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18)화 (119/237)

시간은 흘러 어느새 유디스가 떠나는 날이 되었다. 제방에서 짐을 마저 꾸리다 말고 돌아온 유디스가 올가를 붙잡고 또 주의사항을 늘어놓고 있었다.

“아셨죠? 프리아 님의 머리카락은 매일 밤마다 백번씩 빗겨드려야 해요. 감겨드릴 때 쓰실 향유는 저번에 알려 드렸고 그리고 또….”

동화 속 공주님도 아니고 뭘 백번씩이나 빗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사벨이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사내후궁을 대상으로 행해지던 인형놀이의 주체가 유디스에서 올가로 넘겨지는 순간이었다.

엄숙한 표정으로 수석시녀의 본분을 강조하는 유디스나 진지한 얼굴로 며칠째 이어지는 자칭 특별 교육을 받고 있는 올가나 어쩜 저리 쿵짝이 잘 맞는 것인지. 유난도 저런 유난이 따로 없었다. 거리가 멀다 뿐이지 기껏해야 촌구석 결혼식에 다녀오는 것인데 마치 국혼을 축하하러 가는 황실 사절단이라도 된 것처럼 굴고 있지 않은가.

“올가 님을 잘 보좌해 주시리라 믿어요, 이사벨 님.”

“알았다니까요, 어서 다녀오시기나 하세요.”

그깟 수석시녀 대리 자리, 준다고 해도 이쪽에서 사양이다. 거절할 생각이기는 했지만 자신에게는 한 번 물어보지도 않은 유디스를 이사벨이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고까운 이사벨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유디스가 올가의 귀에 속삭여댔다.

“올가 님, 고생이 많으시겠지만 아랫사람 단속도 수석시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랍니다.”

“알고 있습니다, 유디스 님.”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올가에게 유디스가 다시 귀엣말을 했다.

“전에 부탁드렸던 거는 준비가 되셨을까요?”

면전에 대고 귓속말로 수군거리다 못해 둘이서 응접실을 빠져나가는 유디스와 올가를 본 이사벨이 당황해 입을 벌렸다. 뭐야, 험담할 거면 차라리 앞에서 하라고!

“솜씨가 부족해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어요.”

유디스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온 올가가 미리 준비해두었던 목탄 초상화를 꺼내들었다. 여행에 지참하겠다며 유디스가 미리 올가에게 부탁했던 프리아의 초상화였다.

“어머나! 훌륭한 솜씨세요! 정말 잘 그리셨어요!”

흑백으로 표현된 세심한 이목구비에 감탄하며 유디스가 칭찬을 연발했다. 실물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이정도면 프리아 님이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 보며 그리움을 달랠 정도는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본가에 들러 하루 묵고 올 예정이니 자랑하던 프리아 님의 미모를 가족들에게 보여 줄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과찬이십니다. 그리 말씀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올가 님은 참 겸손하세요. 저 같으면 온갖 곳에 자랑하고 다녔을 텐데요.”

자신이 종이에 끄적거린 것들을 발견한 아비는 화를 내며 그림을 모두 아궁이에 처박았다. 좋은 신붓감이 되어야 한다며 올가를 억압하던 그는 정작 친척의 부추김에 넘어가 제 딸을 늙은 황제의 정부자리에 밀어넣어 버렸다. 자신이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다한들 자랑할 곳이 없다.

사랑받으며 구김살 없이 자라난 유디스의 순수한 감탄을 올가는 고소를 지으며 내려다보았다. 사내 후궁의 부정이 발각된다면 이 철없는 아가씨도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돌아오지 않고 시집이나 가버리는 편이 좋겠지. 물론 추문에 휩싸이게 될 테니 좋은 혼처자리는 모두 놓치게 될 것이다. 그건 지금쯤 응접실에서 새침한 표정이나 짓고 있는 이사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신 또한 책임을 물어 벌을 받게 되어도 좋았다. 그 고귀한 분을 능멸하는 사내 후궁에게 제대로 된 처벌을 내려줄 수 있게 되기만 한다면야.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아니 된다. 초상화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유디스의 눈을 피해 올가는 수첩의 뒷면에 그려진 황제의 얼굴을 애틋하게 쓰다듬었다.

“프리아 님!”

마차에 몸을 싣기 위해 발을 올려놓던 유디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붉어진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맺혔다. 또 시작이네. 누가 보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줄 알겠어. 유디스의 배웅을 하기 위해 다같이 내려온 이사벨이 하품이 나오는 입가를 가리기 위해 손바닥을 올렸다. 프리아가 말을 네 필이나 내어준 덕에 가는 데 열흘이 걸릴 거리도 일주일로 단축되었다. 고작해야 3주 자리를 비우는 거면서 유디스는 3년은 보지 못할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걱정 말고 잘 다녀와, 유디스. 리브론에게 결혼 축하한다고 내 대신 잘 전해 줄 거지?”

조금 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음에도 유디스가 울컥하며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한 유디스의 머리를 프리아가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왜 또 울고 그래. 금방 돌아올 거면서. 이래서는 시집도 못 보내겠어.”

프리아의 농을 들은 유디스가 우는 얼굴로 소리쳤다.

“왜 자꾸 보내려 하세요! 저는 혼인 안 하고 프리아 님과 살 거예요!”

마음이 왜 이렇게 불안하지. 리브론의 결혼 축하 선물을 준비하며 들떴던 며칠간과 다르게 정작 출발하려고 하니 발이 떼어지지가 않았다.

