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23)화 (124/237)

기척도 없이 내실 안으로 들어온 오웬을 발견한 유모가 크게 놀라며 황급히 자세를 낮췄다.

“폐하를 뵈옵니다.”

“레온은?”

신나서 쪼르르 달려올 아이를 떠올리며 오웬은 물었으나 유모는 난처한 기색을 내보였다.

“일찍 잠이 드셨습니다. 폐하를 뵙고 싶어 하셨는데 깨워 올까요?”

“자게 둬. 공연을 보느라 피곤했던 모양이군.”

프리아가 잠든 틈을 타 레온을 보러 왔던 오웬은 조카마저 잠이 들었다는 소리에 아쉬운 표정을 하면서도 손을 내저어 보였다.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 레온 역시 용맹한 기사 이야기에 흠뻑 빠져 있었다. 죽음을 넘어선 사랑이라는 공연의 주제를 어린 아이가 이해할 리 만무했으나 과장되게 검을 휘두르는 기사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눈요기가 되었을 것이다. 레온에게서 직접 공연 감상을 듣고 싶었던 오웬이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잠든 아이의 머리맡에 섰다.

“좋아하던가? 막간 공연은 일부러 인형극으로 준비해 달라 요청했는데.”

“매우 좋아하셨습니다. 잠들기 전까지도 공연 이야기를 하셨어요. 폐하의 배려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고지식한 유모에게는 통속어로 표현된 공연의 일부 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녀는 그런 내색을 감춘 채 감사를 표했다. 탄신연 공연을 볼 때는 지루함을 참지 못해 꾸벅꾸벅 졸던 레온이었으나 오늘은 공연 내내 단 한순간도 졸지 않고 시선을 무대 위로 고정하고 있었다.

지나간 어린 날 오웬은 형 아서와 기사 흉내를 내며 목검으로 실력을 겨루곤 했다. 나이 차가 있어 실력은 아서가 월등했으나 가끔은 일부러 져 주었고, 어렸던 자신은 알아채지 못한 채 세상을 이긴 것처럼 거들먹거렸었다.

그리운 날들을 떠올리던 오웬의 눈이 잠든 레온에게로 향했다. 이불 밖으로 삐어져 나온 작은 손을 귀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오웬은 그것마저 따뜻하게 덮어 주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이건 뭐지? 언제 다친 것인지 말을 해.”

작은 손바닥에 생겨난 붉은 생채기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본 오웬이 싸늘한 목소리로 유모에게 물었다.

“오늘 공연 후 복도를 달려가시다 그만 넘어지셨습니다. 궁정의 말이 흉은 남지 않을 거라 했습니다. 저하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저에게 책임이 있으니 벌을 내려주십시오.”

고개를 바닥까지 조아린 유모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처를 보자 순간 화가 났으나 뛰다 넘어지는 것 정도는 이 나이대에는 늘상 벌어지는 일임을 알기에 오웬은 애써 감정을 다스렸다. 무엇보다 눈앞의 여인이 자신만큼이나 레온을 끔찍이 귀애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 내일 태의를 보낼 테니 다시 보이도록.”

“송구합니다, 폐하. 제 몸 바쳐 저하를 모실 것입니다.”

사죄하는 여인의 말을 흘려들으며 오웬은 그녀에게 다시 질문을 했다.

“혼자 발에 걸려 넘어진 건가? 복도에서는 가능한 뛰지 못하게 하고 계단을 내려갈 때는 자네가 손을 붙잡아 주도록 해.”

아서가 남긴 소중한 혈육이다. 미래 제국의 황제가 될 귀한 몸이기도 했다. 그 언젠가 형이 그랬던 것처럼 오웬은 레온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면 지체 없이 몸을 날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레온은 오웬에게 있어 단 하나뿐인 약점이자 유일한 삶의 보람이었다.

“그리하겠습니다. 공연 후에 저하께서 폐하께 인사드리고 싶다 하시어 말씀을 올리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곁에 있던 시종 말로는 아는 이를 보았다며 갑자기 달려가셨다고 하더군요.”

