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12)화 (113/237)

정녕 잠든 것인가. 노크 소리를 조금씩 높이던 오웬이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에 몸을 기대고 힘주어 밀자 끼익거리는 소음과 함께 문 앞을 막고 있던 무언가가 밀려나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더 힘을 준다면 그대로 방 안으로 밀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리 생각하며 문을 밀어내던 오웬이 잠시 후 동작을 멈췄다.

이렇게 막아 놓기까지 했는데 억지로 들어가면 싫어하지 않을까. 아니면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가는 쪽이 더 토라지게 만들까. 오웬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본인보다 수십 년은 오래 산 대신들에게 거침없이 호령할 뿐 아니라 각 공국의 대공들이며 국경을 마주한 적들에 이르기까지 무서울 것 하나 없던 그다. 그런데 고작 힘 약한 공국에서 온 사내 후궁 하나가 오웬을 두렵게 만들었다.

한때는 그저 소유물로 치부하며 그가 상처받는 걸 알면서도 무시하고 괴롭혔다. 이제는 그 모든 과거가 후회로 돌아올 뿐이었다. 늘 먼저 등 돌린 사람은 오웬 자신이면서도 프리아가 자신에게서 멀어진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졌다.

지금 당장 방 안으로 들어가 끌어안고 싶은 충동과 더는 그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기로 한 결심 사이에서 방황하며 오웬은 등불도 이미 꺼져 어두워진 통로 앞을 서성였다. 결국 프리아의 의사를 존중하기로 마음먹은 오웬이 들고 왔던 크리스털 조각품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날갯짓하는 종달새의 움직임이 섬세하게 표현된 크리스털 문진은 오웬의 고모인 소피아가 선물로 가져온 것이었다.

혹시 늦게라도 문을 열어 본다면 프리아는 문 앞에 놓인 문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대로 돌아가기는 아쉽고 섭섭해 오웬은 몸소 찾아왔으나 네 의사를 존중해 돌아간다는 어필이라도 남겨두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어떤 표정을 지을까. 좋아할까? 모르는 척 책상 위에 고이 모셔두고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까? 국경의 정세보다 후궁의 반응이 더 궁금해진 자신이 우스우면서도 다시 마주하게 될 순간이 설레 오웬은 콧노래를 부르며 통로 속을 걸어갔다.

* * *

“아니 이게 다 뭐야?”

아침이 되어 프리아를 깨우기 위해 침실로 들어왔던 유디스가 물건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광경을 보고 멈춰 섰다. 본래 있었던 자리에서 밀려난 장식장이 벽 앞에 삐딱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장식장 안에 들어있던 물건들은 지진이 난 것처럼 쓰러져 있거나 밖으로 빠져나와 떨어져 있었다. 지진이 일어났다면 다른 가구 또한 쓰러져 있어야 한다. 또한 이 정도의 커다란 움직임이 일어났다면 한 층 위에서 자고 있던 자신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죠? 도둑이라도 든 거 아니에요? 경비병들은 뭘 하고 있었담?”

유디스의 뒤를 따라 들어왔던 이사벨이 화들짝 놀라며 말을 보탰다.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프리아의 안부부터 확인했어야 했다는 자각이 든 유디스가 커튼이 내려진 침대로 내달렸다.

“프리아 님? 괜찮으세요?”

다급히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눈을 뜬 프리아가 유디스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놀라 입을 열었다.

“유디스 무슨 일이야? 표정이 왜 그래?”

“프리아 님! 간밤에 도둑이 든 것 같아요! 무사하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혹시 어젯밤에 수상한 사람이 들어오는 거 눈치채지 못하셨어요?”

도둑? 눈을 동그랗게 뜬 프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경비병이 상시 보초를 서고 있는 궁에 도둑이라니. 그런 큰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잠들어 있었단 말인가.

“도둑이라니! 너희들은 괜찮아?”

