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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타 (114)화 (115/237)

아름드리 굵은 나무 한 그루가 가지마다 풍성한 꽃송이를 매달고 있다. 그 나무 그늘 아래 오웬이 서 있었다. 그가 마법을 부린 걸까. 이 계절에 피어날 리 없는 봄꽃의 만개에 꿈인가 싶어 프리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이미 지나가 버린 봄날, 그와 자신은 이렇게 미소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봄꽃보다 더 비현실적인 오웬의 미소에 프리아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나? 왜 서서 쳐다보기만 하는 걸까. 자신을 발견했음에도 움직이지 않는 프리아의 모습을 보며 오웬이 도박하는 심정으로 양팔을 펼쳐보였다. 분명히 좋아할 거라 하더니 어떻게 된 거야? 당황한 오웬이 온실에서의 티타임을 권한 시종장을 문책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어느새 달려오기 시작한 프리아가 오웬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다행히 화는 풀린 것 같다. 온몸으로 부딪쳐오는 프리아의 등에 양팔을 둘러 안아 주면서 오웬이 입술을 끌어올렸다.

밖은 온통 단풍이 지는 계절이거늘 온실 안은 봄날이었다. 온실을 구경한다는 핑계로 올가를 데리고 자리를 떴던 유디스가 여전히 몸을 떼지 못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렇게 좋으실까. 올가 님, 저희 한 바퀴 더 돌고 와야겠어요.”

자신의 팔을 잡아끄는 유디스를 향해 올가가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는 잠시 어지러워 앉아 있어야겠습니다. 두 분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할게요. 유디스 님 다녀오세요.”

“괜찮으세요? 몸이 좋지 않으시면 마차를 불러드릴게요. 먼저 돌아가 계세요.”

올가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고 놀란 유디스가 시종장을 부르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아이 참, 또 어디로 가셨지?

“그 정도는 아닙니다. 잠시 앉아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시종장님을 부르시면 프리아 님도 알게 되실 텐데 폐를 끼칠 순 없지요. 저렇게 사이가 좋으신데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

프리아와 황제가 있는 꽃나무 쪽을 가리키며 올가가 고개를 흔들었다. 올가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유디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넓적한 바위 위에 올가를 끌어다 앉혔다.

“그럼 쉬고 계세요. 저는 밖에 나가 드실 물을 준비해 올게요. 찬물을 드시면 정신이 드실 거예요.”

유디스가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온실 밖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한 올가가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올가가 앉아 있는 곳은 온실 중앙에 있는 인공연못이었다. 바닥을 파 만든 연못 주위로 울창하게 꽃과 나무를 배치했기에 몸이 가려져 황제가 있는 쪽에서는 자신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올가의 눈에는 몸을 붙이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매우 잘 보였다.

“이제 화 다 풀렸어?”

오웬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프리아의 뺨으로 손을 가져갔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오웬의 손길에 몸을 맡기며 프리아가 대답했다.

“화난 적 없는데요?”

“화나서 나 못 들어오게 한 거잖아. 내가 두고 간 건 봤어?”

햇살 아래 빛나던 크리스털 종달새의 모습을 떠올린 프리아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잘 받았어요. 감사합니다, 폐하.”

“왜 폐하라고 해? 우리 둘밖에 없는데.”

둘뿐이라니? 시종장과 유디스와 올가가 분명히……. 그들의 모습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프리아의 고개를 오웬이 가볍게 눌러 자신의 품으로 돌려놓았다. 다과가 준비된 테이블과 의자가 주변에 준비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꽃나무 아래 그늘에 누워 몸을 붙이고 있었다. 바닥에 두꺼운 천을 깔긴 했지만 불편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오웬은 누운 채로 프리아를 자신의 몸 위로 올려두고 있었다.

“눈치가 없으면 궁에선 살아남을 수가 없거든. 둔한건 너뿐이다.”

다들 나갔구나. 한참 전부터 유디스의 종알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는 걸 프리아는 이제 깨달았다.

“그럼 화도 나지 않았는데 나는 왜 못 들어오게 했어?”

프리아의 옷 속으로 손을 넣어 등줄기를 쓸어내리며 오웬이 다시 물었다. 둘밖에 없다고 바로 능글맞아진 오웬의 손길에 눈을 흘기며 프리아가 대답했다.

“어제 감기 기운이 있어서 혹시 옮길까 봐 걱정되어 그랬어요.”

“아팠어?”

프리아의 말에 놀란 오웬이 황급히 옷 속에서 손을 빼내 이마를 짚었다. 걱정으로 바뀐 그의 표정에 마음이 간질거리는 걸 느끼며 프리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괜찮아요. 옮지 않으실 거예요.”

“왜 그런 걸 걱정해? 앞으로는 막아 두지 마.”

프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웬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큼지막한 오웬의 손이 프리아의 얼굴을 다 덮었다. 아기새가 쪼는 것처럼 손바닥에 입술을 갖다 대자 간지러움을 느낀 오웬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네가 하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아서 기다리다 몸이 어는 줄 알았다. 그 새도 원래는 살아 있었는데 얼어 버린 거야.”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억지에 기가 막힌 프리아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오웬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나랑 여기서 살지 않을래?”

본궁에서? 표정으로 묻는 프리아의 질문에 오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 살자. 이제 곧 겨울이 오잖아.”

잠시 망설이던 프리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늘 곁에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아니 되었다. 함께 있다간 병을 들키고야 말 것이다. 기르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도 자신은 백조궁에 머물러야 했다.

