보들도 셋이나 간답니다. 제 앞가림은 알아서 하겠죠, 뭐. 괜히 그러고 계시다가 또 한소리 들으실까 봐 한 말이에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유디스 대신 왕 노릇에 흠뻑 빠져 있는 올가를 암시하며 이사벨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결혼식을 끝내고 젊은 부부가 한참 신혼의 단꿈에 빠져 있을 시기였다. 변방까지 소식이 닿았다면 그 기쁨을 온전히 즐기지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모두 소중한 이와의 이별을 앞두고 있지만 백조궁의 분위기는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다. 전쟁 중 폐하가 사망하시면 프리아 님은 어떻게 되는 거냐 물었던 철없는 하녀 아이 하나가 하녀장에게 호되게 회초리질을 당하고 쫓겨났던 탓이었다. 그녀처럼 대놓고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지만 백조궁의 사용인들 역시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황제의 손이 닿지 않은 다른 후궁들은 다음 대 황제에게 혼인무효를 승인받아 새출발을 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미 황제와 수차례 밤을 보낸 후궁에게는 재가가 허락되지 않았다. 황제는 사망했더라도 복중에 황손을 잉태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며 애초에 잉태가 불가능한 사내후궁의 경우에는 어찌 되는 것인가? 유폐궁에 들어가 여생을 보내거나 나이든 후궁들이 그러하듯 종교에 입문하여 황실을 위해 기도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음 대 황제는 누가 될 것인가. 발칙한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아이를 낳은 후궁도 잉태한 후궁도 없다. 황제의 조카인 레온이 가장 유력한 후계자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

“더 나은 대안이 있다면 제시해 봐.”

차갑게 내뱉은 오웬의 말에 대신들의 표정이 변했다. 다들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면서도 섣불리 나서 입을 떼는 이가 없었다. 수백 번을 따져보아도 오웬의 뒤를 이를 적법한 후계로는 레온을 이길 자가 없었다. 선황의 증손자이며 죽은 황태자의 장손이 낳은 유일한 핏줄이었다. 다른 후손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정통성으로는 레온이 으뜸이었다.

오웬의 소생이 존재했다면 그를 넘어서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재로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후계부터 만들어야한다는 자신의 조언을 뿌리치고 기어코 사내후궁만을 곁에 둔 외조카의 완고한 표정을 바라보며 페르마 공작이 침통한 신음을 뱉어냈다.

말을 듣지 않는 걸로 따지자면 제 아들인 바이런부터 단속해야 했다. 곳곳에 눈물짓는 연인들만 남겨두고 적진에서 볼모가 되어 버린 아들 생각에 공작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소식을 들은 아내는 이럴 줄 알았으면 강제로 혼인이라도 시켜 자식을 보게 해야 했다며 울었다가 혹시 숨겨둔 아이들이 줄줄이 나타나기라도 하면 어쩌냐며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바이런은 혼외자가 존재할 가능성이라도 있지. 눈앞에 있는 젊은 고집불통은 하필 씨를 뿌려도 불모지에 뿌린 탓에 수확을 거둘 가능성이 없었다.

젊은 황제가 전장에서 사망하는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제각기 연이 있는 황족이 그 뒤를 잇기를 대신들은 바라고 있었다. 누군가 의견을 내세우면 다른 이가 반박하고 또 다른 이가 재반박하며 지루한 회의가 이어졌다. 그러던 중 머릿속으로 열심히 황가의 가계도를 그리고 있었던 늙은 대신 하나가 마른 입맛을 다시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선황의 남동생이신 기르 저하의 행방을 아는 이가 있습니까? 그분도 정통성에서는 뒤지지 않습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살아계셨다면 진작 돌아오셨겠지요. 돌아오신다 한들 춘추가…, 이미 예순을 넘기지 않으셨습니까?”

또 다른 나이든 대신 하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가 누구냐는 다른 대신들의 물음에 수십 년 전 종적을 감춘 또 한명의 황족을 설명하던 노인이 시종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톤, 자네가 설명해보게. 저하가 두고 가신 재산관리도 자네가 하고 있다 하지 않았나?”

자신에게로 일제히 쏠린 대신들의 시선을 회피하며 시종장이 진땀을 흘렸다. 자신 말고도 아직 기르 저하를 기억하는 이가 있다니 저하와 마주치지 않아 정말 다행이었다.

“저, 저도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살아계셨다면 선황께서 승하하셨을 때 소식 듣고 돌아오시지 않으셨을까요?”

