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15)화 (116/237)

프리아의 눈짓을 받은 유디스가 올가를 데리고 온실을 빠져나왔다. 저렇게 화가 난 황제의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 것이라 유디스 역시 눈에 띄게 긴장하고 있었다.

“올가 님, 안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유디스는 정원 의자에 올가를 앉히고 자신도 그 옆에 앉았다. 그 사이 눈물을 그친 올가가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프리아 님의 심기를 거슬렀나 봐요.”

“프리아 님이요? 여간해서는 화를 내시지 않는 분이신데요?”

뒤늦게 도착해 분위기를 다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유디스의 눈에는 화가 난 사람은 프리아가 아니라 황제로 보였다. 폐하보다 프리아 님을 더 우선시해서 그런 걸까? 유디스는 우선 올가를 달래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두 분을 방해하지 않도록 숨어서 유디스 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프리아 님이 절 발견하셨어요.”

“올가 님을 보신 것만으로 화를 내셨다고요?”

“그것이… 두 분께서 내밀한 시간을 갖고 계시던 중이라…….”

말끝을 줄인 올가가 유디스의 시선을 피했다. 옷차림이 흐트러져 있던 황제와 프리아의 모습을 떠올린 유디스가 말하지 않아도 짐작되는 사정에 얼굴을 붉혔다.

“아, 그래서 프리아 님께서 놀라셨던 거군요.”

그래서 폐하께서 화가 나신 거로군. 자초지종을 알게 된 유디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올가에게 말했다.

“올가 님도 많이 놀라셨겠어요. 그래도 오늘 일은 저희가 잘못한 거예요. 두 분만 계실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 드렸어야 했는데 너무 일찍 돌아왔네요. 어쩐지 시종장님이 코빼기도 안 보이시더라고요.”

후궁의 지척에서 시중을 들되 폐하가 오시면 적당한 타이밍에 자리를 피해 드릴 것. 이 간단하면서도 중차대한 임무를 소홀했으니 자신들이 문책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그저 예쁜 곳에서 티타임을 가지시는구나 싶어 부르시면 바로 시중을 들려고 했던 생각이 잘못이었다.

참 어렵기도 하지. 불렀을 때 자리에 없어서도 안 되고 또 불필요한 때에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도 아니 된다니. 이렇게 어려운 임무를 올가 님이 잘 해낼 수 있을까. 유디스가 딱한 눈으로 눈앞의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폐하와 직접 대화를 나누다니. 폐하께서 나를 바라보시며 하문하시고 내 대답을 기다리셨어. 올가는 자신을 쏘아보던 오웬의 검은 눈동자를 멍한 표정으로 떠올렸다. 꽃나무 아래 움직이던 강건한 육체도 떠올랐다. 그 눈과 코와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렇게 환한 얼굴로, 커다란 손으로,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열망해 준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올가의 안에서 그저 충성심이라 자신마저 기만하던 감정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그저 시간대가 어긋난 것뿐이다. 황제의 정부가 될 운명을 타고 났다면 바로 지금이었어야 했다. 사내 후궁과 내가 다를 게 무엇이지? 어째서 신은 잘못된 시간대에 자신을 내려놓았던 것일까. 그 자리에, 그 시간에 놓였던 것이 자신이었더라면.

심지어 사내 후궁은 황제의 과분한 총애를 받고도 등 뒤에서 그를 농락하기까지 했다. 지난밤 다른 사내의 품에 안겼으면서 그 몸을 다시 황제에게 내어주다니. 듣던 대로 아니 듣던 것보다 더 뻔뻔하고도 요사스러운 사내였다.

“예? 뭐라고 하셨죠?”

수석 시녀의 무게를 실감하며 자책하던 유디스가 올가의 말을 흘려들었다는 걸 깨닫고 그녀에게 되물었다.

“프리아 님께서 기르 님과 무척 친하시더라고요. 유디스 님께서 두 분 사이를 잘 알고 계실 듯해서.”

폐하의 질책을 받고 올가 역시 반성한 걸까. 유디스는 전에 없이 프리아 님에 대해 적극적으로 물어오는 올가의 태도가 반가웠다.

“프리아 님께서 어리셨을 때부터 기르 님이 돌봐주셨대요. 두 분께서 워낙 친하시다 보니 저도 가끔 질투 날 때가 있을 정도죠. 그래도 프리아 님께서 궁에 오신 후로는 제가 가장 지척에서 모셨으니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유디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쳐들었다. 적극적인 자세 아주 좋아. 역시 이사벨이 아닌 올가를 자신의 공석에 앉히기로 한 결정은 옳았다.