수석시녀의 본분 운운하며 강조했지만 실은 자신 없어도 크게 문제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은 유디스도 알고 있었다. 지난여름 황제의 명으로 수행시녀들이 갑작스럽게 휴가를 떠났을 때에도 프리아 님은 별다른 일 없이 잘 계시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폐하께서 프리아 님을 아껴 주고 계시니 걱정할 필요조차 없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프리아 님의 신변에 별고가 벌어지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이상스레 심장이 두근거렸다. 괜히 간다고 했나 봐. 못 떠나겠어.

한참이나 눈물의 이별을 되풀이하고 나서야 마차는 백조궁을 떠나갔다. 우아한 마차의 짐칸에는 리브론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선물과 유디스의 가족들에게 보내는 프리아의 하사품이 가득 쌓여 있었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유디스의 눈에 멀어지는 백조궁이 보였다.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프리아 님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유디스는 애써 참아냈다. 올가 님이 잘 하시겠지? 잘 하실 거야.

* * *

“프리아 님.”

티타임이 준비되었다는 소식을 알리기 위해 침실의 문을 열었던 올가가 다시 문을 닫았다. 사내 후궁이 잠에 빠져 있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주무시네요. 깨어나시면 드려야겠어요.”

“또요?”

최근 들어 부쩍 잠이 많아진 사내 후궁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이사벨이 고개를 들었다. 지난밤에 황제가 다녀갔기 때문일까. 밤을 새우기라도 한 것인지 프리아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입맛도 없고 얼굴이 까칠해진 데다가 툭하면 잠에 빠져 있고. 누가 보면 애가 들어선 줄 알겠다며 쑥덕거리던 중년 시녀들이 노려보는 올가의 시선에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호랑이 없는 곳에 토끼가 왕 노릇한다더니. 그렇다고 유디스가 호랑이는 아니었지만 그녀 대신 엄격하게 구는 올가의 행동이 눈꼴셔진 이사벨이 콧방귀를 뀌었다.

“프리아 님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나중에 다시 오세요.”

그때 내실에 들어서는 기르를 본 올가가 앞을 가로막았다. 자신을 막아서는 올가의 행동에도 개의치 않다는 표정으로 기르가 입을 열었다.

“약을 드실 시간입니다. 때를 놓치면 약효가 떨어져서요.”

몸을 보하는 약을 먹인다는 핑계로 안에서 무슨 짓을 할게 뭐람. 길을 내어준 올가가 기르의 뒤에 바짝 붙었다.

“프리아 님, 기르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방문을 알린 기르가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커튼을 내려 어두워진 방 안을 확인하더니 혀를 차며 창 앞으로 가 걷어내고 창문을 열었다.

“기르?”

“예, 저입니다. 이렇듯 커튼을 내리고 있으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시지요. 해를 쬐야 몸에 좋습니다.”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뜬 프리아가 곁에 앉은 기르를 올려다보았다. 기르가 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어깨를 잡아 프리아를 일으켰다. 졸려. 프리아 역시 투정하는 아이처럼 다시 눈을 감으며 기르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이제 일어나셔야죠? 티타임 시간입니다.”

스스럼없는 애정표현에 눈매가 매서워진 올가를 향해 기르가 고개를 돌렸다.

“채혈을 해야 하니 숙녀분께서는 자리를 비켜 주셨으면 합니다.”

피를 보면 기절하는 것이 숙녀들의 에티켓이나 다름없었으나 올가는 그까짓 것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사혈 따위야 선황의 침실에서 수시로 본 처치법이었다. 그러나 내색할 수 없어 올가는 마지못한 표정으로 할 수 없이 프리아의 침실에서 물러났다.

“기이하게 충성스러운 아이군요. 저를 의심하는 듯하니 빨리 나가봐야겠습니다.”

프리아의 침실을 드나들 때마다 경계하는 내색을 드러내는 시녀가 문밖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기르가 입을 열었다.

“올가? 아마 유디스에게 주의를 들은 게 많아서 그럴 거야.”

오래전 외간 사내를 조심해야 한다며 잔소리하던 유디스의 참새 같은 얼굴을 떠올린 프리아가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언제 자리에 누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약의 복용을 늘린 후로 고통스러운 발작은 줄어들었으나 수시로 현기증이 드는 부작용이 생겨났다. 순간 의식이 날아갔다 정신을 차려보면 1분 남짓한 짧은 시간이 흘러 있는가 하면 때로는 몇십 분이 지나 있곤 했다.

“황제가 다녀갔군요. 프리아 님을 걱정하진 않던가요?”

프리아의 쇄골에 남은 열정의 흔적에 눈을 찌푸리며 기르가 말했다. 애는 나날이 말라가는데 도통 자제할 줄을 모르는군.

“내가 하자고 했어. 그런데 여기서 더 살이 빠지면 주방장도 기르도 다 해고할 거래.”

가을을 타느라 입맛이 없다는 자신의 변명을 오웬은 들으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본궁에서 불러온 태의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같은 진단을 내놓자 한숨을 쉬면서도 결과를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불안한 생각이 들 때면 오웬을 붙잡고 안아 달라 속삭였다. 몸을 겹치는 순간에는 모든 걸 잊을 수 있어 좋았다. 전신에서 힘차게 고동하는 맥박이 아직 자신이 살아 있음을 실감케 했다.

정사가 끝난 후 다정하게 보살펴 주는 오웬의 시중을 받는 것도 좋았다. 오웬은 프리아의 손발이 없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안아 올려 씻기고 다시 입힌 후 제품에 다시 가두었다. ‘뼈가 아플 지경이야.’ 툴툴거리는 목소리도 좋았다.

프리아는 지난밤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며 기르가 단호한 말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알훼니아에 다녀와야겠습니다. 더 늦출 수 없겠어요.”

공국행을 결정했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아 출발일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하루 약효가 빠르게 떨어져가고 있어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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