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이 환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프리아는 어서 침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이상하다. 피부로 와 닿는 감촉이 푹신하고 부드러웠다. 고개를 내린 프리아의 시선에 흘러내린 깃털 이불이 허리께에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분명 딱딱한 빈 욕조에 누워 있었는데 어떻게 된 것일까.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혼란스러운 꿈을 꾸었다. 프리아는 그 꿈에서 막 빠져나온 참이었다. 새벽에 겪었다고 생각했던 발작이 설마 현실이 아니라 꿈에서 일어났던 일일까. 그래, 약을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발작이 그렇게 빨리 다시 일어날 리가 없지. 꿈을 꾼 것이다.
눈에 띄게 안심한 표정을 한 프리아가 내려가 있던 이불을 다시 끌어올려 머리까지 덮었다. 다시 나른한 잠에 빠져들려고 했을 때 머리 위에서 오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는 건 좋은데 인사만이라도 좀 해 주면 안 될까?”
해가 밝아 이미 정무에 들어가 있을 줄 알았다. 이불속에서 빼꼼히 빠져나온 프리아의 눈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던 오웬에게로 향했다.
“가신 줄 알았어요.”
“갔다가 다시 왔어. 지금이 몇 시인 줄 알기나 해?”
프리아가 깨어날 때까지 오래 기다려야 했던 오웬이 불퉁한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었다. 그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가자 시계가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잠이 길어 그런 정신없는 꿈을 꾸었던 것일까.
이참에 아예 일어나려 몸을 꼼지락거리는 프리아의 어깨로 오웬이 손을 가져갔다. 몸을 받치는 오웬의 손에 기대 프리아가 수월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오웬의 양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매달리는 프리아의 행동에 오웬이 미소를 지었다. 둔부를 받쳐 안아든 오웬이 목욕물이 준비되어 있는 욕실로 프리아를 데려갔다.
온수로 가득 찬 욕조를 바라보며 프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예지몽이었나. 침의마저 벗겨주는 오웬의 손길에 마음 편히 몸을 맡기고 있던 때였다.
“혹시 몽유병 증세 있어?”
뜬금없는 질문에 프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몽유병이요? 아니요.”
왜 그런 걸 묻는 걸까. 빤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프리아의 시선에 오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건 본인은 잘 모르는 건가?”
“몽유병 같은 거 없어요. 왜 그런 걸 물어보시는데요?”
본인이 자각하지 못한다면 프리아의 시녀들에게 물어봐야 하는 걸까. 오웬의 눈이 자고 일어나 헝클어진 프리아의 머리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뻗어나간 손이 동그랗게 튀어나온 프리아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네가 옆에 없었어.”
“예?”
무슨 소리지? 침대에 있었는데? 생각하던 프리아의 고개가 오웬이 이끄는 대로 물이 가득 찬 욕조로 향했다.
“내실에도 없어서 또 지붕에라도 나갔나 생각했는데 여기서 찾았어. 저 안에서 자고 있더라고.”
침의가 벗겨져 알몸인 프리아의 살갗에 털이 곤두섰다. 한기가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와 머리까지 차갑게 만들었다.
“기억 나? 왜 저기서 자고 있었어?”
부드럽게 물어오는 질문에도 입술이 덜덜 떨려왔다. 몸이 식은 걸 알아차린 오웬이 프리아를 안아 욕조에 내려놓았다. 옷소매를 걷는 걸 깜박해 오웬의 팔꿈치까지 물로 젖었다.
“기억… 나지 않아요. 모르겠어요.”
경직되어 딱딱하게 흘러나오는 자신의 목소리가 프리아는 낯설게 느껴졌다. 꿈이 아니었다. 새벽의 발작은 실제로 일어났던 것이었다.
“몽유병 증세가 딱 그렇다고 하더군. 네 주치의가 그런 것도 치료할 수 있을까? 아니라면 태의를 만나보는 게 좋겠어.”
그러고 보니. 떠오르는 기억에 오웬이 말을 이었다.
“전에 네가 여기 머물렀을 때 말이야. 가끔 누가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거든. 어차피 너밖에 없는 걸 아니까 그냥 다시 잠이 들었지. 그때도 몽유병 때문이었을지 몰라.”
가끔 잠이 깰 때면 프리아는 달빛이 내려앉은 오웬의 얼굴을 바라보거나 다시 잠이 올 때까지 침대를 빠져나가 책을 읽곤 했다. 푹 잠들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웬 역시 그때마다 기척을 느끼고 있었나 보다.
“표정이 왜 그래? 걱정하지 마.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닐 거야. 너무 피곤하면 그럴 수도 있다는데 나 때문인가?”
어제 너무 많이 했나. 무리를 시킨 건가.
자각 없이 돌아다니다 넘어지면 다칠 수 있으니 가구는 다 벽에 붙여놓으라고 해야겠어. 잠결에 프리아가 창문으로 나갔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이곳뿐 아니라 프리아의 처소에도 문단속과 창문단속을 철저히 하라고 말해 둬야겠군. 이참에 그냥 계속 여기서 데리고 있을까? 아쉽지만 비밀통로도 당분간 폐쇄해 놓는 것이 좋겠어.
