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11)화 (112/237)

어디선가 들려온 둔탁한 소음에 올가의 눈이 뜨였다. 무슨 소리일까. 올가는 숨을 죽이고 소리의 행방을 알기 위해 고개를 들어올렸다. 잘못 들은 걸까. 한참 귀 기울여 보아도 소리는 더 들려오지 않았다. 여전히 방은 어둡고 사방은 고요할 뿐이었다.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을 때 올가의 귓가로 무언가 바닥을 스치는 듯한 정체불명의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올가의 침실이 있는 2층에는 사내 후궁이 쓰는 침실과 응접실을 비롯한 내실들이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내 후궁의 내실과 가까운 곳에 주치의가 쓰는 방이 있었으며 복도를 사이에 두고 멀찍이 떨어진 곳에 올가를 비롯한 몇몇 시녀들이 쓰는 방이 있었다.


백조궁 입주를 마치고 방을 정할 당시 유디스는 널찍한 3층의 방을 권했으나 올가는 굳이 고집을 부려 2층에 남았다. 황제가 사내 후궁의 침실을 찾았을 경우를 생각해,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사벨의 말처럼 황제의 눈에 띄어 침전에 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선황과는 육체관계를 맺지 않았기에 자신의 몸은 순결했지만 그래도 한때 정부였던 자신이 선황의 손자에게 사특한 마음을 품을 수는 없었다. 황제 오웬을 향한 자신의 마음은 그저 순수한 충정일 뿐이었다. 말이 정부지 그저 잠자리를 데우는 탕파나 다름없던 시절을 견디던 그때, 문안인사를 올리고 돌아가는 오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짧은 순간만이 유일한 위로가 되어 주었다.


‘올가 님, 저는 늘 오웬이 걱정됩니다. 어서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을 황후로 맞아 후계를 이어야 할 텐데요. 조카도 저렇게 예뻐하는데 제 아이를 낳으면 얼마나 기뻐하겠어요?’


늘 스스로가 부끄럽고 자신이 없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를 알아봐 주고 궁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도와준 유일한 사람, 린드가르트의 말에 올가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오웬이 가까이 한다는 그 사내 후궁은 어떤 사람일까요? 저는 자꾸 노파심이 듭니다. 아버님의 정부였던 그 사내와 같은 곳 출신이라지요? 그 사내는 행실이 좋지 못해 어머님께도 큰 근심을 안겨 주었던 사람이었어요. 뜬소문들뿐이라 진위는 알 수 없겠지만 저는 오웬이 상처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린드가르트의 염려를 덜어주기 위해 사내 후궁의 시녀를 자처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올가의 눈에 사내 후궁은 욕심이 없는 이로 비쳤지만 그렇다고 환영할 만한 인물로 보이지도 않았다. 자신의 주제를 생각해야지.


황제에게 있어 남첩이란 별미 같은 즐거움이어야지 주식이 되어서는 곤란했다. 그저 예쁘기만 한 얼굴로 다른 후궁들의 기회를 빼앗는 줄도 모르고 웃기만 하는 프리아가 그녀는 한심하게 느껴졌다. 진정 황제를 아낀다면 그에게 도움될 수 있도록 나설 때와 빠질 때를 구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귀에 거슬리는 소음이 벽을 마주하고 있는 다른 방이 아니라 복도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는 걸 알아챈 올가가 살그머니 침대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방문을 살짝 열었다. 어두운 복도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누구지?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올가가 눈을 가늘게 떴을 때 형체 앞의 방문이 열리고 촛대를 든 사내가 나타났다. 알훼니아에서 왔다는 사내 후궁의 주치의였다.


“프리아!”


