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21)화 (122/237)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등 뒤로 돌린 올가의 눈에 지친 얼굴을 한 사내후궁의 모습이 보였다.

“프리아 님! 괜찮으신가요?”

“나… 괜찮아. 잠깐 잠이 들었던 것뿐이야.”

“궁정의를 데려오겠습니다. 우선 사람들을 불러서 시트부터 갈게 할게요.”

하녀들을 불러오겠다는 말에 놀란 프리아가 다시 올가를 붙잡았다.

“그러지 마. 나 정말로 괜찮으니까. 부를 필요 없어.”

“예? 피를 이렇게 쏟으셨는데요?”

올가가 경악한 표정으로 다시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사내후궁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시트를 붉게 물들이고 있다. 턱 아래와 가슴도 피에 젖어 검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끔찍한 모습이었다.

“가끔 이럴 때가 있어. ……조금 쉬면 괜찮아지니까 괜히 소란피울 것 없어. 다른 아이들 부르지 말고 네가 시트 가는 것만 도와줘, 응?”

프리아의 간절한 호소에도 올가는 고개를 흔들며 뒤로 물러났다. 왜 사람들을 불러오면 안 된다는 거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지시였다.

“그래도 궁정의에게 진찰을 받아 보셔야…. 폐하가 아시면…….”

“안 돼!”

황제를 언급하는 올가의 발언에 크게 동요한 프리아가 다가와 올가의 손을 붙잡았다. 청명한 푸른 눈동자가 요동치듯 크게 흔들렸다.

“부탁이야, 올가.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하지 말아 줘. 괜히 걱정 끼치지 싫어. 아무 일도 아니니까.”

아무 일도 아니라니. 아무 일도 아니라면 굳이 이렇게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길 꺼려 할 필요도 없다. 따로 주치의까지 두었던 사람이 왜 궁정의의 진찰은 마다하는 걸까? 올가의 머릿속으로 짙은 의심이 피어났다.

“어차피 시트를 갈게 되면 세탁실 하녀들이 보게 될 텐데요? 감출 수 있는 양이 아닌걸요.”

“태, 태우면 돼! 봐, 이렇게.”

말릴 새도 없이 피가 묻은 옷을 벗어낸 프리아가 셔츠를 벽난로 안으로 던졌다. 피로 얼룩진 흰 셔츠에 불이 붙자 금세 그을리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가끔 유디스가 사내후궁의 침의가 없어졌다며 옷방을 뒤집어놓곤 했는데 이제야 범인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옷은 태운다 쳐도 저 큰 시트는 어찌할 것인지? 도저히 저 작은 벽난로가 감당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어찌어찌 태운다 해도 그 연기와 재는 어쩔 것인가?

절박한 눈으로 올가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내후궁에게로 다시 시선이 옮겨갔다. 드러난 쇄골 위로 애무의 흔적이 보인다. 쇄골뿐만이 아니었다. 흠뻑 사랑받은 증거를 내보이는 사내후궁을 바라보는 올가의 시선이 점차 가늘어졌다. 이렇게 절실하게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이번 기회에 사내후궁의 신임을 얻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우선 진상을 알아야 했다.

“프리아 님, 저에게는 솔직히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혹시 큰 병을 앓고 계신 게 아닌가요? 이렇게 피를 쏟으신 걸 보면 폐병…….”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옮지 않아. 옮지 않는 병이야.”

올가의 말을 들은 프리아가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황제를 모시는 후궁에게서 전염성 병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궁정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말 것이다.

역시 병이 있었군. 이제 보니 영락없는 환자의 행색이다. 다들 저 외모에 홀려 보지 못했을 뿐, 감출 수 없는 병색이 사내후궁의 얼굴 위로 드리워져 있었다.

“주치의께선 알고 계셨던 건가요? 왜 떠나신 거죠? 프리아 님의 상태가 이렇게 안 좋은데 돌아가신 게 이상해요.”

“기르는 알고 있어. 지금 알훼니아에 간 것도 약을 만들기 위해서야. 약만 먹으면 괜찮아.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 심장이 안 좋아서 그래.”

“유디스 님도 알고 계셨나요?”

“유디스는 몰라. 알면 걱정할 거야.”

순순히 답하는 프리아의 태도에 올가의 입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유디스도 모르고 있다면 그 다음은.

“폐하께서는 알고 계신가요? 프리아 님의 몸 상태에 대해.”

