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만나러 왔구나. 반가운 이의 모습을 발견한 레온이 신이 나 펄쩍 뛰었다. 그동안 울지 않고 밥 잘 먹고 씩씩하게 지내고 있었다고 자랑해야지. 마티아가 아버지께 소식을 전해줄 거야. 복도 저편에 서 있는 프리아를 향해 레온이 달리기 시작했다. 떨어져 있던 거리를 반으로 좁히는 데 성공한 순간 작은 몸이 중심을 잃고 복도 바닥을 뒹굴었다.
“레온 저하!”
서두르느라 발이 꼬여 넘어진 레온을 발견한 시종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며 달려왔다.
“레온 저하, 괜찮으십니까?”
아프다. 레온은 넘어진 충격과 바닥에 부딪친 손바닥과 무릎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울음을 터트렸다. 있던 자리에서 사라진 레온을 찾기 위해 공연장의 문을 열고 나왔던 유모가 울음소리를 듣고 황급히 뛰어왔다.
“저하!”
넘어진 레온 앞에서 쩔쩔 매는 시종을 밀쳐내고 유모가 아이를 다독였다. 자신을 쏘아보는 유모를 향해 시종이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저하께서 갑자기 뛰쳐나가셔서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송구합니다.”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프다며 레온은 아픔을 호소하며 유모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울음을 그친 레온이 그제야 자신이 뛰었던 이유를 떠올리고 고개를 들었다. 마티아에게 나 여기 있다고 알려 줘야 하는데?
“마티아는?”
텅 빈 복도 저편을 기웃거리던 아이가 시종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저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 처벌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며 시종이 레온에게 반문했다.
“저하,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마티아! 마티아가 저기 서 있었잖아. 조금 전까지 분명히…. 저기 있었는데?”
“송구합니다, 저하. 말씀하시는 이를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시종이 바라본 복도 저편은 텅 비어 있었다. 손가락을 들어 가리키던 레온이 답답하다는 듯 다시 말했다.
“마티아가 나를 만나러 왔단 말이야. 내가 달려가서 인사하려 했는데 넘어져서…, 아, 그렇구나!”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떠들던 황손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싱긋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안 보인 거구나. 안 보인 거였어.”
마티아는 천사라 다른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거였다. 나를 만나러 왔으니까 내 눈에만 보이는 거지. 내가 방에 있지 않아서 찾으러 나온 걸 거야. 어서 돌아가야겠어.
“저하? 전에 말씀하시던 천사를 또 만나신 건가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유모가 조심스럽게 말을 던졌다. 유모의 말을 들은 레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빡거렸다.
“어? 나 얘기 안 했는데. 어떻게 유모가 알고 있어?”
잠결에 물어 얻어낸 이야기였던 걸 깜박하고 말았다. 낭패다 느낀 유모가 당황한 표정을 숨기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에 말씀해 주셨어요. 잊으셨나 봅니다.”
“정말? 내가 그랬었나? 근데 비밀이야! 내 비밀친구란 말이야.”
억울한 표정을 한 레온이 입술을 내밀었다. 아이 참, 내가 언제 유모에게 마티아 얘기를 했지?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이제 만나러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해?
“저도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저하. 이봐, 자네. 자네도 어서 맹세를 하게.”
이게 다 무슨 소리인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시종을 향해 유모가 다그쳤다. 영문도 모르고 함께 비밀엄수를 맹세한 시종이 레온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빨리 가자! 마티아가 내 방에 가 있을지 몰라.”
지금쯤 날개를 펼치고 지붕을 넘어 내 방 창문에 앉아 있을지 모른다. 레온은 마티아에게 전할 말이 아주 많았다. 넘어진 아픔도 잊은 레온이 유모의 옷자락을 끌며 재촉했다. 폐하께 인사를 하겠다며 기다리던 것도 그새 잊어버린 모양이다. 이미 자리를 떠났다는 황제의 소식에 실망하리라 생각했는데 다른 곳에 관심이 쏠려 다행이었다.
“오웬!”
갑자기 나타난 문 안쪽으로 끌려들어온 프리아가 자신을 잡아당긴 오웬을 올려다보았다. 배우들을 치하하고 오겠다며 먼저 자리를 뜨더니 언제 이런 곳에 몸을 숨기고 기다리고 있었던 말인가.
“그렇게 멍하니 있으면 누가 잡아가도 모를 것 같아 내가 선수를 쳤어.”
“저를 누가 잡아간다고 그러세요?”
유치한 핑계를 대는 오웬을 향해 프리아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성인이 된 지 오래건만 오웬은 아이나 할 법한 장난을 자신에게 거는 걸 좋아했다. 제국의 황제가 실은 이런 성격이라는 걸 다른 이는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처음 만났던 밤, 얼음 같던 첫인상이 이제는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까 극중에서도 나오던데 드래곤이 잡아간다고.”
