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09)화 (110/237)

“욕실에 계신 게 아닐까요? 가 보셨어요?”

“네. 이미 가 보았는데 여긴 안 계셨… 어머, 프리아 님?”

이사벨의 말에 못 이기는 척 욕실 문을 열었던 유디스가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 프리아를 발견했다. 아까는 분명히 계시지 않았는데……. 아니다, 내가 잘못 봤겠지. 파티션 안까지 확인하지는 않았으니 가려져서 못 봤던 걸 거야.

“유디스 님, 정원에도 안 계세요. 경비병도 나가시는 걸 보지 못했다고 하시네요.”

사라진 프리아를 찾기 위해 바깥으로 나갔던 올가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돌아왔다. 잘 찾아보지도 않고 소란을 피운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러워 유디스가 두 시녀를 향해 빠르게 손을 휘저었다.

“프리아 님 찾았어요. 욕실에 계시더라고요. 목욕 시중은 제가 들 터이니 먼저 가 계세요.”

아침부터 헛고생했네. 유디스를 향해 샐쭉 눈을 흘긴 이사벨이 먼저 자리를 떴다. 올가 역시 안심한 표정으로 이사벨의 뒤를 따라 내실로 향했다.

“일어나셨으면 저희를 부르시지. 저는 또 프리아 님이 혼자서 폐하를 뵈러 가신 게 아닐까 걱정이 되던 참이었다고요.”

선반에서 향유를 꺼내온 유디스가 뚜껑을 열어 손바닥에 덜어내며 말했다. 촉이 좋은 유디스의 발언에 뜨끔하며 프리아가 달아오른 뺨에 손부채질을 해댔다. 급한 마음에 몸을 닦아 내기 위해 욕실로 달려들어와 몸부터 담근 것이 바로 수분 전이다. 아침 단장을 대비해 시녀들이 미리 목욕물 준비를 해 놓은 덕을 톡톡히 보았다.

“오늘은 일찍 일어나셨네요.”

아침잠이 많아 깨우지 않고서는 일어나지 않는 프리아가 혼자 일어나 있던 것을 신기해하며 유디스가 다시 말했다.

“그냥…, 눈이 일찍 떠졌어.”

젖은 머리카락을 마사지하는 유디스의 손길을 받으며 프리아가 아직 거친 숨을 다스렸다. 미쳤지, 들키면 어쩌려고 문 뒤에서 그랬을까. 좀 전의 격렬한 정사를 떠올리자 유디스의 눈을 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물이 너무 뜨거운 거 아니에요? 앗, 뜨거! 찬물을 좀 섞고 들어가셨어야죠.”

붉어지다 못해 익을 것 같은 프리아의 얼굴을 바라본 유디스가 제 손을 물 안으로 넣었다 황급히 빼냈다. 평소보다 조금 일렀던 목욕 시간 때문에 아직 물이 적정온도로 내려가지 않은 모양이다. 유디스가 찬물이 담긴 양동이를 들어 욕조에 쏟았다.

이렇게 몸이 뜨거운 것은 온수 때문일까, 정사 때문일까. 황홀했던 감각이 사라지지 않고 아직 몸 안에 남아 있었다. 오래 지속되는 여운에 또다시 생각이 지난밤으로, 아침으로, 통로 속으로 향한다.

“프리아 님, 듣고 계세요?”

정신이 다른 곳으로 가 있는 사람처럼 멍하니 물속에 앉아 있는 프리아의 어깨를 유디스가 흔들었다. 오늘 참 이상하시네.

“아, 미안. 방금 뭐라고 했어?”

“올 겨울 입으실 털 외투 이야기였어요. 발목까지 하면 따뜻하겠지만 움직이실 때 불편하실 것 같아서. 정강이 중간까지로 할지, 무릎까지로 할지.”

“뭐든 좋으니까 유디스가 결정해 줘. 아니다, 더 따뜻한 쪽으로 해 줘. 아니야, 움직이기 더 편한 쪽이 좋을까?”

겨울이 오면 통로의 온도는 더 내려가지 않을까. 꽤 걸어야 하니 편의성도 무시하기 어려웠다. 전에 없이 진지하게 옷 디자인을 함께 고민해 주는 프리아의 모습에 유디스가 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

“그럼 아예 두 벌 만들까요?”

“응, 좋아.”

웬일이야. 드디어 프리아 님도 몸단장에 눈뜨기 시작하신 걸까. 입이 귀에 걸린 유디스가 신나게 손을 움직였다.

“제가 했지만 진짜… 프리아 님, 눈이 부셔요!”

평소보다 과해진 차림새에 거울을 바라보는 프리아의 눈이 크게 뜨였지만 곧 표정이 풀어지며 유디스를 향해 웃어 보였다. 오늘 프리아는 지나치게 기분이 좋았다. 이대로 유디스의 손을 잡고 한바탕 춤이라도 추고 싶은 마음이었다.

