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08)화 (109/237)

프리아, 이제 일어나. 돌아가야지.

몽롱한 꿈의 자락에 반쯤 감긴 채 프리아는 귓가에서 들려오는 오웬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가볍게 흔들어 깨우는 손길이 귀찮아 돌아누워 버리자 그것마저 귀엽다는 듯 오웬이 머리 위에서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침이야. 또 안겨서 마차로 돌아갈 셈이야?”

잠든 채로 품에 안겨 귀가했던 날을 오웬이 언급하자 프리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날 유디스에게 얼마나 잔소리를 들었던가. 오웬의 장난 덕분에 졸지에 황제가 보고 싶어 창문을 타고 내려와 한밤중에 숲을 가로질러간 후궁이 되어 버렸다. 굳이 따지자면 간밤에 프리아가 했던 일 또한 창문만 통하지 않았을 뿐이지 소문 그대로의 행동이었으나 그 사실을 둘이서만 알고 있는 것과 뭇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하는 것은 크나큰 차이가 있었다.

“일부러 그리하셨던 거죠? 그때?”

“글쎄?”

추궁을 웃음으로 피하며 오웬이 팔을 뻗어 프리아를 제품에 가두었다. 벽난로 앞 바닥에서 시작된 행위는 침대로 옮긴 후에도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창문 밖 하늘에 푸른 기가 섞이기 시작한 후에나 놓아주었기에 프리아는 고작 몇 시간도 잠들지 못한 상태였다.

“내가 백조궁으로 처소를 옮길까? 아니면 네가 다시 이곳으로 올래?”

지난여름처럼 이 다락방에서 함께 살지 않겠냐는 오웬의 물음에 프리아는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랬다간 지금보다 더한 소문이 따라올 거예요.”

“무슨 소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물어보는 오웬의 능글맞은 얼굴을 프리아가 살짝 노려보았다. 그날 아침도 이렇게 깨워 주었으면 될 것을, 입방아에 오를 걸 뻔히 알면서 일부러 요란하게 마차로 데려다준 것이 아닌가?

“그날도 이렇게 깨워 주셨어야죠.”

“내가 깨우지 않았다고 생각해? 오늘도 벌써 몇 번이나 깨웠는지 알고 있어?”

진심으로 억울해하며 오웬이 입을 벌렸다. 아무리 깨워도 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통에 그리했던 것인데 이제 와서 내 탓을 하다니.

“제가 일어나지 못했다면 그건 폐하 탓이죠.”

집요했던 간밤의 정사를 떠올리며 프리아가 눈을 흘겼다. 실은 지금도 허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래서야 제대로 걸을 수나 있을지. 비키라는 것처럼 가볍게 떠미는 프리아의 손길을 받은 오웬이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몸을 굴렸다.

“볼일 끝났다고 이렇게 막 상처를 주네? 난 밤에만 필요하고 막 보고 싶고 그래?”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허리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프리아가 끙끙거렸다. 오늘이야말로 마차가 필요한 날이었으나 안락함 뒤에는 뜬소문이 따라온다는 걸 아는 이상 그리 할 수는 없었다. 바닥에 디딘 발에 간신히 힘을 주며 프리아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낮에도 보고 싶어요.”

“뭐라고?”

듣지 못한 사람이 잘못이지. 두 번 말할 생각은 없다. 멀리 벽난로 앞 바닥에 떨어져 있는 침의를 줍기 위해 느린 걸음으로 움직이던 프리아가 뒤에서 뻗어나온 손에 의해 다시 침대로 끌려들어갔다.

“내가 너무 좋아서 미치겠다고?”

뭐라는 거야. 하도 어이가 없어 벌어졌던 입술이 숨 막힐 듯 쳐들어오는 오웬의 입술에 의해 막혔다. 맞닿은 몸 아래쪽에서 벌어지는 수상한 움직임을 감지한 프리아가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또 했다가는 걸어가지도 못할 것이다.

“데려다 줄게. 마차 말고.”

더 편안한 이동수단으로. 그렇게 말한 오웬이 급하게 다시 프리아의 입술을 덮었다.

대체 어디가 편하다는 거야.

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에 프리아가 오웬의 어깨를 감싼 오른 팔에 힘을 주었다. 남은 팔에는 길잡이 등불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제군, 더 높이 들도록.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부상병을 데리고 막사로 돌아가는 장군처럼 오웬이 딱딱한 말투로 지시했다. 소리 내 말할 수 없는 부위에서 통증이 올라오고 있었으며 한밤 내내 무리한 육체가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기에 부상을 입은 거나 다름없었으나 해를 입한 상대가 적군이 아니라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몸을 잡아 주는 척 엉덩이를 어루만지는 손길을 거부했기에 프리아는 제 힘만으로 오웬의 등에 매달려 있었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양 다리로 허리를 힘껏 감싸야 했는데 오웬은 그것 또한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내려줘요. 걸어갈래요.”

“그 속도로 어느 세월에?”

어기적 걸어가던 프리아의 걸음을 지적하며 오웬이 만류했다. 그 속도로는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백조궁에 도착할 판이다.

“그냥 힘 빼고 자고 있어. 이제 안 만질게.”

엉덩이와 허벅지에 손을 못 대게 하는 통에 갈 곳을 잃은 양손을 들어 보이며 오웬이 말을 덧붙였다. 아니, 오웬의 손이 자유로운데 내가 왜 등불까지 들고 있었지? 억울한 마음에 프리아가 들고 있던 등불을 격하게 흔들었다. 처음에는 오웬의 두 팔이 프리아의 둔부를 지탱하고 있어 등불을 넘겨받았으나 중반 이후로는 이유도 까먹은 채 그저 팔 아프게 들고 있었다.

