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10)화 (111/237)

시간이 왜 이렇게 더디게 가지.

눈을 들어 다시 쳐다보아도 시침은 여전히 숫자 8에 머물러 있다. 만찬은 아직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폐하께서 보내셨다며 커다란 공작새 요리를 들고 왔던 시종관이 소식을 전해주었다.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공작새의 등에는 화려한 깃털이 잔뜩 꽂혀 있었다. 암컷 앞에서 날개를 펼쳐 구애하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된 요리에 시녀들의 감탄사가 터졌다. 조리 전 깃털을 뽑아 씻어 말려 두었다가 다시 꽂아 장식해서 내놓는 대표적인 만찬 요리 중의 하나였다.

간만에 입맛이 돌아 평소보다 많은 양을 먹고 말았다. 들고 있던 책에도 영 집중할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난 프리아를 유디스가 쳐다보았다.

“프리아 님,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아니야, 나 밖에 좀 다녀와야겠어.”

“이 시간에요? 어딜 가시려고요?”

“소화가 잘 되지 않아서 좀 걸으려고.”

빠른 걸음으로 벌써 내실을 빠져나가는 프리아의 뒤를 시녀들이 따랐다. 어느새 행렬이 된 무리에 당황한 프리아가 손을 들어 그녀들을 제지했다.

“잠깐 산책 좀 하려는 건데 왜 다들 따라 나와?”

“프리아 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일이 없으신 분들은 각자 방으로 돌아가 쉬셔도 괜찮아요.”

눈치 빠른 유디스가 휴식령을 내려 시녀들을 돌려보냈다. 부리는 이들이 늘어난 후에는 총애받는 후궁의 행차라는 걸 과시하듯 여러 명을 동행시키던 유디스였지만 가끔은 이렇게 프리아와 둘이서 예전처럼 오붓하게 산책하는 것도 좋았던 것이다.

“프리아 님 안색이 정말 좋아지셨어요. 요샌 산책도 자주 하시고 식사량도 늘어나셔서 저는 정말 기뻐요.”

“내 안색이 그렇게 안 좋았었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프리아가 하는 말에 유디스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지금이 무척 보기 좋으시다고요. 크게 앓으신 후로는 기운이 없어 보이셔서 걱정했거든요. 그런데 프리아 님 지금 저희 어디로 가는 거예요?”

어느새 정원을 빠져나와 호수가도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이 앞은 숲뿐인데? 유디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프리아에게 행선지를 물었다.

“어?”

너무 멀리 나왔나. 발길 닿는 대로 걷고 있었던 프리아가 유디스의 물음에 그제야 주위의 풍경을 인식했다. 숲이 시작되는 입구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었다. 한 쪽은 산으로 오르는 길 그리고 다른 한 쪽은.

“본궁에 가시려고요?”

본궁으로 향하는 마차길이었다. 프리아가 멈춰 서자 길잡이 등불을 들고 따라왔던 시종 또한 멈춰서 행선지를 지시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걸어가기엔 너무 멀까?”

여기까지 온 이상 가 봐야겠다 마음을 굳힌 프리아가 유디스의 눈치를 살폈다. 어머나. 잠시 당황했던 유디스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소화시키려면 더 걸어야죠. 사실 뭐 그렇게 멀지도 않고요.”

길이 어둡긴 하지만 시종도 데려왔겠다. 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래 걷게 될 줄 알았으면 겉옷을 더 챙겨올 걸 하는 아쉬움이 있었으나 오늘 저녁은 다행히 적당히 선선해 걷기에 딱 좋았다.

“그렇지?”

유디스의 찬성에 프리아의 입이 귀에 걸렸다. 만찬중이라 만날 수 없을 테지만 오웬이 있는 본궁을 밖에서 바라보기만이라도 하고 싶었다.

저렇게 좋으실까. 하루 종일 기다리시다 못해 직접 찾아가기까지 하시고. 폐하가 조금만 덜 바쁘셨으면 좋았을 텐데. 나라에서 가장 귀한 이는 신분만큼이나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었다. 함께할 수 없는 아쉬움을 담아 티타임과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보낸 황제의 선물은 프리아의 마음뿐 아니라 유디스의 마음까지 설레게 했다.

덩달아 간질간질해진 마음을 다스리느라 애써 입술을 아래로 내리고 있던 유디스에게 프리아가 말을 건넸다.

“리브론은 잘 지낸대? 혼인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함께 응접실에 모여 있던 오후, 유디스에게 보내는 리브론의 편지가 도착했다. 약혼을 이유로 사임했지만 시녀로 일하는 동안 유디스와 친하게 지냈던 리브론은 종종 편지를 보내오곤 했다.

