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르가 떠난다고? 프리아는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어 멍하니 되뇌었다. 떠난다니 왜.
“돌아가는 거야?”
한참 만에 입술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모래가 섞인 듯 거칠었다. 아직 약을 먹기 전인데도 입 안 가득 쓴물이 고였다.
“돌아갔다가 다시 올 겁니다. 복용량이 늘어 남은 약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어요.”
프리아의 눈에 서린 불안을 짐작한 기르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이대로는 봄이 오기 전에 약병이 바닥을 보일 겁니다. 복용량도 한없이 늘릴 수는 없으니 성분을 강화한 새 약을 만들어 가져오겠습니다.”
그런 이유라면 당연히 어서 다녀오라고 기르를 보내주는 것이 맞다. 물론 다른 이유를 내놓았더라도 프리아는 기르를 잡지 못할 것이다. 기르에겐 어디든 자유롭게 오갈 권리가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프리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여기서 만들면 안 돼?”
“이곳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약재가 있습니다. 많은 양이 필요하다보니 지금부터 수소문한다 해도 적량을 채우지 못할 겁니다.”
황제가 명을 내린다면 구해질 가능성도 있겠으나 치명적인 독을 필요로 하는 이유를 납득시키기 어려울 것이었다. 수많은 이를 몰살시킬 수 있는 독을 개인이 상비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반역으로 몰리기 충분했다. 하물며 황제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후궁에게 허락될 리 없다.
독으로 연명해나가는 치료법이라 밝힌다 한들 그 누가 믿어주겠는가. 프리아가 직접 먹어 약효를 증명했다가는 악마가 씌었다는 모함을 받아 극형에 처해질 것이다. 황족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밝힐 수도 없었다. 악마의 사술로 불로를 유지한다는 의심이 더해져 상황은 더욱 최악으로 치달을 것이다.
두고 가는 마음 또한 편치 않다. 기르는 물기 가득한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프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돌아올 테니 걱정 마세요. 제가 언제 프리아 님께 거짓말 한 적 있습니까?”
“했어. 많이 했어. 어렸을 때 사탕이라고 속이고 순 약만 먹였잖아.”
아이처럼 입술을 내밀며 프리아가 투정했다. 다 자란 후에도 프리아는 언제나 기르 앞에선 아이로 돌아갔다. 세월이 더 흘러도 여전할 것이다. 저 젊음 위로 세월의 무게가 더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르는 소망했다.
“선의의 거짓말은 셈하지 않는 법이죠. 나랏법에도 적혀 있답니다.”
다섯 살 아이에게나 먹히던 소리를 다시 늘어놓는 기르의 농담에 프리아가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다시 들어도 재미없어, 그거.”
“할아버지라 그렇습니다.”
“그 농담도 재미없어.”
“그렇습니까? 재미있는 말은 황제에게 해 달라고 하십시오.”
기르가 빙그레 웃으며 하는 말에 프리아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오웬이 하는 농은 대개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다지 즐겁지가 않았다.
“오웬도 재미없어. 혼자만 웃고.”
“저희 집안이 대대로 농에는 소질이 없는 편입니다. 다들 억지로 웃어 주니까 본인이 재치 있는 줄로만 알지요.”
“전부터 궁금했는데 기르는 황족이라면서 왜 정체를 밝히지 않아?”
힘없는 공국 출신의 후궁이 데리고 있는 주치의보다는 본래의 신분을 밝히는 편이 대우도 훨씬 좋을 것이다. 백작 부인들처럼 취미로 공방을 후원하면 모를까. 본격적인 직업을 가지는 것은 귀족의 품격에 맞지 않았다. 궁에서도 태의를 제외한 궁정의들은 그저 사용인 취급을 받고 있었다.
“제가 지나치게 동안이라서요. 물론 실제 나이에 비해서 말하는 겁니다.”
“아, 지금 말은 좀 재미있었다. 그런데 그게 왜 정체를 밝히지 않는 이유가 되는 거야?”
동안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기르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뜯어보며 프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젊었을 때 약을 잘못 먹은 탓에 잘 늙지 않는 몸이 되었습니다. 실은 저도 원인은 제대로 알지 못해서 남들이 알려 달라 귀찮게 굴어도 답해 줄 수 없거든요. 원치 않는 관심을 받는 건 부담스럽기도 하고요.”
“알아보는 사람은 없어? 형님 말고 다른 가족들은?”
“잊혀진 지 오래입니다. 부모님도 예전에 돌아가셨고요. 조카들도 잘 살고 있으니 굳이 제가 입 댈 이유가 없습니다.”
입 대고 싶은 어린 녀석이 하나 있기는 하지만 프리아가 좋다 하니 당분간은 지켜볼 작정이다. 그녀석도 생각이 있다면 제가 좋아하는 이를 위험에 빠뜨리지는 않겠지.
“혹시, 혹시… 그 조카가 오웬이야?”
호기심 어린 눈으로 프리아가 다시 물었다. 다소 멀더라도 친척이라면 조카뻘은 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아닙니다. 그보다 더 아래지요. 황제가 알면 더 싫어할 겁니다.”