무도회도 없거늘 웬 법석인가. 이사벨이 혀를 쯧쯧 차면서도 유디스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짜증이 나지만 멋지긴 했다. 후궁 신분만 아니었어도 사교계의 아가씨들 여럿 가슴앓이 하게 할 잘난 모습이다. 이렇게 꾸미고 가는 곳이 기껏해야 호숫가라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뭘 그렇게 보세요?”

어느새 한참 멀어져 버린 프리아와 유디스의 뒤를 느긋하게 따르며 이사벨이 곁에서 걸어가는 올가에게 물었다.

“프리아 님 뒷모습이요. 가능한 다양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봐야 포즈도 쉽게 떠오르거든요.”

올가가 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수첩을 펼쳐 그 안을 보여 주었다. 종이 위에는 프리아의 스케치가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잘 그리시네요. 저는 그림은 잘 모르지만 솜씨가 뛰어나신 것 같아요.”

“실은 유디스 님에게 프리아 님의 그림을 부탁받았거든요.”

“그러셨구나. 폐하께 드리시려는 건가요?”

황제를 언급하는 이사벨의 발언에 올가가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럴 주제까지는 못 됩니다. 그냥 낙서 같은 거예요. 간단한 그림이나마 보여드리면 프리아 님의 마음도 바뀌어 궁중화가를 부르라고 하지 않을까 유디스 님이 기대하시더라고요.”

“아, 그래서.”

제법 타당한 이유에 이사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언젠가 이곳을 그만둔 후, 어디 가서 후궁 직속 시녀였다는 걸 내세우려면 프리아 님의 그림 한 점 정도 받아두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물론 이런 스케치 따위를 받아갈 마음은 없다. 궁중화가가 정식 초상화를 완성하게 되면 허락을 받아 복사본을 받아갈 생각이었다.

“저 좀 다시 보여 주세요.”

말과 동시에 이사벨이 올가의 손에 들었던 수첩을 빼앗아 들었다. 후루룩 넘겨가며 살펴보는 이사벨의 눈에 프리아가 아닌 다른 남성의 스케치가 들어왔다. 수려하게 잘생긴 청년의 얼굴이었다.

“폐하도 그리셨구나. 제 초상은 없어요?”

“그냥 연습 삼아 그린 거예요. 이리 주세요!”

얼굴이 붉어진 올가가 장난치듯 수첩을 머리 위로 올리는 이사벨을 제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뭐 어때요. 좋아할 수도 있지. 폐하께서 유별나신 거지, 예전 같았으면 저희들은 벌써 침전에 들고도 남았을걸요?”

이사벨 역시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사내 후궁의 시녀가 된 것이긴 했다. 이제 와서는 영 가망이 없는 일임을 알고 포기했지만.

“저는 그런, 사특한 마음 같은 건 품은 적이 없습니다! 진심으로 폐하를 존경할 뿐이에요!”

“뭘 그렇게까지 말씀하세요? 사특이라니. 듣는 사람 기분 나쁘게.”

잠시나마 어울려준 자신이 바보였다. 이사벨이 얼굴을 찡그리며 올가와 거리를 넓혔다. 사내 후궁에게 과잉 충성하는 유디스도 짜증났지만 이 여자는 속을 알 수 없어 더욱 찜찜했다. 혼자서 음전한 척은 다 하고서는 음침하게 황제 그림이나 그리고. 기회가 오면 누구보다 앞장 서 침실에 들 거면서 어디서 정숙한 척이야.

황제가 황후의 시녀들에게 눈길을 주거나 황제의 관심에서 멀어진 후궁들이 제 시녀를 이용하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궁중에서는 일상으로 벌어지는 흔해빠진 일이었다. 사내 후궁에게 푹 빠져 다른 곳으로는 눈길도 돌리지 않는 폐하가 별난 것이지 그런 기대를 품는 시녀들이 이상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그걸 염두에 두고 가문과 외모를 따져 고급 시녀로 들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존경이라니. 존경할 게 뭐가 있담. 나랏일이야 어찌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백조궁 안에서는 그저 사랑놀음이나 하고 있을 뿐인데.

“유디스 님! 같이 가요!”

이사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기분 나쁜 여자에게서 황급히 멀어졌다. 의뭉스러운 것들은 딱 질색이란 말이야.

산책에서 돌아온 프리아와 시녀들이 응접실에 자리를 잡았다. 손은 책은 잡고 있지만 시선이 연신 창밖으로 향하는 프리아를 보며 유디스가 소리 없이 웃었다.

“프리아 님, 폐하 기다리세요?”

“뭐? 아니야!”

쓸데없이 강한 부정을 한 프리아가 책을 소리 내어 덮었다. 영 집중을 하지 못하는 것이 책 내용 때문이라는 것처럼 다른 책을 집어 다시 책장을 펼친다.

아까 산책하면서도 목을 빼고 본궁 쪽을 바라보시더니. 정말 속을 숨기지 못하신다니까. 목욕 시중을 들며 보았던 프리아의 몸에 남은 붉은 흔적들을 떠올리며 유디스가 입술을 끌어올렸다. 폐하도 참 열정적이시란 말이야. 폐하와 밖에서 밤을 보내신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한동안 살얼음 같았던 두 분의 사이가 불같이 뜨거워져 있었다.