“황가를 떠난 지 오랜 분이시지 않습니까? 그분보다는 차라리 라이튼 대공이….”

“다섯 살 아이보단 낫지요.”

“태후께서 섭정하실 텐데 무슨 걱정이십니까?”

어린아이냐, 노인이냐, 여인이냐, 살아 있는 자신을 앞에 두고 오가는 제 사망 이후 권력다툼을 조용히 듣고 있던 오웬이 다시 제동을 걸었다.

“지금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거지? 알아듣게 다시 설명을 해봐.”

자신에게로 향한 오웬의 눈빛에 시종장이 다시 눈동자를 돌려 시선을 회피했다.

“폐, 폐하의 종조부이신 기, 기르 저하에 대해 물으시어 답해드렸습니다. 수십 년 전 행방을 감추시어 저, 저도 아는 것이 없, 없사옵니다.”

“기르?”

왜 하필 또 그 이름이지? 거슬리는 동명에 순간 눈썹을 찌푸렸던 오웬이 여전히 갑론을박중인 대신들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종조부의 안위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전쟁준비를 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이었다. 대신들의 말을 듣고 있었던 것은 단독으로 처리했다는 뒷말이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지 그들의 요구를 우선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공들을 위해서라도 꼭 살아 돌아올 테니 이쯤에서 마무리하도록 하지. 어차피 이대로도 계승권은 변함 없겠지만 내 자식이 그토록 보고 싶다하니 그대들의 염원도 이뤄줄 겸 레온을 양자로 들이겠네. 내 친자라 생각하고 깍듯이 모시도록 해.”

황제가 드디어 여인에게서 후사를 볼 마음이 든 것인가. 긴장했던 대신들이 실망어린 한숨을 내뱉었다. 그들에게 각자 줄을 대고 있던 공국의 대공들은 펄쩍 뛰겠지만 전쟁을 앞둔 이 상황에 더 나은 대안은 없었다. 저러다 마음 바뀌시면 친자를 생산할 수도 있다 그리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회의가 끝나자 곧 다음 회의가 이어졌다. 전략을 구체화한 지도와 모형을 손에든 실무진들이 사령관의 뒤를 따라 들어와 오웬의 집무실을 가득 메웠다. 수일 전부터 이어지고 있는 전략회의였다. 눈을 붙일 새도 없이 격무가 몰아쳤다. 피곤에 지친 눈두덩이를 잠시 문지르고 있던 오웬이 점으로 표시된 보병과 기마대의 위치에 다시 시선을 고정했다.

“아무래도 폐하께 말씀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기운 없이 장의자에 몸을 지탱하고 있던 프리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속이 뒤집히는 통에 겨우 몇 조각 입에 넣었던 식사를 토해낸 참이었다. 얼마 되지 않은 음식물보다 토해낸 피의 양이 더 많았다. 이제는 익숙하게 피 얼룩을 제거할 수 있게 된 올가가 다른 셔츠를 가져와 프리아를 갈아입혔다.

어쩌면 그때 올가에게 들킨 것이 다행일지 모른다. 날이 갈수록 몸이 약해지는 통에 혼자서는 발작의 흔적을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유디스였다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이미 오웬에게 달려가 살려 달라 울었겠지.

이미 자신의 병이 쉽게 회복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라는 걸 올가는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가끔 이렇게 황제에게 고하면 어떻겠냐고 물어오면서도 프리아가 거절하면 더 이상의 선을 넘지 않았다.

“약 먹으면 괜찮아져. 지금 오웬 바쁘잖아.”

그날 이후 프리아는 오웬을 통 만날 수 없었다. 대신 경비병들이 알아온 소식이 하녀들에게 흘러가고 그 이야기는 다시 시녀들의 입을 통해 프리아에게까지 들어왔다. 적국의 병력이 어떠하다느니, 우리 측에서 준비한 전쟁물자가 어마어마하다느니, 사령관을 맡은 이의 가문 내력이 어떠하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도통 실감할 수 없는 이야기들 속에서 레온이 곧 황제의 양자가 될 거라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사내후궁에게 불리한 소식인가, 유리한 소식인가. 백조궁의 사용인들은 저마다 주장을 내세우며 몰래 모여 떠들어대고 있었다.

각자 자신들의 미래를 염려하는 그들의 태도가 프리아는 그다지 섭섭하지 않았다. 오웬이 돌아오기 전에, 기르가 돌아오기 전에 목숨이 다한다면 제몫의 재산을 기꺼이 그들에게 나누어줄 생각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