시녀들을 내보낸 후 본래 자리로 돌아온 프리아가 바닥에 깔린 천에 얼굴을 묻었다. 창피해 견딜 수가 없다. 입궁한 이래 시녀들에게 옷이며 목욕시중을 받게 되는 일이 잦아 벗은 몸을 보이는 일에는 이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벗기만 한 몸을 보여 주는 것과 그 몸으로 다른 벗은 몸과 얽히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 같은 어마어마한 간극이 존재했다.

여동생처럼 생각하던 시녀에게 그런 은밀한 순간을 보여 주었다고 생각하니 끊임없는 수치가 몰려왔다. 아까는 의연한 척 대처했지만 실은 바로 도망가 버리고 싶었다. 돌아가 올가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느니 그냥 이 자리에서 굳어 꽃나무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나을 듯했다.

“그렇게 신경 쓰여?”

몸부림치는 프리아를 지켜보며 입을 다물고 있던 오웬이 결국 입을 열었다. 뭘 저렇게까지 부끄러워하는지. 황제와 후궁이 만났으니 당연히 일을 치를 것이라 생각해야지. 눈치 없이 눌러앉아 있다가 들키기까지 한 시녀들의 멍청함에 오웬은 한숨이 나왔다.

“다 다른 곳으로 보내고 믿을 만한 시녀들을 붙여 줄까? 좀 나이 든 여인들이 좋겠어.”

수행시녀들은 또래로 붙이는 것이 관행이라 해도 그녀들을 관리하는 수석시녀는 관록 있는 귀족 여성이 맡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누구도 사내 후궁이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될 거란 예상을 하지 못했다. 다들 거절했기에 유디스가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수석 시녀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 사정을 짐작하면서도 오웬은 후궁전의 인원 배치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지 못한 시종장을 탓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런 일은 선태후가 나서야 할 일이었으나 어미된 자는 늘 그렇듯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다.

시녀들을 다른 곳으로 보낸다는 말에 프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예상한 대로 그 물러터진 시녀들을 두둔하기 시작했다.

“그러지 마십시오. 다 착한 아이들입니다. 저를 열심히 보필하려다 그런 거예요.”

“더 열심히 보필하려고 웃전의 부부관계까지 참관한 건가?”

오웬의 말에 다시 아까의 상황을 떠올린 프리아가 신음소리를 내며 다시 얼굴을 묻었다. 부부관계라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저렇게 능글맞게 말하니 더욱 부끄러워졌다.

“나 또 심심하게 할 거야? 그러지 말고 우리 새 보러 가자.”

“새요?”

그러고 보니 아까 전부터 새소리가 들려왔던 것 같다. 다른 방에서 신기한 새를 봤다는 유디스의 말도 있었지. 다시 고개를 든 프리아를 오웬이 안아 일으켰다.

“돈 잡아먹는 이상한 놈들이 있더군. 그 방 온도를 높이느라 산 하나가 벌거숭이가 되었을지 몰라.”

오웬의 과장에 프리아의 호기심이 솟았다. 오웬이 잡은 손에 이끌려가며 프리아는 미처 다 구경하지도 못한 온실의 나무와 꽃들을 두리번거렸다. 웬만한 건물의 3층 높이로 설계된 온실은 크고 작은 새장 모양의 방들로 연결되어 있었다. 봄의 숲을 그대로 옮겨온 온실에는 연못은 물론, 시내처럼 흘러가는 수로도 있었다. 졸졸 흘러가는 물소리를 지저귀는 새소리가 압도하기 시작했을 때 가고자 했던 목적지에 도착했다.

유리문을 열자 안쪽에서 후끈하는 열기가 밀려나왔다. 다른 곳이 봄날이라면 이곳은 여름이었다. 이국의 열대식물과 관상용 새를 기르는 공간이었다.

“저 녀석들이야. 돈 먹는 귀신들이지.”

신기하게 생긴 선인장에 멎은 프리아의 시선을 오웬이 어깨를 잡아 돌려놓았다. 프리아의 눈앞에 오색 빛깔을 한 새들이 새장 안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온실을 그대로 축소한 듯한 여러 개의 새장에는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한 새들이 화려한 깃털을 뽐내고 있었다.

