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저는 문앞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천천히 둘러보세요.”
굳게 잠긴 서고의 자물쇠를 가져온 열쇠로 비틀어 연 시종장이 기르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들어서자마자 사방에서 끼치는 오래된 종이 냄새에 기르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황실 서고는 여러 대에 걸쳐 황제들이 모은 장서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학술적, 사료적 가치가 있는 자료를 중시하는 장서관과는 다르게 이곳에서는 황제의 취향이 우선이었다. 젊은 시절 기르는 옥석과 허섭스레기가 뒤섞인 이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당시에도 찾는 이가 많지 않았던 곳이었으나 이 해묵은 공기를 보아하니 한동안 방문한 자가 아예 없었던 듯싶다.
다음 교대는 아침이라 안을 둘러볼 시간은 충분했다. 깊은 어둠에 잠겨있던 서고가 기르가 치켜든 촛불 빛에 오래 묵혀든 속살을 조금씩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못 보던 책장이군.’
익숙한 물건들 사이에서 낯선 책장을 발견한 기르가 걸음을 멈췄다. 장수하며 오랜 기간 제국을 통치했던 황제답게 형이 남긴 자료는 방대했다. 사냥 취미를 즐겨 사냥개와 매를 길들이는 방법을 서술한 책이 수십 권에 이르렀으며 호색한이었던 성벽을 증명하듯 춘화집의 권수도 어마어마했다.
음탕한 이야기를 담은 제목 없는 책들의 일렬에 고개를 내젓던 기르의 시선이 아래 칸으로 내려왔다. 그도 세월을 이길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나이 들어 부실해진 아랫도리를 보완할 셈이었는지 정력을 보완하는 방법을 담은 몇 권의 책 옆에 기르가 찾던 의학서들이 놓여 있었다.
대부분은 그가 이미 읽었던 책들이었으며 나머지는 읽을 가치조차 없는 허무맹랑한 민간요법을 담고 있었다. 이런 불확실한 정보에까지 기대어 영생을 누리고자 했던 형의 아둔함이 절로 한숨이 터져나왔다.
‘시간만 낭비했군.’
아직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몸을 일으키던 기르의 발 앞에 무언가 둔탁하게 밟히는 것이 있었다. 다른 책을 꺼낼 때 함께 밀려나왔다가 제 무게를 이기치 못하고 떨어진 모양이다.
기르는 표면이 낡아 삭기 시작한 책을 들어 불빛에 비추었다. 책을 이루는 종이 또한 낡아 누렇다 못해 갈색빛을 띠고 있었는데 담겨진 내용은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지금은 사어가 된 고대문자가 왼쪽에 적혀 있었으며 오른쪽에는 그 해석이 담겨 있었다. 제국인들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건국설화였다. 영광된 신의 후손 운운하는 낯 뜨거운 문장을 시큰둥한 표정으로 넘기던 기르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그대 필멸자여, 죽고자 하면 살 것이며 살고자 하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흔한 격언이었으나 이어지는 다음 장은 찢겨나가 있었다. 앞이 잘려나간 문장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그리하여 그대, 죽음에서 돌아와 다시 한번 생을 누리리라.」
영생과 회춘을 논하던 책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는 내용이다. 그렇게 장수하고도 죽기 싫었던 모양이지? 잘려나간 페이지에 적혀 있을 내용 또한 뻔했다. 허무맹랑한 치료법이었겠지. 효과가 없자 분노한 형이 찢어 버렸거나 반대로 효험이 있다 믿어 다른 이가 보지 못하도록 감춘 것일 게다.
이토록 생에 집착하고도 떠나가게 된 형이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온 자신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쓴웃음을 짓던 기르가 소득 없이 서고의 문을 열고 나왔다.
“저하, 찾으시던 것이 있었습니까?”
경비병이 사라진 복도를 채우느라 오래 홀로 서 있었던 시종장이 기르를 반갑게 맞이했다. 나이가 예전 같지 않다며 허리를 두드리는 그를 바라보며 기르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와 보니 반갑더군. 가끔 창문은 열어 두는 게 좋겠어.”
“워낙 찾는 이가 없다 보니 신경을 쓰지 못했네요. 앞으로는 아랫것들을 시켜 환기를 철저히 해 두겠습니다. 언제든 다시 보고 싶으실 때 말씀해 주십시오.”
“고맙지만 한동안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아. 그 사이 프리아를 잘 부탁하네.”
알훼니아 행에 마음을 굳힌 기르가 심란한 표정으로 기르에게 당부했다.
“떠나신다고요? 오신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는데요? 어디로 가십니까?”
“알훼니아에 잠시 다녀오려 하네. 마차보다는 빠른 말을 갈아타며 다녀오고 싶은데 노자를 좀 준비해 주겠나?”
“준마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시중들 아이도 빠릿빠릿한 녀석으로 찾아보겠습니다.”
“시종은 되었네. 없이 살아온 세월이 더 길어.”
시종과 호위는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이라며 기르가 손을 내저었다. 다른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비병들을 서고 앞으로 돌려보낸 시종장이 문밖까지 기르를 배웅나왔다.
“꼭 돌아오시는 거지요? 나이가 들고 보니 이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종장이 먼저 세상을 떠난 지인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감상에 젖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혀를 찬 기르가 불이 꺼진 본궁의 어느 장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몸이 좋지 않아 먼저 돌아왔다던 시녀 아이가 프리아는 오늘 본궁에 머물 것이라 전했다. 한때 절제 없는 향락에 젖어 있던 선황의 침실에 프리아가 머문다고 하니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돌아올 것이니 걱정 말고 자네는 어린 놈이나 단속해. 우리 애는 손끝 하나 다쳐서는 아니 되네.”