사내의 말을 듣고서야 올가는 문 앞에 있던 사람이 사내 후궁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사내가 황급히 내려놓은 촛불 빛에 후궁의 금빛 머리칼이 드러났다. 후궁이 뭐라 말했는지는 목소리가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다음 순간 사내가 후궁을 안아들었다. 사내의 품에 몸을 맡긴 후궁이 문 안쪽으로 사라지자 복도에는 다시 어둠이 찾아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후궁이 그간 다른 사내와 통정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것도 제 고향에서 불러들인 사내와. 후궁과 사내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고 들었다. 제 지위가 안정되었다고 생각해 앙큼하게 정인까지 데려온 것인가?


올가는 자신의 방에서 나와 사내의 방 앞으로 향했다. 문 아래로 촛불 빛이 흘러나온다. 두런두런 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문에 귀를 갖다 댔지만 목소리가 크지 않아 대화를 판별하기는 어려웠다. 사내 후궁이 정말 그 순진한 얼굴로 폐하를 속이고 정인과 놀아나고 있는 걸까. 수시로 정을 통하기 위해 몸을 보살핀다는 핑계로 정인의 처소까지 가까이 마련해 놓은 건가.


통정이 사실이라면 눈감아줄 생각은 없다. 그러나 자신이 증언한다 해도 모함이라 우긴다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부인하지 못할 증거를 잡아야 했다.




“아가, 조금만 버티거라.”


고통에 몸부림치는 프리아를 침대 위로 내려놓은 기르가 서둘러 약상자를 꺼내들었다. 둥근 약통에서 보라색이 감도는 환약을 한 알 꺼내 프리아의 입 안으로 넣은 기르가 작은 칼을 들어 촛불에 달구었다. 달군 단도를 프리아의 손으로 가져가 엄지손톱 밑을 찌르자 금세 살이 찢어지며 검은 피가 솟아나왔다.


고통이 역력한 프리아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던 기르가 한숨을 쉬며 약 한 알을 더 꺼내들었다. 프리아에게 약을 먹인 지 아직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다. 기르의 계산대로라면 한 알이면 보름을 충분히 버틸 수 있어야 했다.


팔다리를 주물러주는 기르의 손길에도 진저리를 치던 프리아는 약을 한 알 더, 총 세 알을 먹이고 나서야 몸을 늘어뜨리며 눈을 감았다. 드디어 손가락 끝에 맺힌 피가 붉은 빛으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기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르가 제조한 것은 한 알만 먹어도 작은 동물이라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도 남을 독극물이었다. 그런 것을 세 알이나 먹고서야 경련이 잦아들다니. 요즘 들어 몸 상태가 좋아졌다 생각했던 것이 착각이었을까. 이 증상은 일시적인 악화인가. 아니면…….


기르가 암담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얼굴을 묻었다. 주기적으로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던 어린아이가 이 나이까지 살아남은 건 기적이었다. 기르는 그 기적이 가능한 오래 더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어쩌면… 이제 한계인가.


“아니다, 아니야, 아가. 아직 일러.”


탄식하는 음성이 터져나왔다. 오래 골몰하던 기르가 고개를 들었을 때 눈을 뜬 프리아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기르, 나 얼마나 살 수 있어?”


그 얼굴이 꼭 ‘나 죽어?’ 하고 묻던 다섯 살 아이 같아서 기르는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고개를 천천히 흔들며 기르가 답했다.


“제가 신이 아니니 답해 드리기 어렵습니다. 프리아 님, 상태가 갑자기 나빠졌는데 짐작 가는 게 있으신가요?”


기르의 물음에 프리아가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기르가 찬 바람 맞지 말라고 했는데 나 밖에 나갔어. 나가서 돌아다녔어.”


“밖에는 왜 나가셨지요? 이유가 있었습니까?”


“오웬을 보러 갔어. 보고 싶어서.”


천진하고도 순수한 이유에 기르의 가슴이 아려왔다. 고작 좋아하는 사람을 보러 갔을 뿐인데 이런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겠지.


“그래서 만나셨습니까?”


“어제는 만났고 오늘은 만나지 못했어. 오늘은 그냥 멀리서 보기만이라도 하려고 간 거야.”


“만나서 어제는 무얼 하셨습니까?”


