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주치의가 오늘 관마를 내어 달라 청하더군.”
오웬이 슬쩍 꺼낸 말에 프리아의 고개가 들렸다. 저녁식사가 끝난 후 가벼운 산책을 하고 돌아온 두 사람은 한 침대에 누워 제각기 책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읽고 있던 책까지 덮은 프리아가 긴장된 표정으로 오웬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역정을 내며 요청을 거부했을 거라 생각하는 걸까. 얌전히 관마를 내어주고도 불신 어린 시선을 받게 된 오웬이 불퉁한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그 녀석은 왜 널 돌보지 않고 두 달 넘게 자리를 비우겠다는 거지? 주치의로서 직무태만 아닌가?”
“그건…, 꼭 가야 할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예요. 말은 제가 따로 준비할게요.”
말이 아까워서 이러는 게 아닌데. 그깟 관마 백 필쯤 내어준다 해도 상관이 없었다. 돌팔이 놈을 두둔하는 프리아의 태도에 오웬의 기분이 상했다. 잡고 있던 책을 덮고 보란 듯 등을 돌려 눕자 당황한 프리아가 고개를 오웬 쪽으로 기울였다.
“오웬, 화났어요? 왜 화가 난 거예요?”
그걸 꼭 말을 해 줘야 아는가. 그러나 어느새 프리아 앞에서 약자가 되어 버린 오웬이 토라진 티를 내며 입을 열었다.
“네가 그 자식 신경 쓰는 게 싫어. 말은 이미 내어줬으니까 네가 준비할 필요도 없어.”
어쩌면 먼 친척일지도 모르는데. ‘그 자식’ 운운하는 오웬의 태도에 놀란 프리아가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오웬, 기르는….”
“알고 있어. 아버지와 다름없다 그 말이지? 그렇다고 진짜 아비도 아니잖아. 혼인한 적도 없다며.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니냐고. 젊은 사내가 혼인도 하지 않고 남의 아이를 오래 키우다니 영 의심스러워.”
“그렇게 젊은 건 아니라고 했어요. 동안이라서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프리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기르에게 들었던 말을 열심히 오웬에게 옮겼다. 동안이라고? 그 얼굴이? 프리아의 말을 들은 오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 녀석 실은 시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실은 뭐 할아버지라도 된다는 거야?”
비꼬듯 나와 버린 오웬의 말에 프리아가 침묵했다. 스스로 가끔 늙은이라 칭하던 기르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시종장보다 더 나이가 많다는 건 농담이겠지? 생각에 잠긴 프리아를 본 오웬이 한숨을 내뱉었다. 기껏 둘이 있는데 그 녀석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다니. 애초에 말을 꺼낸 자신이 잘못이었다. 안 되겠다. 이김에 아예 쐐기를 박아야지.
“그 녀석 난 마음에 안 들어. 세상에서 널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것도 싫고, 그렇게 널 아낀다면서 늦게야 찾아온 것도, 갑자기 떠나겠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겠어. 무엇보다 네가 그 녀석과 너무 친하다는 거, 그게 제일 거슬려.”
기르가 늦게 온 건 안식년으로 자리를 비워 소식 전달이 늦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스무 해가 넘도록 가장 가까이에서 보살펴주며 챙겨 주었으니 서로 간에 알고 있는 것도 공유하고 있는 추억도 많았다. 오웬을 사랑하지만 프리아가 세상에서 가장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기르였다.
입을 다문 프리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오웬이 쓴웃음을 지었다. 오랜 시간 프리아와 그 사내가 함께 보낸 추억과 시간의 깊이를 짐작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질투심이 솟아났다. 프리아를 처음 만난 그 밤 이후 이제 겨우 세 번째 계절을 지나고 네 번째 계절에 접어들고 있었다.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내가 먼저 널 만날 거야.”
어떻게 하면 오웬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기르를 향한 비호의적인 인식을 돌리게 할 수 있을까, 궁리하던 차였다. 뚱한 표정으로 입을 연 오웬의 말을 들은 프리아가 두 눈을 깜박였다.
“제가 기르를 만난 건 네 살 때예요. 폐하께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으셨죠. 프리아는 뒷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오웬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 어쩔 수 없잖아. 젊은 육체와 수려한 외모, 제국 내 제일 가는 권력과 재력을 가지고도 시간차에는 속절없이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가 진 거야? 나이가 어려서? 수긍하지 못해 이맛살을 찌푸리는 오웬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순식간에 오웬의 입술에 내려앉은 프리아의 입술이 가벼운 감촉만을 남기고 떨어졌다.
“뭐야?”
당황한 얼굴 위로 다시 프리아가 입술을 겹쳐왔다. 잠자리 어린아이에게 하는 밤 인사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입맞춤이다.
“이런 걸로 무마하는 거야?”
다시 투덜투덜 불평해 오는 오웬의 입술을 프리아가 자신의 입술로 덮었다. ‘귀여워.’ 소리 내지 않고 입술만 벌려 움직였다. 어처구니없는 질투도 기르보다 먼저 자신을 만나겠다고 하는 억지도 그저 사랑스럽기만 했다.
“유혹하지 마. 오늘은 그냥 진짜 잠만….”
장난 같은 입맞춤에도 빠르게 반응을 보이는 아랫도리를 오웬이 시트를 잡아당겨 덮었다. 지나치게 건강한 육신에 원망의 화살을 돌리며 오웬이 신음을 입 안으로 삼켰다. 촛불이 꺼진 자리를 달빛이 채웠다. 한 몸이 된 그림자가 벽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린다. 길게 뻗어나갔다가 다시 짧아지는 음영이 소리도 없이 오래 바닥을 뒹굴었다.