생각에 잠긴 오웬의 얼굴을 바라보며 프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몽유병이 아니에요. 전부 말해 버리고 싶은 충동과 차라리 몽유병이라 의심해서 다행이다 안도하는 마음이 교차하며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어? 왜….”
갑자기 입술을 겹쳐온 프리아 때문에 오웬의 사고는 더 이상 뻗어나갈 수가 없었다. 불안해진 건가? 오웬은 프리아를 달래듯 감싸며 벗은 등을 두드렸다. 옷은 이미 젖어 버렸다. 두 사람이 들어가도 충분한 욕조 안으로 오웬이 입을 입은 채 들어왔다. 좀 쉬게 두어야겠다고 막 결심한 차였으나 혈기왕성한 젊은 몸은 입술이 부딪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시종장이 화를 내겠어.”
오후 일정 때문에 차려입은 화려한 정복이 온통 물에 젖었다. 양 어깨에 달린 금빛 수술이 물에 둥둥 떠올랐다. 여러 명의 장인이 동원돼 수놓은 자수가 프리아의 손톱에 걸려 끊어졌다. 젖은 정복 때문에 움직이기 거추장스러워진 오웬이 물밑으로 손을 내려 매듭을 벗겨냈다. 물을 흠뻑 먹어 무거워진 정복이 욕조 밖으로 떨어지며 질척한 소리를 냈다.
몸을 따뜻하게 감싸는 온수에도 한기가 가시지 않는다. 프리아는 체온이 높은 오웬의 몸이 구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붙잡고 매달려 정신없이 허리를 움직였다. 몸 깊은 곳까지 뜨겁게 해 줘. 프리아의 속삭임을 들은 오웬이 동작에 박차를 가했다.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던 두 사람이 동시에 단숨을 토해냈을 때 기다리다 못한 시종장이 욕실의 몸을 두드렸다.
“폐하, 행사가 곧 시작됩니다. 송구합니다만 이제 나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기다리라고 해.”
눈을 감은 프리아의 몸이 경련을 멈출 때까지 기다린 오웬이 욕조 옆에 준비된 수건으로 손을 뻗었다. 반쯤 벗겨지긴 했으나 물에 젖은 셔츠와 바지를 입은 채 다른 이의 수발을 드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일단 물 밖으로 프리아를 꺼낸 오웬이 옆에 있는 의자에 내려놓았다.
꼼꼼하게 수건으로 닦아 물기를 없애고 다른 수건을 들어 다시 몸을 감싸놓았다. 자신이 하는 대로 유순하게 몸을 맡기고 있는 프리아가 꼭 아이라도 된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젖은 머리칼을 감싸는 수건 아래 발그레한 뺨을 드러낸 얼굴이 마치 복숭아 같다. 예쁘기도 하지. 오웬은 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폐하, 한참 늦으셨습니다. 제 말 들리십니까?”
안달하는 시종장의 목소리를 귓등으로 넘기며 오웬은 젖은 옷을 마저 벗었다. 오웬이 알몸으로 프리아를 안고 나오자 시종장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폐하! 옷이 왜….”
열린 문으로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정복을 발견한 시종장이 탄식했다. 대체할 다른 정복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의식에 선보이지 못한 채 세탁실로 직행할 새 옷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시끄러워. 떠들 거면 나가서 식사나 준비해 와.”
오웬이 눈썹을 모으며 시종장을 향해 턱짓했다.
“식사는 가서 하셔야 합니다. 폐하, 이미 시간이…….”
내실 의자 위에 프리아를 내려놓은 오웬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밥 먹고 가. 나 먼저 나갈게.”
대답 없이 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욕실에서 남은 힘을 소모한 까닭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생각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문을 향해 걸어가는 오웬의 뒷모습을 프리아의 눈이 쫓았다. 저 품에 안겨 몸을 섞을 때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그러나 이렇듯 떨어져야 하는 순간은 늘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이미 점심때를 넘겼음에도 배가 고프지 않다. 뭐라도 먹으면 토해낼 것처럼 속이 울렁거린다. 오웬이 장의자에 눕혀 준 덕분에 그저 암전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프리아는 눈을 감고 저려오기 시작하는 팔다리를 힘없이 늘어뜨렸다. 정적이 흐르고 잠시 후 프리아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프리아 님? 주무십니까?”
식사를 준비해 온 시종장이 그새 잠이든 프리아를 보며 난색을 표했다. 피곤하실 만도 하지. 자제를 모르는 사람처럼 구는 폐하를 받아내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실까. 정력이 강했던 선황은 여러 후궁을 두고 돌아가며 그녀들을 찾았다. 지금도 역시 후궁은 여럿이지만 프리아 외에는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가뜩이나 마른 몸이 더욱 야위어 어린 새처럼 연약해 보인다.
착잡한 표정으로 시종장은 준비해 온 식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선황이 즐겨 먹던 강장제라도 구해와 드려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걸 기르 저하가 안다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시종장은 기르의 엄격한 얼굴을 떠올리며 흠칫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