“혈육인데 참 야박하게 구십시다, 저하. 우리 폐하가 얼마나 프리아 님을 아끼시는데요. 다녀오시는 동안 편견을 좀 떨쳐내고 오십시오. 좀 따뜻한 눈으로 지켜봐 주세요.”
등잡이 시종도 마다한 기르가 꼿꼿한 걸음으로 등불을 든 채 걸어나갔다. 그 정정한 모습을 부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시종장이 졸린 표정으로 하품을 했다. 어느새 어둠이 흐려지고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황제의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몇 시간이라도 어서 눈을 붙여야 할 것이다.
온실에서 중단되었던 정사를 보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오웬은 프리아의 몸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진득하다 못해 끈질긴 애무에 녹아 버린 프리아가 연신 채근해 오는 오웬의 몸짓에 달뜬 숨을 내쉬며 몇 번이고 몸을 열었다.
결국 지쳐 손 하나 까닥할 수 없게 된 프리아의 몸을 오웬이 젖은 수건으로 닦아냈다. 반쯤 잠이 든 프리아의 몸에 제 침의를 입힌 오웬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곁에 누웠다.
“체력이 너무 부족하단 말이야.”
뭘 먹여야 이 마른 몸에 보기 좋게 살이 오를까. 마치 부모라도 된 심정으로 오웬은 잠이 든 프리아를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여성편력이 심했던 조부를 오웬은 경멸했지만 그가 가꾼 온실 덕분에 프리아가 즐거웠다고 생각하니 잠시 고마운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오후 정무시간이 되어 자신이 자리를 뜬 뒤에도 프리아는 온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시녀 아이 하나를 데리고 온실을 구석구석 살펴보더란 말을 시종장에게 전해 들었다. 사람들이 새를 새장에 가두는 심정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안전한 곳에 두어 보살피고 싶은 마음이었겠지. 잠든 프리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오웬도 어느새 잠이 들었다.
어둠이 조금씩 가시기 시작할 무렵, 숨죽인 신음소리가 침실에서 흘러나왔다.
‘어째서.’
발작이 일어나 약을 먹은 것이 바로 어젯밤의 일이다. 고작 하루 만에 다시 발작이 일어날 정도로 몸 상태가 악화된 걸까. 프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조금씩 몸을 일으켜세웠다. 곁에 잠든 오웬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기에 느릿하게 움직였다. 침대에서 벗어나 바닥에 몸을 내딛을 때까지 몇 번이나 신음이 새지 않도록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이런 모습을 오웬에게 보여 줄 수는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몸을 숨길 곳을 찾던 프리아가 욕실로 향했다. 삐이 하는 이명이 들린다. 눈앞이 빠르게 흐려졌다.
‘전조 증상이 나타나면 그곳이 어디든 쓰러져도 다치지 않도록 평평한 곳을 찾으십시오. 방 안이라면 가구가 있는 곳을 피해 의자에 앉으시고 밖이라면 바위나 돌이 없는 풀밭에, 가능하면 그늘로 몸을 피하세요.’
어린시절 갑자기 의식을 잃는 일이 잦아 머리가 깨지는 부상을 입곤 했던 프리아에게 기르는 기절에 대비하는 요령을 알려 주었다.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다가 다시 정신이 들 때를 기다리는 것이 좋았겠지만 오웬이 곁에 있으니 그리할 수 없었다. 의식을 잃은 동안 심하게 코피를 쏟거나 각혈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빈 욕조에 앉아 몸을 구부린 프리아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토할 것 같이 속이 울렁거렸으나 구토가 나오지는 않았다. 식은땀이 배어나와 더욱 차가워진 손을 프리아는 맞잡아 문질렀다. 다행히 지난밤보다는 고통이 덜했기에 욕실까지 무사히 걸어올 수 있었다.
욕실 창 밖으로 밝아오는 새벽하늘이 보였다. 날이 점차 짧아지고 있어 오웬이 일어날 시간이 가까워졌다.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눈앞에 다시 어둠이 내리고 빠르게 의식이 날아갔다.
미소를 지으며 깨어난 오웬이 제 옆에 잠들어 있을 프리아의 모습을 찾았다. 옆이 비어 있다. 이불속으로 손을 넣어 더듬어 보았으나 여전히 잡히는 것이 없었다.
“프리아?”
먼저 일어났나. 오웬이 잠이 덜 깬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아직 불이 남아 있는 벽난로 앞 의자와 벽 앞에 붙은 장의자 위를 더듬던 시선이 침실 너머 내실로 향했다. 일어나 내실로 가 보았으나 그곳에도 프리아의 모습은 없었다.
‘설마.’
또 창문을 타고 나간 건가?
침실로 돌아와 닫혀 있는 창문을 올려다본 오웬이 빠르게 욕실로 향했다. 이곳에 없다면 밖을 나가 찾아볼 셈이었다. 욕실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프리아의 모습에 흐려지던 오웬의 얼굴이 욕조를 가리고 있는 파티션으로 향했다.
“……왜 여기서 자고 있는 거야.”
혹시나 싶어 걸어왔던 오웬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빈 욕조 안에 몸을 둥글게 구부리고 잠들어 있는 프리아의 모습이 엉뚱하면서도 참을 수 없을 만치 귀엽게 느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잠든 프리아를 안아 다시 침대로 데려가며 오웬이 중얼거렸다. 어느새 높이 떠오른 해가 방 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