“어어어어, 위험해!”

시선 가까이서 흔들리는 등불에 오웬이 목소리를 높였다. 놀란 프리아가 손을 멈추자 오웬이 등불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남은 한손은 돌아와 프리아의 엉덩이를 탄탄하게 받쳤다. 편해진 자세에 프리아가 못 이기는 척 고개를 기대며 몸의 힘을 뺐다.

“어제 오후에 바이런을 만났어요.”

“알고 있어. 그 녀석은 만날 사람이 그렇게 많다면서 왜 너에게까지 인사하고 가겠다는 거야?”

자신이 허락한 일이며 동행했던 시종관에게 오갔던 대화까지 전해 들었으면서도 프리아가 말해 주니 기분이 좋아졌다. 오웬의 목소리에 노여움이 없음을 확인한 프리아가 안심하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친구니까 그렇죠. 진짜 친구예요. 여기서 국경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나요?”

“빠른 말을 타고 가도 며칠 이상 걸릴 거야. 마차로는 두 배 이상 걸릴 테고 걸어간다면 더욱 멀겠지.”

알훼니아만큼 멀지는 않구나. 프리아가 마차를 타고 이동했던 그 먼 길을 떠올렸다. 알훼니아는 대륙의 끝에 붙어 있어 제국에 오기 위해서는 여러 공국을 지나쳐 와야 했다.

“걱정돼?”

고요해진 통로에 다시 오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답 없이 프리아가 오웬에게 기댄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하고 올 거야.”

프리아의 침묵을 바이런에 대한 걱정 때문이라 생각한 오웬이 솟아나는 질투심에 입술을 내밀었다.

“내가 떠나도 이렇게 걱정해 줄 거지?”

그걸 말이라고.

실은 바이런이 아니라 오웬 걱정을 하고 있었던 프리아가 제 속도 모르는 둔한 이의 귀를 잡아당겼다.

“이건 무슨 뜻이지? 하지 않겠다는 건가?”

“네, 안 할 거예요.”

그러니 떠나게 되더라도 무사히 돌아와줬으면 좋겠다. 내놓은 답과는 다르게 자신의 어깨를 감싼 프리아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낀 오웬이 입술을 끌어올렸다.

“전쟁터에 애첩을 데리고 갔다는 황제는 없었지만 내가 한번 해 볼까?”

누가 따라간다고. 툴툴거리는 프리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오웬이 장난스럽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선발로 떠난 병사들이 황제 앞에서 노래했던 제국의 군가였다.

“농담이야. 위험한 곳이니까 너는 놓고 갈 거야. 네가 거기 있으면 난 걱정이 되어서 아무 것도 못할 테니까.”

참전을 당연시하는 오웬의 말에 프리아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무리 위험한 곳일지라도 함께 가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은 그저 짐밖에 되지 않을 것임을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프리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한참 걸어 도착한 문 앞에서 프리아를 내려주고도 오웬은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언제든 만나러 올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 잠깐의 이별이 아쉬웠다.

“이제 들어가. 날이 다 밝았겠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을 놓아주지 않고 있는 오웬의 팔을 프리아가 잡아당겼다. 짧은 순간 닿았다 떨어진 입술은 농밀하게 감겨오는 혀로 인해 다시 벌어졌다. 간밤 내 나누었던 수많은 입맞춤이 부족하다는 듯이 입술이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어떻게 참았던 걸까.

그동안 왜 참았던 걸까.

이렇게 좋은 것을.

서로의 숨결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져 프리아는 모자란 숨을 가져올 듯이 오웬의 입술을 잡고 매달렸다. 키스만으로도 머리끝까지 저릿저릿해지는 것 같았으나 만족을 모르는 두 젊은 육체는 어느새 하나로 엉겨붙었다.

문에 등을 기댄 자세로 들어올려진 프리아가 양다리로 오웬의 허리를 옥죄였다. 허리 위까지 말려 올라간 침의자락이 오웬의 복부에 짓눌려 잔뜩 주름이 진다. 거친 움직임에 문이 쿵쿵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프리아 님? 안 계시네. 어디 가셨지?”

문밖으로 새어나온 유디스의 음성에 프리아가 신음을 입 안으로 삼켰다. 이제 그만 멈추고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고집스럽게 다물고 있는 프리아의 입술이 불만스러워 오웬은 손가락을 밀어넣어 강제로 다시 열어놓았다.

“……흣!”

잠깐 새어나온 신음이 방에 들렸을까. 숨을 멈춘 프리아의 입술로 오웬이 집요하게 다시 파고들어왔다.

비밀통로라며? 들키면 안 된다며?

땅에 떨어진 등불 빛이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프리아의 얼굴을 노랗게 비추었다. 토라져도 이렇게 예쁘니 네 탓이야. 얼토당토않은 책임전가를 하며 오웬이 동작에 박차를 가했다.

정사가 끝난 후, 숨을 미처 고르지도 못하고 프리아가 열린 문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중심을 걷어차인 까닭에 오웬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이미 닫힌 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즘 너무 기어오르는데?”

그렇게 말하는 오웬의 목소리에 잔뜩 웃음이 서렸다. 그렇게 하고도 부족해 문 앞까지 와서 또 일을 치렀으니 프리아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 어떤 애정행각을 한다한들 용인되는 황제와 후궁 사이이건만 이렇듯 남의 눈을 피하는 비밀 밤놀이가 오웬은 진심으로 즐거웠다.

벌써 보고 싶어서 어떡하지. 안 되겠다. 차 마시러 와야지. 이따 봐, 프리아. 문 너머의 연인에게 짧은 작별을 고하며 오웬이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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