“네. 다음 달에 혼인한대요. 결혼식에 오라는 초대를 받았는데 시간이 여의치 않아 아쉽지만 거절하려고요. 괜찮으시면 프리아 님께 축하 편지 한 통 부탁드려도 될까요? 선물과 함께 보내려고요.”

틈만 나면 유디스와 함께 경쾌한 수다를 터트리던 밤색 머리 소녀의 얼굴을 떠올린 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써 줘야지. 내 선물도 함께 유디스가 가지고 가. 직접 가서 결혼식도 보면서 축하해 줘.”

“제가 없으면 프리아 님 시중은 누가 들어요? 수석 시녀는 함부로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답니다.”

코를 높이 들어 보이며 유디스가 잘난 척을 했다. 황제에게 국정을 돌볼 의무가 있는 것처럼 수석시녀에게는 모시는 후궁이 편히 지내도록 돌봐야 할 막대한 의무와 책임이 있었다.

“언젠가 유디스도 혼인을 해야 할 텐데? 이번 기회에 가서 보고 와. 좋은 사람 없나 좀 찾아보고. 마음에 들면 리브론에게 소개시켜 달라고 해.”

“아이 참, 저희 아버지처럼 잔소리하시기예요? 저는 프리아 님의 곁에 오래 있을 터인데.”

휴가 기간 동안 혼인하라 들볶았던 부모의 잔소리를 떠올리며 유디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백작 부인이건 자작 부인이건 아직은 누군가의 부인으로 불릴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올가랑 이사벨도 있고 다른 시녀들도 있잖아. 걱정 말고 다녀와. 꼭 다녀와. 이건 명령이야.”

“아이, 너무 멀단 말이에요. 하필이면 약혼자 영지가 그 먼 서쪽 끝에 있다고 하니 가는 데만도 열흘, 돌아오는데 또 열흘이 걸리고 도착해서도 연회다 뭐다 해서 일주일은 있어야 하니 근 한 달이나 자리를 비워야 하는 걸요. 그럴 순 없어요.”

프리아 님의 얼굴도 한 달이나 못 보게 되잖아요. 울상 짓는 유디스를 프리아가 토닥여 달랬다. 유디스에게 좋은 혼약자를 찾아 주는 것이 프리아에게 남은 유일한 과제였다. 겨울이 오면 유디스는 열일곱이 된다. 혼인하기에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나이였다. 친한 친구가 혼인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 프리아는 진지하게 설득에 힘을 주었다.

“그래도 한때 내가 데리고 있었던 아이인데 인편에 편지 한 통 보내는 건 너무 성의 없잖아. 다들 내가 무정하다 생각할걸? 그건 유디스도 싫지? 유디스는 나를 대신해서 가는 사절이 되는 거야. 나 요즘 몸 상태도 좋아서 걱정할 것 없어. 올가와 이사벨에게 할 일을 잘 알려 주고 가면 되잖아. 겨우 한 달인데 뭐. 무슨 일이 있겠어?”

유디스는 프리아의 설득에 넘어가 덩달아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리브론의 가문에서도 기대하는 게 있을 텐데 편지와 선물만 달랑 보낸다면 무정한 후궁이라 뒤로 떠들어 댈지도 모른다. 잘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프리아 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나쁘게 떠들어 대는 건 용납할 수 없어.

“그럼 제가 수석 시녀의 임무를 대신할 수석시녀 대리를 뽑아두고 가겠어요. 이사벨은 불평이 많아 일 많아지는 걸 싫어할 테고 미덥지 못하니 올가 님에게 맡길래요.”

인생 최대의 투표를 하는 것처럼 골몰하던 유디스가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수석시녀인 유디스가 하는 일의 대부분이 자신을 가지고 하는 인형놀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프리아가 나오려고 하는 웃음을 애써 억눌렀다.

“잘 선택했어. 유디스의 결정을 지지할게. 누구도 유디스를 대신할 수 없겠지만 나도 한 달간 잘 참아볼게.”

귀여운 소녀, 새침한 소녀, 조용한 소녀. 제 눈에는 세 명 다 고만고만한 여동생들일 뿐이었지만 프리아는 더없이 감동한 표정으로 유디스의 손을 붙잡아 두드렸다.

“날짜는 좀 남았지만 내일부터 인수인계 준비를 하겠어요. 수석 시녀라는 게 만만치 않은 자리거든요. 특히나 프리아 님은 폐하께서 아끼시는 분이니까 모심에 조금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 되고요. 올가 님이 잘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혹독한 훈련을 해야겠어요.”