어디 다치지 않았는지 다급히 확인하는 프리아의 눈길에 유디스와 이사벨이 고개를 저었다.

“좀 이상한 도둑이에요. 저 장식장을 털려고 했나 봐요. 그런데 없어진 물건도 없지 뭐예요?”

“물건 볼 줄 모르는 하녀가 한 짓 아니겠어요? 참 간도 크지.”

유디스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장식장으로 시선이 돌아간 프리아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책 몇 권과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를 쳐다보았다. 벽에서 조금 떨어진 채로 삐뚜름하게 서 있는 장식장은 벽에 붙은 장식 패널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패널은 사실 비밀통로로 이어지는 문의 위장이기도 했다.

어젯밤 발작이 일어난 와중에 문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기억이 떠올랐다. 유디스와 다른 시녀들이 보기 전에 치워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다시 잠들었던 것이다.

“아, 저거. 내가 그랬어.”

잠이 덜 깨 멍한 표정으로 덤덤하게 말하는 프리아의 발언에 유디스가 당황했다.

“프리아 님이 그러셨다고요? 아니 대체 왜요?”

“그냥 배치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옮겨 보려고 하다가 그만뒀어.”

“밤중에요? 갑자기?”

“응. 이제 보니까 원래 있던 자리가 나은 것 같다. 돌려놓을게.”

벽으로 향하는 프리아를 유디스가 붙잡았다. 어제 뭘 잘못 드셨나? 왜 이러실까.

“다른 시녀들을 부를 테니 그냥 두세요. 이사벨 님 부탁드릴게요.”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사벨이 유디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유디스가 불러온 시녀들이 들어와 장식장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프리아가 가진 책의 대부분은 내실에 있는 책장에 꽂혀 있었다. 이 장식장에는 침실에서 보기 위해 옮겨놓은 책 몇 권과 크고 작은 장식품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장식품이 놓일 자리를 지시하고 있던 유디스의 눈에 못 보던 책 한 권이 들어왔다. 붉은 벨벳으로 표지를 감싼 이름 없는 작은 책이었다.

“프리아 님 이건 뭐예요? 제목이 없는데요?”

“그, 그, 그거! 레지나한테 빌린 거야! 돌려줄 거야!”

급하게 달려온 프리아가 유디스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들었다. 왜 저렇게 당황하시지? 책에는 통 관심이 없는 유디스가 잠시 입을 내밀었다가 다시 눈길을 장식장으로 돌렸다. 이제 보니 낯선 책 몇 권이 더 꽂혀 있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제대로 제목이 적혀 있었다. 이것도 빌려오신 거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유디스가 제 본분을 다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프리아 님 세수부터 하셔야죠?”

시녀들이 가져온 세숫물로 얼굴을 닦은 프리아가 경대에 붙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조금 창백한가. 거울 위로 지친 표정을 한 흰 얼굴이 비쳤다. 아직은 병색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올가 님이 늦으시네요. 아, 오늘 쉬는 날이라고 하셨지. 인수인계는 내일부터 해야겠어요.”

조잘조잘 떠들며 프리아의 머리를 빗기던 유디스가 거울에 떠오른 낯익은 얼굴에 말을 멈췄다. 돌아가며 쉬는 날이라 나올 필요가 없는 올가가 그 자리에 서 있던 것이다.

“올가 님 왜 나오셨어요? 쉬는 날인 거 깜빡하셨나보다.”

“방에 있어 봤자 따로 할 일도 없어서요. 유디스 님 도와드리려고요.”

“어쩜 친절도 하셔라. 그러지 않아도 올가 님께 부탁드릴 게 있었거든요. 어떻게 알고 오셨을까.”

올가의 말에 반색하며 유디스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특훈은 내일부터 한다 해도 그전에 알려 줄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던 것이다.