“그 멍청한 녀석은 다른 곳으로 보내 버려. 그리고 아는 이라니? 누구라 하던가?”

레온 또래의 귀족 아이들을 몇 뽑아 어울리게 했으나 귀족은커녕 황실 친척들도 초대하지 않은 공연이라 그들이 공연장 주위에 모습을 보일 리 없었다. 호기심이 생긴 오웬이 유모에게 다시 물었다.

“전에 말씀드린 비밀 친구입니다. 공연을 보고 흥분하셨는지 헛것을 보신 모양입니다.”

“아직도 그런 이야기를 해?”

아직도 상상으로 만들어 낸 친구를 잊지 못하는 건가. 새 친구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일까. 숨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작은 가슴을 토닥이고 있던 오웬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다른 아이들로 교체하라 해야겠군.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마상 대회날도 들뜬 나머지 곁에 앉았던 오웬에게 종일 참새처럼 종알거렸던 레온이다. 불러다 놓기만 하고 함께 공연을 보지 못하였으니 자신에게 할 말이 산더미처럼 쌓였을 것이다.

주치의가 떠난 후 기운 없어 하는 프리아를 위해 준비한 공연이다. 공연을 보면서도, 끝나고 나서도 자신은 오직 프리아의 얼굴만을 바라보며 사소한 반응까지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레온이 자신에게 인사하고 싶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늘 연인의 생각으로만 가득 차서 바쁜 일정 중에도 틈만 생기면 프리아를 만나러 갔다. 오늘도 침실에서 다시 이어진 정사 끝에 프리아가 잠들자 그제야 레온을 떠올렸다.

애초에 여인들을 멀리하고 사내후궁인 프리아를 찾았던 이유가 바로 레온이었음을 상기한 오웬이 어느새 연인보다 뒷전이 되어 버린 조카 앞에서 고개를 떨궜다.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는 비밀 친구를 만들어 낼 정도로 레온이 외로워하는 동안 난 무엇을 했지.

‘네가 다치면 형이 더 아파. 난 후회하지 않아.’

제 탓이라 자책하던 오웬을 끌어안아 주며 아서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형은 늘 자신에게 진실만을 말해 주었다. 새끼손가락을 부러뜨리고 눈물범벅이 되어 돌아온 어린 오웬 앞에서 형은 자신보다 더 아파하며 눈물을 흘렸다.

레온의 손바닥에 난 작은 생채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오웬은 그간 레온에게 소홀했던 자신을 비난했다. 이래서는 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스스로 든 생각에 오웬이 표정을 굳히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내가 그 인간과 같다니. 그럴 리 없다. 나는 아버지와 다른 인생을 살아갈 것이고 프리아 역시 요난나가 아니었다. 그저 아끼는 이가 한 사람 더 늘어난 것뿐이야.

부정하면서도 가슴속 어딘가 생겨나 버린 균열을 오웬은 애써 모른 척 했다. 나는 달라. 나는 두 사람 모두 지킬 수 있어.

* * *

빵부스러기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새들이 모여들었다. 종종 온실에 들러 간식 빵을 나눠 준 덕분에 새들도 이제는 프리아를 경계하지 않았다. 작은 부리가 아래로 향해 콕콕 소리를 내며 먹이를 먹는 모습은 언제 봐도 신기하고 귀여웠다.

복숭앗빛 깃털을 가진 새의 둥지에서 조약돌처럼 매끈한 흰 알 여러 개를 발견했다. 늘 사이가 좋던 두 녀석이었는데 알을 낳았다고 어서 오웬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어느새 입버릇이 된 말을 프리아가 다시 입에 담았다.

“오웬, 빨리 와. 보고 싶어.”

“시끄럽다! 침입자!”

여러 번 봤어도 여전히 콧대를 세우는 구관조가 프리아를 향해 외쳤다.

“폐하! 침입자가 있습니다!”