올가의 질문을 들은 프리아의 얼굴에 구름이 끼었다. 빠르게 흐려지는 프리아의 표정을 본 올가가 사정을 짐작했다. 유디스도 모르고 폐하께서도 알지 못하시는 비밀. 그래서 주치의를 데려왔던 거구나.

“……오웬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아.”

간절한 마음으로 허둥대던 프리아의 태도가 차분해졌다. 불경하게도 황제의 이름을 직접 입에 담는 사내후궁의 얼굴 위로 오래 간직해 온 비애가 서렸다. 고칠 수 없는 병이구나. 그런 거였어. 올가의 등줄기로 소름이 끼쳤다. 비밀은 곧 권력이 된다.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자가 우위에 설 수 있었다. 선황의 정부였다는 비밀이 올가의 약점이 된 것처럼 그녀가 사내후궁의 비밀을 알아갈수록 그는 약자가 되어갈 것이다.

“폐하를 걱정하시는 마음 이해해요. 편찮으신 걸 미리 알아채지 못해 송구합니다. 앞으로 제가 열심히 프리아 님을 돕겠습니다.”

말을 마친 올가가 빠른 동작으로 젖은 시트를 걷어냈다. 바구니에 넣어 자신의 방으로 가져가 목욕실에서 몰래 빨면 될 것이다. 후궁의 물품이라 소재가 고급스럽긴 해도 자신 또한 수행시녀이니 고급품을 쓴다 한들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허드렛일은 하녀들의 몫이었으나 시트 한두 장 빠는 정도는 문제없이 해낼 수 있다. 이보다 더한 일도 하면서 기어코 궁에서 살아남은 그녀였다.

“올가, 고마워. 이런 일에 휩쓸리게 해서 미안해.”

일을 돕겠다고 나선 프리아가 올가에게 사과와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방해만 된다며 그를 만류한 올가가 욕실로 프리아를 들여보냈다.

“갈아입으실 옷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재빨리 얼굴과 가슴에 묻은 피를 닦아 낸 프리아가 목욕시중을 들러온 시녀들을 맞았다. 그녀들은 파티션 너머에서 목욕용품이나 수건을 건네주는 일을 했다.

다른 하녀나 시녀들이 아니라 올가에게 그 모습을 보여서 다행이다. 무어라 설명을 해도 태의의 진찰을 받기 전까지는 역병이 아니냐는 의심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태의가 진찰한다 해도 정확한 병을 알아내기 어려우니 어쩌면 꼼짝없이 원인불명의 역병에 걸린 것으로 오인돼 격리될 가능성도 있다. 무엇보다 오웬이 알게 되어 충격을 받을 것을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져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프리아는 물에 잠긴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오웬을 만나는 게 아니었다. 그를 사랑하는 게 아니었다. 이만하면 충분히 살아왔다 생각했는데 그 때문에 자꾸 살고 싶은 욕심이 생겨난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삶이 부디 자신을 놓지 않기를, 프리아는 기도했다.

* * *

“아직 멀었어요?”

눈을 가린 안대가 답답해진 프리아가 오웬을 재촉했다. 종일 같이 있자며 아침부터 본궁으로 부르더니 오웬은 점심식사 후 사라져 티타임 시간이 되어야 나타났다. 차는 다른 곳에서 마시자며 잡아끄는 통에 따라왔는데 어디로 가는 것인지 갑자기 눈을 가려 앞을 못 보게 하는 것이 아닌가.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기다려.”

계단을 몇 걸음 내려온 곳에서 오웬의 발걸음이 멈췄다. 무릎 뒤에 닿은 의자의 감촉에 프리아가 고개를 들자 오웬이 어깨를 눌러 가볍게 내려앉혔다. 자신도 그 옆에 내려앉은 오웬이 프리아의 머리 뒤로 손을 올려 안대를 풀어주었다.

“어?”

밝아진 시야로 들어온 광경에 모습에 놀란 프리아가 오웬을 바라보았다. 회심의 미소를 짓던 오웬이 프리아의 고개를 잡아 다시 무대 위로 돌려놓았다.

“요즘 수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대중극단이라는데 얼마나 잘하는지 보고 싶어서 불러왔어.”

어찌나 인기가 많던지 공연이 잡히지 않은 날이 없다고 해 데려오는 데 애를 먹었다. 관객과의 약속 운운하며 난처해하던 단장은 오웬이 시종장을 시켜 전객석의 티켓을 사들이자 금세 태도를 바꿔 허리가 바닥에 닳도록 감사를 표했다. 황궁이라 알리지 않은 까닭에 그저 돈 많은 귀족이 연회에 부르는 것이라 생각하고 돈을 올려 받으려 했던 것이다.