커다란 노란 부리를 달고 있는 몸 전체가 붉은 새, 자신의 몸체만큼이나 커다란 꼬리를 매달고 있는 진보랏빛 새, 가슴과 정수리만 붉고 나머지는 까만 작은 새, 새순처럼 연한 녹색 깃털로 몸이 뒤덮였으나 입 주위만 노란 아기 새, 무지개만큼이나 다양한 색을 한 몸에 품고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자그마한 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새들이 종류별로 다른 새장에 모여 있었다.

자기들끼리 모여 지저귀고 있는 작은 파랑새 무리에 프리아의 시선이 멎었다가 그 옆 새장에서 날개를 부풀리고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되풀이하는 화려한 새에게로 옮겨갔다. 날개를 퍼덕이며 두 발을 번갈아 들었다가 땅에 내딛는 새 주위로 동료 새들이 응원하듯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구애하는 거래. 암컷에게 보여 주려고 춤을 연습한다더군. 보아하니 퇴짜 맞은 것 같지만 말이야.”

수컷이 선물로 바친 벌레를 입에 물었다가 뱉어낸 암컷 새가 콧방귀 뀌듯 고개를 쳐들었다. 그대로 뒤로 돌아보지 않고 제 둥지로 돌아간 암컷 새의 뒤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수컷이 여전히 분주한 동작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다 날려 보내고 싶은데 그러면 죽는다고 하더군. 제 고향에 데려다주면 모를까.”

선황이 수집한 열대의 새들은 취급이 까다로웠다. 화로로 불을 때 일정 온도를 유지해 줘야 했으며 습도 또한 지나치게 높거나 낮아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애첩을 데리고 여행을 떠났던 황태자가 가끔 이국의 새를 선물로 바칠 때마다 선황은 크게 기뻐하며 새로운 새장을 주문했다.

황제로 등극하고 나서야 들어올 수 있었던 개인 정원에서 화려한 새 무리를 발견했을 때 오웬은 그저 실소만 터트렸을 뿐이다. 그저 돈이 아깝다고만 생각했다. 처음 보는 신기한 새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린 프리아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으나 오웬은 그런 프리아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빛나는 눈동자를 보고나니 돈 낭비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밥! 밥 줘! 밥 줘! 이 멍청이야!”

옆의 새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프리아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사람의 목소리라기엔 너무 높고 찢어지는 듯한 쇳소리가 섞여 있다. 새장 안에는 까마귀처럼 몸체가 검은 새 한 마리가 부리를 벌리고 있었다. 몸 전체가 검은 까마귀와는 다르게 주홍빛 부리와 발을 지녔으며 뺨과 뒷목주변에도 노란 띠가 둘려 있었다.

“지금 얘가 말한 건가요?”

프리아가 묻는 말에 구관조가 직접 자신의 부리를 벌려 대답했다.

“알렌 말 잘해! 알렌 똑똑한 새야!”

이번에는 쇳소리가 섞이지 않은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신기해 입을 벌린 프리아에게 구관조가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알렌이에요. 알렌은 풍뎅이를 좋아해!”

자신의 재주에 감탄하는 프리아 앞에서 힘껏 가슴털을 부풀리던 구관조를 쳐다보던 오웬이 입을 열었다.

“멍청한 녀석이다. 다른 말은 할 줄 모르더군.”

오웬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구관조가 다시 쇳소리를 섞어 항의하기 시작했다.

“알렌 똑똑하다! 네가 똥멍청이! 똥멍청이! 알렌 폐하에게 이른다! 폐하에게 이른다! 목이 쾅! 단두대에서 목이 쾅!”

할아버지는 죽었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새에게 오웬이 자신의 위치를 다시 상기시켜 주었다.

“폐하는 나고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건 네가 될 거야.”

“반역자다! 반역자가 나타났다! 폐하! 폐하! 반역자가 있습니다!”

병사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굵은 목소리로 외치는 새에게서 프리아의 시선이 떠날 줄 몰랐다. 질투가 난 오웬이 프리아의 얼굴에 가볍게 손을 얹어 자신에게로 돌려놓았다.

“이제 그만 나 좀 보지?”

“새가 말을 하잖아요. 어쩜 저럴 수 있죠?”

아직도 신기한지 다시 프리아의 고개가 새에게로 향했다.

“나도 말 잘해. 다른 건 더 잘하고.”

뒷말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간지러움을 느낀 프리아가 어깨를 움츠리며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너에게 임무를 주겠어. 저 멍청한 새에게 나에 대한 존경심을 가르치도록.”

제가요? 반문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프리아에게 구관조가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여 주장했다. 알렌 똑똑한 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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