통행증과 관마 사용 허가서, 가벼운 여장을 꾸린 기르는 지체 없이 백조궁을 떠났다. 황제의 명으로 발부된 허가서는 제국뿐 아니라 공국에서도 사용이 가능했다. 후궁전 예산 집행 내역서를 본궁에 제출하러 갔던 올가가 백조궁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그사이 침울해진 시녀들의 분위기를 알아채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기르 님이 떠나셨어요. 함께 계셔서 든든했는데. 궁이 꼭 텅 빈 것 같지 뭐예요?”
객실 담당 시녀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차분하고 성숙한 사내가 이상형인 그녀는 평소 기르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프리아 님 식성도 잘 알고 계셔서 식단 체크도 해 주셔서 편했는데요. 기르 님 오시고부터는 식사를 덜 남기시게 되셨잖아요?”
주방 하녀 통솔을 맡은 시녀도 말을 보탰다. 그러자 다른 시녀가 조심스럽게 반론을 제기했다.
“요샌 다시 남기시던걸요? 폐하께서 어찌나 무서운 눈으로 저희를 노려보시던지. 살 떨려서 시중 들어가지도 못하겠어요.”
그 사내가 떠났다니 무슨 말인가. 자신의 귀를 의심한 올가가 한숨짓는 그녀들에게 다시 물었다.
“기르 님께서 떠나셨다고요? 먼 외출이라도 하러 가신 건가요?”
“알훼니아로 돌아가셨대요. 프리아 님을 뵈러 오셨던 거지 쭉 여기 머무실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어머, 아예 안 돌아오세요?”
“기다리는 가족이 있지 않을까요? 아이도 여럿 두실 나이인데.”
그녀들 역시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예의바르고 정중한 태도로 대한 기르였으나 딱히 다른 이와 서로 간 사정을 알만한 긴 대화는 나눈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기르의 아내는 어떤 사람일까, 실속 없는 수다를 떨기 시작한 시녀들을 뒤로 하고 올가는 2층으로 향했다.
유디스가 없는 틈을 타 후궁과 그 사내가 사통하는 증거를 잡으려고 했는데. 백조궁을 떠났다니 낭패였다. 올가는 분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증거 없이 후궁의 사통을 고했다가는 역으로 모함 누명을 쓰게 될 수도 있었다.
“저는 좀 쉬고 올게요. 프리아 님은 침실에 계세요.”
혼자서 응접실을 지키느라 지루해하던 이사벨이 돌아온 올가를 보고 반색했다. 따지고 들자면 본궁까지 다녀온 올가가 더 피곤한 것이 당연할 테지만 백작가에서 응석만 부리며 자라온 이사벨에게는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었다. 지금껏 자신이 응접실을 지켰으니 올가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긴 것이다.
“다녀오세요. 수고하셨습니다.”
이사벨은 올가의 인사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떠났다. 프리아의 시중을 도맡아하던 유디스가 자리를 비우고 그 역할을 올가가 대신하게 된 까닭에 짜증나게도 자신의 일거리가 늘어났다.
기껏 수행시녀가 되었는데 후궁이 사내인 탓에 일상은 무료하기만 했다. 유행하는 의복과 장신구, 누가 누구와 눈이 맞았다는 가십, 용한 점을 치는 점성술사 그리고 은밀한 밤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숙녀들만 나눌 수 있는 즐거움은 많았다.
꾸밈에 관심 없이 책만 보는 후궁은 프리아뿐만이 아니었지만 이사벨은 레지나 역시 여인이 아니라 여겼다. 목련궁의 수행시녀들이 백조궁을 딱하게 여기듯 이사벨 역시 그들을 딱하게 여겼다. 그래도 총애를 받는 쪽이 조금은 낫겠지? 이사벨은 박빙의 대결을 마치고 푹신한 침대로 몸을 던졌다.
“프리아 님, 들어가겠습니다.”
빠르게 노크를 마친 올가가 침실의 문을 열었다. 오늘도 역시 사내후궁은 커튼을 길게 내린 채 기운 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정인이 떠나서 상심했다는 티를 아주 대놓고 내는군. 얼마나 애틋한 이별을 했을지, 차라리 늦게 와 그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다행이었다. 뭘 한 게 있다고 누워만 있을까. 애가 들어선 것 아니냐는 중년 시녀들의 농을 떠올리며 올가가 콧방귀를 뀌었다. 후궁이 사내였기에 망정이지 여인이었다면 근본도 없는 자식이 황위를 잇는 대참사가 벌어질 뻔했다.
되돌아 나가려는 올가의 발에 떨어져 있던 베개가 밟혔다. 더러워졌으니 세탁실에 넘겨야겠군. 무심코 베개를 집어드는 올가의 눈에 점점이 떨어져있는 짙은 얼룩이 보였다. 이게 뭐지? 실내가 어두워 창 앞으로 다가간 올가가 커튼을 젖히고 다시 베개를 내려다보았다.
“피가….”
핏방울이다. 놀라 고개를 든 올가의 시선 속으로 흥건히 피에 젖어 있는 시트가 내려다보였다. 침대를 적신 핏물 위에 사내 후궁이 힘없이 누워 있었다. 짧게 비명을 내지른 올가가 사람을 불러오기 위해 등을 돌렸을 때였다. 뒤에서 뻗어온 손이 올가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