황제 앞에서 하는 공연이라는 걸 알게 된 배우들은 극도로 긴장했는데 덕분에 리허설 중에 실수가 속출했다. 아예 익숙해지라고 무대 앞을 서성거리자 차츰 적응하기 시작한 가수들이 드디어 제 기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오웬이 점심 이후 자리를 비웠던 이유였다.

오웬의 탄신연 때 공연을 보러 한 번 와 봤던 곳이다. 황실 공연에 익숙한 가수들이 낯간지럽게 선황들의 업적을 찬양하는 축하극이었는데 당시 객석을 빼곡하게 채웠던 귀족들이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배우와 악단 그리고 시종 몇이 전부였다.

황제의 착석을 확인한 악단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오웬과 프리아가 앉은 전용석 앞으로 테이블이 놓이고 시종들이 걸어와 준비된 다과를 내려놓았다. 지휘자가 손을 높이 치켜들자 음악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성과 숲, 거리를 표현한 세트가 번갈아 놓였으며 화려한 분장을 한 배우들은 걸어 나와 두 손을 맞잡고 불멸의 사랑을 노래했다. 기사와 영주 부인의 금지된 사랑을 담은 통속소설을 원작으로 한 대중극이었던 까닭에 황실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는 어휘가 몇 번 배우의 입 밖으로 빠져나왔으나 오웬은 개의치 않았다. 리허설을 보느라 이미 알게 된 내용 대신 오웬은 공연에 빠져든 프리아의 얼굴만을 눈에 담았다.

하루 일정을 빼느라 시종장에게 우는 소리를 들어야했고 당분간 강행군으로 업무를 소화해야 했으나 그런 것 따위 아무렇지도 않았다. 주치의가 떠난 후 부쩍 우울해 보이던 프리아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온 것만이 기쁠 뿐이었다.

출정했던 기사가 돌아오기 하루 전 영주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오열하는 기사의 주위를 영혼이 된 여주인공이 맴돌았다. 그녀의 뒤를 따르겠다는 기사의 절규에 혼령이 슬픈 듯 고개를 흔든다. 아내의 배신을 눈치챈 영주의 칼에 기사가 사망하고 두 혼령이 재회해 부르는 감미로운 이중창으로 공연이 끝났다.

“우는 거야?”

어느새 눈물범벅이 된 프리아를 놀리는 것처럼 오웬이 입을 열었다. 관객은 적지만 열렬한 박수를 받게 된 배우들이 다시 무대 위로 나와 답례를 표하고 있었다.

“내용이 너무 슬프잖아요.”

“뭐가 그렇게 슬퍼?”

“저걸 보고 울지 않으면 냉혈한이죠.”

눈물 자국 하나 없는 오웬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프리아가 말했다. 거의 흐느끼듯 통곡하는 시종장의 울음소리가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너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 거라서 전혀 이입이 되지 않던데?”

못생겨졌네. 더 없이 어여쁘다는 얼굴로 웃으며 오웬이 프리아의 눈가를 적신 눈물을 닦아냈다.

“다음엔 즐거운 내용으로 골라서 데려와야겠어.”

프리아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객석이 빈 탓에 추위를 느낀 악단들이 악기를 정리하며 손을 주무르는 게 보였다. 가발을 쓰고 겹겹이 무대 옷을 껴입은 가수들만이 땀을 흘리며 추위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새 겨울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진짜 재미있었어! 나 또 보고 싶어!”

주인공들이 죽어 혼령으로 재회한 줄 모르고 되살아났다고 생각한 레온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발을 굴러댔다. 궁에서는 쉽게 보지 못하던 대중극이라 더욱 아이의 구미에 맞았다. 극 도중에 등장한 통속어에 유모는 눈을 찌푸렸지만 황제가 초대한 공연이라 불만을 표할 수 없었다.

“숙부님은 어디 계시지? 나 인사드리고 싶은데.”

고개를 기웃거리는 레온을 본 유모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저하,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유모가 한참이나 돌아오지 않자 좀이 쑤신 레온이 오페라 홀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황손 저하가 어디로 사라질까 걱정이 된 시종이 한 발짝 늦게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간 레온이 자신이 본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곧 아이의 작은 얼굴 위로 환한 미소가 번졌다.

“마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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