“그래, 유디스가 늘 수고가 많아. 내가 고마워하고 있는 거 알지?”

“저는 당연한 일을 할 뿐이에요. 제가 프리아 님의 수석시녀라는 게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아세요?”

그리고 이어진 장대한 수석시녀의 임무에 대한 일장 연설을 들으며 프리아는 어둠이 짙게 내리기 시작한 길을 걸어갔다. 수석 시녀란 무엇인가. 제4장 3절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어느새 본궁 앞에 도착해 있었다.

장대한 건물은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여전히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수많은 창문 가운데 불빛이 모인 곳으로 프리아의 시선이 향했다. 한창 만찬이 벌어지고 있을 소연회장이다.

밤새 함께 있다가 고작 아침에 헤어졌을 뿐인데 프리아는 하루 종일 그가 그리웠다. 맛난 디저트도 공작새 요리도 좋았지만 그래도 오웬을 대신할 순 없었다. 곧 다시 만날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걸음은 저절로 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정말 들어가 보지 않으실 거예요? 시종장님께 알리면 자리를 만들어 주실 텐데. 아니면 다른 곳에서 폐하를 기다리셔도 되고요.”

애틋한 얼굴로 본궁을 올려다보기만 하는 프리아에게 유디스가 말을 건넸다. 그녀의 말을 들은 프리아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이걸로 충분해. 이제 돌아가자. 많이 걸어서 잠이 잘 올 것 같아.”

프리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디스가 하품이 터져나오는 입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마차 타고 가요. 아까보다 쌀쌀해졌어요. 감기 드세요.”

피곤해 보이는 유디스의 모습에 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흔들리는 마차 속 졸고 있는 유디스의 맞은편 자리에서 프리아는 계속 오웬을 떠올렸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그에 대한 마음이 커져가는 것을 프리아는 느낄 수 있었다.

불확실한 미래는 이제 앞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후회할 시간도 망설일 시간도 없다. 후일 홀로 남을 그를 생각하면 이기적인 결심이라는 걸 알지만 더는 이 마음을 멈출 자신도, 방법도 프리아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하루 종일 몸을 움직인 덕분일까. 오후에 낮잠을 자고도 프리아는 어려움 없이 밤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어딘가 그립고도 애틋한 꿈속을 헤매던 중이었다. 갑자기 찾아온 엄청난 통증이 프리아를 순식간에 현실로 잡아끌었다.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심장에서 시작해 온통 배 속을 점령하다가 이윽고 전신으로 퍼진다. 숨을 쉴 수가 없다. 깊은 물속에 빠진 사람처럼 프리아는 팔다리를 휘저어 허우적거렸다. 숨이 목까지 차오른다. 한참 몸부림을 친 끝에 겨우 숨이 터져 나왔다. 겨우 뭍으로 올라온 사람이 땅을 짚는 것처럼 프리아는 흔들리는 발을 간신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오웬이 올지도 몰라.’

오웬이 오기 전에, 그가 이 모습을 보기 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보지 못하도록 통로를 막아야했다. 시야가 온통 흔들린다. 고작 열몇 걸음밖에 되지 않는 그 거리가 아득히 멀었다. 힘겹게 내딛는 발걸음에 식은땀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겨우 도착한 벽 앞에서 프리아는 남은 힘을 쥐어짜 장식장을 밀어 냈다. 선반에 놓였던 물건들이 떨어지며 소음을 만들어 냈다. 다행히 카펫 위로 떨어져 큰 소리가 나지는 않았으나 귀 밝고 예민한 이라면 잠에서 깨어났을지 모를 작지 않은 소음이었다.

“정, 신 차려…….”

제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사지를 독촉하며 프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기르에게 가야 해. 기르가 도와줄 거야. 기르의 방과 연결된 설렁줄을 떠올리지도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남은 힘이 없어 프리아는 땅에 무릎을 기대고 바닥을 기었다. 통증은 그 사이 몇 번이나 몸속을 휘저었다. 오랜만에 겪는 극심한 발작에 눈조차 제대로 떠지지 않는다. 장소가 익숙한 자신의 방이라 정말 다행이었다.

“…기, 기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복도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프리아는 떨리는 손을 들어 문을 노크했다. 그 작은 소리를 어찌 알아들었는지 문을 열고 나온 기르가 눈앞의 광경에 경악했다.

“프리아!”

“……나, 아파.”

몸에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하얗게 질린 프리아가 흐린 시선을 위로 향했다. 황급히 프리아를 안아 든 기르가 방문을 닫았다. 그때 복도 건너편에서 살짝 열려 있던 다른 문 사이로 고개 하나가 빠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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