“티타임 시간에 혹시 오실 수 있는지 사람을 보내 물어볼까요?”

“부르지 마! 나 기다리는 거 아니야!”

소리 내어 책을 덮은 프리아가 빙글거리며 웃는 유디스의 놀림을 피해 침실로 사라졌다. 더 놀리고 싶지만 이쯤에서 멈춰야지. 유디스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기댔다. 이보다 더 평화로울 수 없는 가을날의 오후였다.

“……으흠.”

오웬이 눈치 없이 티타임 시간을 앞두고 방문한 주무대신을 노려보았다. 기다렸던 보고이기는 했지만 왜 하필 지금이란 말인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오웬의 모습을 국정에 대한 근심 때문이라 짐작한 대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입에 올렸다.

“맛이 매우 좋군요. 시종장의 차 우리는 솜씨는 날이 갈수록 좋아집니다.”

“과찬이십니다. 좋은 찻잎이 들어와 한번 우려 보았습니다. 폐하께서도 입에 맞으시는지요?”

자신의 솜씨를 칭찬하는 대신의 말에 시종장이 겸양의 미소를 보였다. 그런 시종장을 삐딱하게 바라보며 오웬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떫어.”

오웬의 말과는 달리 차 맛은 훌륭했다. 백조궁에 가 프리아와 함께 마시려고 준비해 둔 최고급 찻잎이었으니 맛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디저트도 훌륭합니다. 밤알이 굵고 실하네요.”

바삭한 타르트 껍질을 가르자 나타난 시럽 절인 알밤의 크기에 감탄하며 대신이 다시 말했다. 맛있겠지. 저것 역시 백조궁에 가져가려고 주방에 특별히 지시해 만들어 올리게 한 것이었다. 차가운 목소리로 오웬이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했다.

“공이 이렇게 미식가인 줄은 몰랐군. 내 일러둘 테니 챙겨가 가족들에게도 나눠주게.”

“성은이 망극합니다, 폐하. 저희 집 사람이 밤을 좋아하는 걸 어찌 아시고.”

알았겠는가. 어서 꺼져준다면 밤 한 자루를 보내줄 수도 있으련만. 아까운 티타임 시간이 벌써 끝나가고 있었다. 입맛을 다시던 주무대신이 곧이어 두꺼운 서류 하나를 더 꺼내들었다. 일을 잘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오웬의 심기를 거슬려 해고될 뻔했다는 걸 모르고 그는 침을 튀기며 보고를 이어나갔다.

“꼭 만나야 해? 내일 만나도 되잖아.”

골이나 입을 내민 오웬이 카펫이 깔린 알현실의 바닥을 쿵쿵 두드렸다. 주무대신이 떠난 후, 오웬은 숨 돌릴 새도 없이 예정된 알현을 위해 알현실로 내려와야 했다. 시종장이 진땀을 빼며 전에 없이 태업하는 황제를 달랬다.

“아이고, 폐하. 내일은 또 다른 알현이 예정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럼 저녁 만찬을 취소해. 만찬 같은 거 할 기분이 아니야.”

“고모님이신 소피아 공주님께서 어려운 걸음 하셨는데요? 오시라 청한 이가 바로 폐하십니다.”

“그랬던가? 할 수 없군.”

자신이 보냈던 서신의 내용을 떠올리며 오웬이 기운 없이 수긍했다. 당장이라도 백조궁에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거늘 일이 오웬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이래서야 늦은 밤이 되어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 백조궁으로 처소를 옮길까?”

오웬의 입에서 나온 말에 시종장이 기겁했다. 종일 오웬의 마음이 백조궁에 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모르는 척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직구를 던져 온 것이다.

“그, 그건 전례가 없는 일로. 예법상 맞지 않습니다. 선황께서도 황후 이외의 분은 본궁에 모시지 않으셨습니다.”

“안 돼?”

“내일 티타임은 온전히 두 분께서 보내시도록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폐하, 안즈 후작이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았어.”

오웬이 어쩔 수 없이 알현을 이어나가려던 그때, 백조궁에 보냈던 시종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모습에 반색한 오웬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반응이 어떠했지? 좋아하던가?”

티타임에 함께 할 수 없는 대신 찻잎과 미리 준비한 디저트를 시종관 편에 보냈다. 환해진 황제의 얼굴을 보고 난감해진 시종관이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전했다.

“프리아 님께서는 오수에 들어 계시어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시녀들 말로는 깨어나시면 아주 좋아하실 거라 했습니다. ……다시 가 볼까요?”

“됐어. 그만 나가봐.”

한결 우울해진 얼굴로 오웬이 손을 내저었다. 어젯밤에 거의 재우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주무 대신이 아니었다면 괜히 찾아갔다가 낮잠 자는 프리아를 방해할 뻔했다. 황후로 봉해 버릴까.

오웬의 머릿속에 어떠한 생각이 오가는지도 모른 채 안즈 후작이 영명하고 진중한 젊은 황제의 태도에 감탄했다. 오웬은 깊은 밤이 되어서야 업무에서 벗어나 백조궁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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