“지금이 좋아요. 제가 자주 찾아갈게요.”

프리아의 거절에 입술을 내밀었던 오웬이 조심스럽게 협상안을 내밀었다.

“그럼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자고 가. 오늘부터.”

나머지 엿새는 자신이 찾아갈 생각이다. 국경이 소란스러운 와중에 후궁전에 붙어사는 황제라는 빈축을 듣겠지만 상관없었다.

어제 약을 먹었으니 오늘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고개를 끄덕인 프리아가 입술을 오웬의 얼굴 위로 내렸다.

수줍게 시작한 입맞춤이 농염해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흥분한 오웬이 프리아를 안은 채로 몸을 돌려 자세를 바꾸었다. 프리아의 시야가 온통 오웬으로 가득 찼다. 아찔한 꽃향기에 휩싸여 몇 번이고 숨결이 젖은 입술 사이를 왕복했다.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오웬이 성마른 손길로 프리아의 옷을 끌어올렸다. 드러난 배꼽에 입을 맞추며 위로 올라오던 입술이 흰 피부 위로 솟아난 연분홍빛 돌기를 머금었다. 몸을 가누지 못해 휘적거리던 프리아의 발끝이 저도 모르게 꽃나무 기둥을 힘껏 차올렸다. 꽃잎이 순식간에 떨어져 바닥을 덮었다. 꽃잎은 오웬의 어깨로, 프리아의 가슴으로 떨어졌다. 달아오른 피부 위로 떨어져 있는 꽃잎을 손가락으로 헤치며 오웬이 그대로 입술을 움직였다. 사방이 온통 꽃이었다.

애무를 멈추지 않으면서 오웬이 손가락을 허리로 넣어 하의마저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프리아는 숨을 헐떡이며 달아오른 뺨을 바닥에 갖다 댔다. 멍하니 연못가를 바라보던 시선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한 쌍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프리아가 황급히 놀라 진입을 시도하는 오웬의 몸을 밀쳐냈다. 열기에 휩싸인 눈동자가 프리아의 얼굴로 향했다.

“왜 그래? 아파?”

몸을 일으킨 프리아가 바닥에 널려 있던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당황한 입술이 떨리는 목소리를 꺼내놓는다.

“누가, 누가 있어요.”

누가 있다고? 나가지 않은 녀석이 있었나. 불쾌감을 느낀 오웬의 눈동자가 주변으로 향했다. 못 할 짓을 한 건 아니지만 프리아의 성격이라면 더는 진행이 어려울 것이다. 끌어내렸던 바지를 다시 올려입은 오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살피던 오웬의 시선이 수풀이 무성한 연못가로 향했다. 바람도 불지 않는 유리 온실에서 홀로 흔들리는 창포 줄기가 있었다. 그곳으로 성큼 걸어간 오웬이 숨어 있던 인물을 찾아냈다. 차가운 황제의 시선을 받으며 올가가 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떨었다. 프리아의 시녀 중 하나임을 확인한 오웬이 눈썹을 찌푸렸다.

“왜 여기 남아 있었지? 다른 아이는 어디 있느냐?”

“죽,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유, 유디스 님은 밖, 밖에 계십니다.”

“있었으면 들키지나 말 것이지. 불쾌하군.”

“죄, 죄송합니다. 폐, 하, 죄, 죄송…….”

옷차림을 갈무리한 프리아가 뒤늦게 오웬의 뒤를 따라왔다. 부끄러운 꼴을 보여 그대로 숨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시녀가 가벼운 실수 이상의 벌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올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시녀의 모습을 발견한 프리아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왜 여기 있어? 유디스는?”

“유, 유디스 님은, 물, 물을 가지러…. 죄, 죄송합니다. 저, 저는 그러려던, 것이, 아니라…….”

딱한 모습에 프리아가 몸을 숙여 올가를 부축해 일으켰다. 오웬은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올가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런 오웬을 바라보며 프리아가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올가 님! 저희가 안 가 본 방에 신기한 새들이 있어요!”

들뜬 목소리로 등장한 유디스가 발을 멈췄다. 이 분위기는 뭐지? 올가 님은 왜 울고 있고 폐하는 상체 탈의를? 어머, 프리아 님도 단추를 다 잘못 채우셨잖아!

올가를 달래고 있던 프리아가 유디스가 들고 있는 물병을 발견했다.

“유디스, 뭐하고 있어? 물을 줘야지.”

프리아의 지시를 받은 유디스가 황급히 다가와 올가에게 물을 건넸다. 잠시 자리를 비운 것뿐인데 왜 이런 난리가. 어디서도 시종장을 찾을 수 없어 주방까지 다녀왔다. 돌아오던 중에 신기한 새들이 들어 있는 새장을 발견해 잠깐 눈을 팔았던 것이 문제였을까.

“왜 이 아이 혼자 여기 남아 있었던 거지?”

황제의 차가운 시선이 이번에는 유디스에게로 향했다.

“올가 님이 어지럽다고 하셔서 여기 계시라고 하고 저 혼자 물을 가지러 다녀왔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시종장님이 보이지 않으셨어요.”

눈치라고는 없는 것들이로군. 하필 시녀도 꼭 자기처럼 물러터진 것들만 데리고 있단 말인가. 일찌감치 자리를 비킨 시종장에게도 화가 치밀었다. 동작만 빠르면 뭐하는가. 저것들을 데리고 나갔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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