침입자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구관조가 프리아 보란 듯 얼굴을 위로 높이 쳐들며 목쉰 소리로 외쳤다. 이유는 뻔했다. 어서 말린 과일을 제 앞에 대령하라는 것이다.

“이제는 오웬이 폐하야. 일이 끝나면 온다고 했어.”

“침입자!”

자신에 대한 존경을 구관조에게 가르치라는 오웬의 말에 여러 번 시도해 보았으나 저 녀석은 여전히 그를 황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랜 세월 귀여워해 준 선황만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다른 이의 손길은 거부하는 도도한 녀석이었다. 호기심에 쓰다듬으려다 손가락을 물려 피를 본 적이 있는데 화가 난 오웬이 온실 밖으로 내쫓겠다고 날뛰는 것을 겨우 붙잡아 말렸다.

‘지금 겨울인데 내보내면 얼어 죽어요. 여기서만 살았는데 어찌 밖에서 견디겠어요. 이제 안 아파요. 피도 멎었는데.’

‘피가 멎긴 뭘 멎어. 또 나잖아. 저 자식 죽여 버릴 거야.’

‘반역자가 둘! 반역자가 둘! 폐하! 폐하! 긴급 상황!’

또 물리게 될까 두려워 프리아는 가져온 주머니에서 말린 사과를 하나 꺼내 구관조와 조금 떨어진 곳에 놓았다. 여전히 기세등등한 구관조가 도도한 걸음으로 걸어와 부리를 아래로 내렸다.

“알렌, 맛있어?”

기껏 주었더니 과일만 먹고 빠르게 자리를 뜬 구관조가 홰 위에 올라앉아 시치미를 뗐다.

“너 언제 내말 들을 거야? 다 알아들으면서 아닌 척 하는 거지? 따라해 봐, 오웬, 오웬.”

여러 번 오웬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따라하라 지시하는 프리아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구관조가 고개를 홱 돌렸다.

“똥 멍청이!”

저런 비속어는 누구에게 배운 건지. 오늘도 진전 없는 수업에 프리아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또 먹이를 줄까 기대하는 것처럼 자그마한 몸집을 가진 노란 새가 가까이 다가와 부리를 벌렸다. 작은 새가 말린 과일을 받아먹는 걸 본 다른 새들이 다시 창살 앞으로 모여들었다. 얼마 되지 않던 양이라 과일은 금세 동이 났다.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던 프리아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올가를 향해 반색했다.

“올가, 마침 잘 왔어. 빵 더 가져온 것 있어?”

늘 차분하던 그녀의 성격답지 않게 온실로 뛰어 들어온 올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프리아 님! 국경에서, 소식이.”

어디에서부터 뛰어왔던 것일까. 숨이 벅찬 나머지 말을 잇지 못한 올가가 심호흡을 하며 다시 숨을 골랐다.

“국경에서? 안 좋은 소식이야?”

“사절로 갔던 이들이 모두 볼모로 잡히고 그놈들이, 사절의 대표였던 노엘 백작의 머리를 잘라서 돌려보냈대요.”

“바이런은? 바이런은 무사한 거야?”

걱정하지 말라 당부하며 길을 떠났던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 프리아가 창백한 안색으로 올가에게 다시 물었다. 프리아의 질문을 들은 올가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까진 모르겠어요. 곧 전쟁이 시작된대요. 폐하께선 회의 중이라 오지 못하실 거예요. 저흰 백조궁으로 돌아가 있으라고 시종장님이 전하셨어요.”

전쟁.

되뇌자 믿을 수 없이 섬뜩한 울림이 온몸에 퍼졌다. 전쟁이라니. 수많은 이가 희생될 것이다. 먼 땅에서 초개처럼 목숨을 버릴 병사들, 그리고 그들을 지휘할 이는 오웬이었다.

“어떻게 하죠? 프리아 님. 폐하께서도 떠나야 하실 텐데. 저흰 어떻게 해야 해요?”

혼란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올가의 눈동자를 향해 프리아는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괜찮아. 돌아올 거니까 기다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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