유순하게 대답하던 프리아가 이번 물음에는 입을 다물었다. 이유를 짐작한 기르가 착잡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면 안 돼?”


이번에는 기르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프리아가 던졌다. 몸 상태가 악화된 이유가 오롯이 잠자리를 가졌기 때문일까. 기르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볼 때는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죠. 제가 오기 전에 약을 얼마나 드시지 못하고 계셨죠? 한 달쯤이라고 하셨던가요?


“응. 그래도 그때는 지금처럼 심하게 아프진 않았어.”


“그것도 원인으로 작용했겠지만 비를 맞고 크게 앓으셨을 때 몸이 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약해진 몸에 한기가 스며든 것이지요. 이제 더 추워질 텐데 몸 관리를 제대로 하셔야 합니다.”


“나 털외투 만들 거야. 두 벌.”


“황제가 사냥한 짐승 털을 준다고 했죠? 무슨 동물이라고 하던가요?”


“은여우라고 했어.”


“프리아 님에게 잘 어울리겠네요. 황제가 좋은 걸 잡았군요.”


몸 상태가 나빠지게 된 원인 중의 하나인 황제를 입에 올리는 프리아의 얼굴에는 사랑에 빠진 자 특유의 설렘이 가득 차 있었다. 오웬을 향한 연심, 기쁨, 슬픔, 괴로움으로 인한 감정의 동요. 그 사랑이 프리아를 죽게 만들 것이다. 스물네 해 동안 겨우 버텨온 육신이 고작 몇 달간의 마음 변화로 인해 빠르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야 겨우 다른 사람들처럼 솔직한 제 마음을 드러내며 살고 있는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행복을 누리고 있는 아이를 어찌 멈추게 할 수 있겠는가. 고작 1, 2년을 더 보장받기 위해 이제 와 다시 무덤덤하게 살아가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당분간 복욕량을 늘리며 상태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음부턴 설렁줄을 당기세요. 힘들게 나오지 마시고.”


“아, 설렁줄. 생각도 못하고 있었어.”


괜히 고생했다 싶은 프리아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런 프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기르가 몸을 부축해 일으켰다.


“이제 돌아가셔야 합니다. 누가 보면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요. 잘못하다가는 제 목이 날아가게 생겼습니다.”


자신을 노려보던 오웬의 매서운 눈매를 떠올리며 기르가 엄살을 부리자 프리아가 소리 내며 연달아 웃었다.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오해지. 어떻게 나와 기르를 두고 그런 생각을 해?”


“사람들은 때론 믿고 싶은 대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지요. 이제 잘 걸을 수 있으십니까?”


“응. 이제 괜찮아.”


넉살 부리는 아이로 돌아가 다리를 흔들어 보이는 프리아를 문밖으로 내보낸 기르가 밤인사를 건넸다.


“그럼 어서 돌아가세요. 저도 쉬어야겠습니다.”


“잘 자, 기르.”


손을 흔들어 보인 프리아가 춤추듯 달려가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기르가 웃으며 자신의 방문을 닫았다. 그러자 살짝 열려 있던 건너편의 문 역시 소리를 내지 않으며 슬그머니 닫혔다.




“프리아, 자? 잠들었어?”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오웬은 당황하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연회에서 이제 빠져나온 참이다. 보고 싶은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왔는데 어찌된 일일까 프리아의 침실로 이어지는 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른 곳에 잘못 찾아왔을 리도 없다. 눈감아도 갈 수 있을 정도로 오웬에겐 익숙해진 길이었다.


“설마 막아 둔 거야?”


나 들어오지 말라고?


문을 열기 위해 애쓰던 오웬이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내고 놀라 입을 벌렸다. 대체 왜?


내가 뭘 잘못했을까. 찻잎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혹은 디저트가? 아니면 공작새 구이가? 어쩌면… 어제 밤에 너무 해서? 그리고 이 문 앞에서 또 해서?


열리지 않는 문을 바라보며 쪼그리고 앉아 있던 오웬이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내가 잘못했어. 문 열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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