“싫어하는 건 아닐 거야.”
어느새 다 커서 이렇게 제 연인을 두둔할 정도가 되었나. 기르의 눈치를 보며 오웬을 두둔하는 프리아를 기르는 어린아이 보듯 바라보았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함께 형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겠죠. 우선은 다녀오고 난 후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돌아간다고?”
어린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모습을 기르는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가족 간의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친해질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모양이었다.
“예, 그곳에서 해결할 일이 있어 돌아가려 합니다.”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돌아간단 말인가. 프리아의 건강을 책임진다더니 차도가 없으니 내뺄 궁리부터 하는군.
시종장의 집무실에 들렀다가 우연히 서류 한 장을 발견한 오웬이 기르를 불러들였다. 관마 사용 허가서에 적힌 이름이 프리아의 주치의였기 때문이었다. 오웬은 서류에 고정했던 불쾌한 시선을 다시 돌팔이 의사에게로 돌렸다.
“네가 온 후로 더 말라가고 있어. 본인의 능력 부족을 이제야 시인하는 건가?”
오웬의 삐딱한 말투에도 동요 없이 기르가 정중한 태도로 답했다.
“제가 오지 않았다면 더 마르셨을 겁니다. 크게 무리를 하셨던 몸이니 회복에도 시간이 걸리는 것이지요. 최근에도 무리를 하고 계시니 걱정이 됩니다.”
기르의 대답을 들은 오웬이 사나운 표정으로 시종장을 돌아보았다. 듣고 있어? 지금 저 놈이 내 탓을 하고 있다고.
“아이고, 그렇게 몸이 약하시다니. 부디 좋아지실 때까지 푸욱 쉬셔야 할 텐데요. 무리 하시면 안 되겠습니다.”
오웬의 눈길을 피한 시종장이 기르의 말을 거들었다. 기분 탓인지 뒷말이 꼭 오웬을 비난하는 것처럼 들렸다. 프리아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건 오웬도 잘 알고 있었다. 무리를 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은 저들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웬이 더 간절했다.
지난밤의 일만 해도 그렇다. 힘들지 않도록 그저 곁에서 얌전히 잠만 자려고 했는데 프리아가 먼저 정사를 요구해 왔다. 결국 젊은 혈기가 자제력을 이기는 통에 단순한 포옹이 격한 정사로 이어지고 말았다.
억울하지만 그렇다고 부부간의 내밀한 밤사정을 토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차라리 보지 않으면 모를까 안아 달라 졸라대는 사랑스러운 연인의 요구를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한동안 발을 끊을까? 불가능했다. 매일 보고 싶은데 어떻게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있어?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관마 사용을 요청드렸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공무로 출장 가는 관리도 아닌 주제에 뻔뻔하기까지 하다. 오웬은 이를 갈며 눈앞에 선 사내를 다시 노려보았다. 공손한 듯 불손한 말투가 한결같이 거슬렸다.
“주인의 건강을 살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뭐지? 들어볼 테니 말이나 하도록.”
“개인적인 일입니다. 프리아 님께서도 허락하셨습니다.”
“개인적인 일에 관마를 요청한다고? 어이가 없군.”
“제가 빨리 다녀와야 프리아 님의 건강을 챙길 수 있으니까요.”
“이렇다 할 성과도 내보이지 못한 주제에 말은 잘도 하는군. 그래, 내어주도록 하지. 그러나 네가 자리를 비운 동안에 몸이 더 안 좋아지기라도 한다면 그 책임을 단단히 져야 할 것이다.”
“넓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사내가 자세를 낮춰 인사를 올렸다. 참자, 참을 수밖에. 영 마음에 들지 않지만 프리아가 아비처럼 따른다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무슨 아비가 저따위로 행동하는가 싶다가도 더욱 개차반인 친부를 떠올리면 비교조차 될 수 없음에 헛웃음이 샜다.
“마음에 안 들어.”
기르가 나간 후에도 여전히 그가 서 있었던 자리만을 노려보며 말이 없던 오웬이 불평을 내뱉었다. 그러게 제 방에는 왜 들르셔서 그걸 보고 계셨단 말입니까. 시종장이 오웬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관마 사용 허가서는 최상부에까지 올라갈 일이 없는 단순한 서류에 불과했다. 언제는 들이는 것도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더니 이제는 떠난다고 하니까 또 화를 내시고. 까마득히 어린 조카 손주의 일방적인 시비에도 빙그레 웃고 마는 기르 저하의 인내심이 놀라웠다. 두 황족 사이에 낀 시종장이 손수건을 들어 이마에 맺힌 진땀을 닦아냈다.
“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특히 그 시선이 기분 나빠. 자기가 내 숙부라도 되는 것처럼 시건방진 눈빛으로 보고 있잖아. 애송이 취급하고 있는 게 다 느껴진다고.”
정확히는 숙부가 아니라 종조부이십니다, 폐하. 그분 눈에는 폐하가… 애송이 맞지요. 애송이뿐이겠습니까? 핏덩이지요, 핏덩이.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을 시종장이 꿀꺽 눌러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