배우들이 옷을 갈아입으며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이 막간을 이용해 상연된 인형극의 내용을 언급하며 오웬이 입술을 끌어올렸다. 아이를 잡아가는 드래곤을 용사가 찾아가 무찌른다는 내용의 단막극이었다.
“그 드래곤은 아이를 좋아하니까 저보다는….”
나이 어린 당신이죠.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프리아 역시 입술을 끌어올렸다.
“잡혀가시면 제가 찾으러 갈게요.”
이제는 제법 농담을 받아칠 수 있게 된 연인을 오웬이 신기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네가? 산 넘고 물 건너 날 찾으러 온다고?”
“이미 산 넘고 물 건너 찾아왔어요. 산은 백 개쯤 넘었고 물도 수십 번은 건넜을걸요.”
제국으로의 먼 여정을 떠올리며 프리아가 대답했다. 도착한 낯선 땅에 드래곤은 없었지만 괴물이 내뿜는 불길처럼 뜨거운 분노를 가지고 자신을 할퀴던 이는 존재했다. 자신이 길들여진 걸까 아님 그가 길들여졌을까. 이제는 제법 사람 같아진 괴물을 향해 프리아가 속삭였다.
“저는 이미 모험을 마쳤으니까 다음은 오웬 차례예요.”
“좋아, 산 넘고 물 건너서 찾아갈게. 그사이에 날 잊으면 안 돼.”
어차피 이생에선 놓아주지도 않을 거지만. 영원을 기약하며 오웬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 달콤한 숨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가능하면 다음 생에도 기억하길 원한다. 어떤 모습이라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비밀 통로가 뭐 이렇게 많아요? 길 잃어버렸다가는 빠져나오기도 힘들겠어요.”
긴 입맞춤이 끝난 후 자신을 이끄는 오웬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한 프리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공연장 복도에서 시작한 폭 좁은 통로는 개미굴처럼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각기 다른 곳으로 이어질 좁은 길들을 바라보며 프리아가 입술을 열었다.
“몇 개나 있는지, 어디로 통하는지 나도 다는 몰라. 선황 중에 숨바꼭질을 좋아하는 이가 있었는지 모르지.”
“악용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죠? 도망쳐 이곳에 숨으면 잡히지도 않을 텐데.”
“누가 이걸 이용해서 날 암살할까 봐 그게 두려워?”
자신을 염려하는 프리아의 질문을 들은 오웬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게 쉽게 죽을 내가 아니지.
“암살이라니, 무서운 소리 하지 마요. 그냥 누가 숨어도 모르겠다 싶어서 한 소리니까.”
“일단 통로가 있어도 내 처소까지 오는 길은 지붕을 제외하면 한 곳뿐이고. 거긴 또 잠겨 있잖아. 이 길들은 의심 많은 황제가 궁정 곳곳 사람들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거야. 유사시엔 탈출로로 쓰였겠지. 낙마나 전염병, 전쟁 중에 죽은 황제는 있어도 암살당한 이는 없는 걸 보면 어느 정도 안전은 보장된 것 같은데? 지금으로선 날 암살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야.”
“누구…, 설마 저요?”
오웬의 설명을 들은 프리아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웃음기를 감추며 오웬이 근엄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죽더라도 널 탓하진 않을게.”
“제가 왜 폐하에게 그런 짓을 해요?”
“행복한 죽음이 될 거야. 네 위에서는. 늘 각오하며 살고 있어.”
네 위에서? 그게 무슨 소리야? 머리를 굴리던 프리아가 숨은 뜻을 파악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니, 그건, 복상사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복상사로 죽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바이런도 멀쩡히 살아 있는 판에…. 그렇게 생각하던 프리아가 친우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네가 요즘 적극적이라서 참 좋다는 소리야. 건강관리 열심히 할게.”
내가 요즘 너무 요구했나? 틈만 나면 얽혔던 최근의 밤들을 떠올리며 프리아가 얼굴을 붉혔다. 한번 시작하면 자제를 모르는 건 오웬 쪽이었으나 그 도화선에 불을 당기는 이는 프리아였다. 색사를 고통스러워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안아 달라는 응석이 스스럼없이 제 입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뭐, 적극적인 게 나쁜 건가. 그러게 그렇게 잘하지 말았어야지. 과감한 결심을 한 프리아가 옆에서 걷던 오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여기서?”
당황한 오웬이 프리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복상사 운운하는 농담을 입에 올려 난처해하는 얼굴을 보려고 했는데 이런 행동은 예상 밖이었다.
“혹시 누가 들어오는 건 아니죠?”
“들어올 사람은 없는데…, 어?”
꼬물꼬물 옷 안으로 파고든 손이 맨살을 쓰다듬었다. 어쩔 수 없이 중심으로 몰리기 시작한 열기를 느끼며 오웬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러는 건 만족하지 못해서일까, 만족했기 때문일까. 부족하다 느낄 정도로 내가 성의를 다하지 않았나? 이러나저러나 지금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