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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타 (106)화 (107/237)

입궁한 이래 대부분의 시간을 후궁전에서만 보내야 했던 까닭에 제국의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프리아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권력욕이 강한 일부 대공들은 공녀들에게 수시로 편지를 보내 소식을 알렸으나 알훼니아의 요아힘 대공은 그저 프리아에게 안부만을 물어올 뿐이었다.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 거요?”

테이블 아래로 떨리는 손을 감추며 프리아가 바이런에게 물었다. 다정한 말투로 프리아를 안심시키며 바이런이 답했다.

“국경 지역에 사소한 분쟁이 발생하는 건 늘 있었던 일입니다. 다만 이웃나라에 새로 등극한 왕이 조금 호전적인 성격이라서요. 다른 대신들과 함께 제가 가서 달래보려 합니다.”

“조금 전에 열심히 싸워 보겠다 하지 않았소? 위험한 것 아니오?”

“칼도 맞대 봤다가 말싸움도 좀 하면서 친해져 보려고요. 여간 큰 전투가 아니고서는 오웬까지 오게 될 일은 없을 겁니다.”

바이런은 가벼운 말투로 말했지만 말 속에 담긴 내용은 가볍지 않았다. 협상이 결렬된다면 인질이 되어 곤욕을 치르거나 어쩌면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있었다.

“부디 몸조심하시오. 건강히 돌아와야 하오.”

위험한 곳으로 떠나는 친구에게 겨우 몸조심하란 인사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프리아는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나는 정말 후궁전의 꽃이나 다름없구나.

“그리하겠습니다. 저를 기다리는 여인들이 많으니 머리털 한 올도 다치는 일 없이 이 늠름한 자태 그대로 돌아올 것입니다.”

바이런이 너스레를 떨며 과장된 몸짓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러고는 감탄하는 시녀들에게 눈을 찡긋해 보인 후 다시 말을 꺼냈다.

“참, 최근에 본궁에서 진짜 기르 님을 만나 보았지 뭡니까. 이름만 듣다가 본인을 직접 만나니 무척 반갑더라고요.”

한동안 바이런에게 제 이름이라 내세웠던 가명의 장본인, 기르를 만났다는 바이런의 말에 프리아의 표정이 겸연쩍게 바뀌었다. 헛기침을 하며 프리아가 말을 받았다.

“아, 만나 보았소? 두 사람 다 내 소중한 지인들이니 서로 친해지면 좋겠구랴.”

프리아의 말에 바이런은 본궁에서 단 한 번 보았던 키 큰 사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의 얼굴은 소년 시절 회초리를 들어가며 가르쳤던 엄한 스승 같기도 하고 수백 년을 살아온 현자처럼 덤덤해 보이기도 했다.

그 앞에서 절절매던 시종장의 태도를 미루어보아 필시 평범한 하위귀족은 아닐 것이다. 궁중 예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그 우아한 말투와 태도로 떠돌이 의사이자 연금술사라. 황가의 방계 출신일 것이라 의심하는 오웬의 주장이 오히려 설득력 있었다.

숨겨진 선황의 후손이라 오웬의 지위를 위협하는 전개가 펼쳐지는 것을 잠시 상상해 보았던 바이런이 고개를 흔들었다. 오웬에게 해가 되는 신분이었다면 시종장이 그토록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 누구보다 오웬에게 충성하다 못해 맹목적인 시종장이었으니. 그에 대한 시종장의 태도는 호의적이다 못해 약점을 잡힌 사람처럼 좌불안석이었다. 대체 정체가 뭘까.

“그 말씀 진심이시지요? 질투쟁이가 훼방을 놓아도 무르시기 없습니다?”

그 엄격해 보이는 사내와 친해지기에는 꽤 어려움이 있을 테지만 바이런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오웬이, 아니 폐하께서 그렇게 질투를 많이 하시오?”

은근슬쩍 물어오는 프리아의 말투에 감출 수 없는 기쁨이 서렸다. 언제 또 이름을 부르는 사이로 발전했나. 바이런은 속으로 감탄하며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순 질투쟁이랍니다. 지금도 프리아 님과 제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나 궁금해 죽을 지경일걸요? 저기 엿듣고 있는 시종관에게 다 일러바치라 했을 겁니다.”