장황하게 설명하는 유디스의 말을 흘려들으며 올가는 흘깃 눈길을 돌려 눈을 감고 있는 프리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간밤에 그런 부정을 저질러놓고 태연하게 시중을 받다니. 지척에서 폐하를 농락하는 사내 후궁이 얄미워 평소처럼 눈빛을 갈무리할 수 없었다. 유디스가 한동안 자리를 비운다하니 좋은 기회가 왔다. 순진해 보이는 얼굴 뒤로 감춰둔 민낯을 낱낱이 파헤치고 말 것이다.

아침부터 찾아온 두통에 신음하며 프리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거울에 비친 날선 시선이 프리아를 향해 있었다. 잘못 본 걸까. 두어 번 깜박이는 사이에 낯선 표정은 사라지고 익숙한 얼굴이 거울 위로 떠올랐다.

“올가?”

“유디스 님과 이사벨 님은 의복을 가지러 가셨어요. 두통이 있으시면 민트 차를 준비해 드릴까요?”

“부탁할게.”

주방에 알리기 위해 걸어가는 올가의 등으로 자신을 부르는 사내 후궁의 말이 들려왔다.

“올가, 유디스가 당분간 귀찮게 할 거야. 부담스럽겠지만 적당히 장단만 맞춰줘. 유디스가 없는 동안에는 아침에 깨워 주고 세숫물만 준비해 주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옷도 내가 꺼내 입을 테니까.”

프리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돌아선 올가가 유순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폐하를 뫼시는 분인데 그럴 수는 없습니다. 부족하지 않도록 모시고자 하니 염려 덜어 주세요.”

“정말 그럴 필요 없어.”

“프리아 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면 제가 폐하께 꾸중을 들어요.”

완강한 올가의 말에 할 수 없이 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편한 대로 해.”

올가가 내실을 빠져나간 후 프리아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이야 유디스의 인형놀이에 익숙하게 어울려주지만 입궁 초기에는 여자 아이의 시중을 받는 것이 불편해 거부의사를 보였다가 한동안 실랑이를 해야 했다. 어린 시절 길러 준 유모 외에는 가까이한 여시종이 없었던 탓이었다.

귀족의 자제에게는 대개 또래의 남시종이 곁에서 시중을 들기 마련이었지만 요청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형님들과 대면한 후에는 사내시종이 배정되었으나 툭하면 그를 떼놓고 기르와 함께 채집여행을 다니곤 했다.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기르의 지론이었던 것이다.

재회한 후 유디스의 정성스러운 시중을 받고 있는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기르의 시선에 프리아는 낯이 뜨거워졌다. ‘후궁이 되셨으니 어쩔 수 없지요.’ 어쩐지 재미있어 보이는 표정으로 하는 기르의 말에 프리아가 불만스레 입술을 내밀었다.

그나마 기르가 늦게 와 여장을 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다행이었다. 초야에 유디스의 소원을 들어주느라 한 번, 또 오웬의 간호를 하러 본궁에 갔을 때 부인들의 기세에 밀려 할 수 없이 여인의 복색을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평생 잊지 못할 민망한 기억이었다. 정작 오웬은 프리아가 어떤 차림을 하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어제 다녀갔을까.’

어느새 버릇처럼 오웬을 생각하던 프리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 성격이라면 문을 막아 두었어도 강제로 밀고 들어왔을 것이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벽 앞으로 걸어간 프리아가 패널에 숨겨진 손잡이를 당겨 열었다.

어두운 공간에 빛이 쏟아졌다. 무언가 아래에서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허리를 굽힌 프리아의 눈에 낯선 물건 하나가 들어왔다. 창공으로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날갯짓하고 있는 종달새 조각상이었다.

“너 뭐니?”

손바닥 위로 올려 이리저리 살피면서 프리아가 중얼거렸다. 문진 용도로 제작된 크리스털 장식품이었다. 이런 걸 놓고 갈 사람은 오직 한 명 오웬밖에 없다.

“귀여워.”

투명하게 빛나는 크리스털 단면이 미소 짓는 프리아의 얼굴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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