굳이 백조궁까지 안내하겠다며 시중을 자처한 시종관을 손가락질하며 바이런이 말했다.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는 시종관의 모습에 프리아의 눈이 커졌다.

“바이런, 그대와 나는 순수한 친구 사이거늘 아직도 의심하고 계신단 말이오?”

“그러게 말입니다. 사랑에 푹 빠지더니 충신 사촌형도 몰라보네요.”

“……그러고 보니 전투에 나갈 수도 있다 하지 않았소? 내 상처에 잘 듣는 약 몇 가지를 챙겨 드리리다.”

갑자기 말을 돌리며 시녀를 부르는 프리아의 귀에 붉은 기가 서렸다. 질투쟁이와 부끄럼쟁이의 조합이라니, 이 좋은 구경거리를 한동안 놓쳐야 한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프리아의 부름에 응접실로 찾아온 기르가 상처에 바르는 연고와 피로 회복을 돕는 약초를 가져다주었다.

“상처 부위를 알코올로 소독한 후에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떠서 꼼꼼하게 발라 주시오. 하루에 한 번씩 깨끗한 붕대로 갈아 주는 것도 잊지 마시오. 물집이나 고름이 생긴다고 씻지 못한 손으로 짜내면 덧나기 쉬우니 청결에 주의하고 경과를 보면서 치료해야 하오.”

뚜껑까지 열어 연고를 보여 주며 열심히 설명하는 프리아를 바라보는 기르의 눈에 따스한 애정이 실려 있었다. 이러니 오웬이 질투를 하지. 물론 저 눈빛은 연인이라기보다는 자식을 바라보는 아비의 시선에 가깝다는 것을 연애의 달인 바이런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연애 초보 질투쟁이 오웬에게는 자신의 연인에게 흑심을 품은 난봉꾼의 시선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삼자대면을 구경하는 것도 참 재미있을 텐데 말이야. 이런 흥미로운 볼거리를 구경하기 위해서라도 바이런 자신은 무사히 살아 돌아와야만 했다.

티타임 시간 내내 백조궁 시녀들을 설렘에 휩싸이게 했던 바이런은 오늘 안에 찾아가야 할 곳이 많다며 아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인들을 찾아다니며 작별인사만 벌써 3일째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간 프리아와는 다르게 언제 정이 들었다고 눈물까지 흘리는 시녀들도 있었다. 어차피 황손이 아니었기에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바이런이 황제가 되었더라면 후궁을 자처하는 이들의 수만 명이 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 *

그날 밤, 상태를 살피러 온 기르 앞에서 프리아는 오후부터 머리를 떠나지 않던 생각을 입에 올렸다.

“기르, 큰 전투라는 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걸까?”

질문을 들은 기르가 프리아를 빤히 쳐다보더니 무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

“수십만 명의 병사들이 참가하는 전투를 말하는 거겠죠. 그 정도쯤 되면 황제의 가까운 피붙이가 지휘관으로 나서거나 황제 본인이 직접 지휘하게 됩니다.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지요.”

“수십만 명…….”

엄청난 숫자를 되뇌는 프리아의 얼굴에 수심이 서렸다. 그런 프리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기르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참전하시게 될까 걱정되시나요?”

“사람을 죽이는 걸 싫어하는 이가 전쟁에 나가면 참 괴롭겠지?”

기르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으며 프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프리아가 말하는 대상이 황제라는 걸 짐작한 기르가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가 손등을 토닥였다.

“전쟁광을 제외하고는 살인을 즐겨하는 이는 없겠지요.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으니 전투를 계속하겠지만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괴로워하며 후유증을 앓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왕관을 쓴 자라면 그것마저도 극복해 내야 합니다. 작은 나라의 왕이건 제국의 황제건 간에 말이죠.”

“신분이 낮아도 높아도 괴로운 건 똑같잖아?”

“똑같지요. 그러나 자리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니까요. 걱정은 그만 하고 주무십시오. 요샌 새벽에 발작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기르의 질문을 받은 프리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기르가 주는 새 약을 먹게 된 이후로 발작이 일어나지 않았다.

“기르 덕분에 몸 상태가 아주 좋아졌어. 코피도 나지 않고 발작도 사라졌거든.”

“그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찬바람 맞지 않게 밤에는 외출을 삼가세요.”

“알았어.”

내가 밤에 나갈 일이 뭐가 있다고. 잔소리쟁이. 어리광을 섞은 프리아의 불평에 기르가 미소를 지었다가 다시 엄한 표정을 내보였다.

“제 말을 꼭 지키셔야 합니다. 올해 겨울은 작년보다 더 추울 거라고 하니까요. 저명한 학자들이 내린 예측이에요.”

“기르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렇지?”

“그래도 방심은 금물입니다. 어서 주무세요.”

작년 겨울, 프리아가 큰 병을 앓지 않고 지낼 수 있었던 건 기르가 봄여름 내 부지런히 먹여 둔 약의 효과도 있었지만 예년보다 따스했던 기온 때문이기도 했다. 학자들은 수십 년간의 기후를 비교하고 연구해 올해 겨울은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한파를 대비한 목재 벌목도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으나 전쟁이 벌어진다면 일꾼들마저 전쟁에 차출되어 일손이 부족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궁 또한 살림살이의 규모를 줄여야 했다.

기르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후에도 프리아는 잠들지 못하고 몸을 뒤척였다. 큰 전투가 벌어지면 오웬이 참전하게 된다. 바이런이 오웬의 사촌이기는 했으나 외가쪽 혈통이라 황족 피붙이가 될 수는 없었다.

‘언제쯤 돌아오는 거요?’

‘늦어도 내년 봄이 시작되기 전에는 돌아오려 합니다. 이 바이런이 봄꽃을 놓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꽃처럼 피어나는 여인들도 놓칠 수 없고요. 돌아오면 멋진 봄 연회를 주최할 테니 기대하고 계세요.’

여행을 다녀오는 사람처럼 바이런은 가볍게 말했지만 일이 잘못되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음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훌쩍이는 어린 시녀의 울음을 들으며 프리아는 바이런에게 미안하게도 오웬 걱정부터 떠올렸다.

오웬이 가게 된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가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지?

오웬과의 관계에서 떠나는 건 늘 자신이 되리라 생각해 왔다. 그가 먼저 떠나게 되는 상황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무슨 말로 그를 배웅하고 무슨 심정으로 그를 기다리며 전장에서 돌아오는 그를 어찌 반겨 줘야 할까.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일에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전쟁에 참가하게 된다면 살생을 피할 수 없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 싫고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싶지 않으며 죽은 사람을 보는 일 또한 싫다던 오웬. 얼마나 괴로울까. 얼마나 끔찍할까. 얼마나 돌아오고 싶을까.

만약 전쟁이 길어져 그가 돌아오기 전에 내가 먼저 떠나게 된다면. 더는 그를 볼 수 없게 된다면.

보고 싶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프리아는 오웬이 그리워졌다. 그를 만나 무사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잠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겉옷조차 걸칠 생각을 하지 못한 채로 프리아는 통로의 문을 열었다.

다락방에 남겨두었던 한 알의 약을 찾기 위해 걸어갔던 그날 밤보다 한층 기온이 떨어져 있었으나 프리아는 단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혀 추위조차 느끼지 못했다.

만나고 싶어. 오웬, 너를 만나고 싶어.

공동을 맴도는 바람 소리는 귀신의 울음처럼 을씨년스러웠다. 진정으로 무서운 것은 사람일 뿐. 프리아는 기르의 말을 중얼거리며 바람을 헤치고 나아갔다. 펄럭거리는 침의 자락에 벌레가 달라붙었으나 프리아는 눈치채지 못했다.

지난밤에는 두어 번 헤매었으나 오늘은 헷갈리는 일 없이 통로가 끝나는 본궁 지하에 도착했다. 바쁘게 계단을 올라가는 프리아의 뒤로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윽고 도착해 내실의 문을 열었을 때, 문소리에 돌아본 오웬의 얼굴 위로 기쁨과 당혹이 서렸다.

“지금 가려고 했…….”

지금 가려고 했다는 오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프리아는 달려가 그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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