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새 열두 마리, 토끼 일곱 마리, 수꿩이 세 마리, 수사슴과 멧돼지가 각각 한 마리씩이며 손질이 완료되는 대로 여우 모피 또한 보내 주신다 하였습니다.”
본궁에서 보내온 식재료 보고를 마친 시종이 프리아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러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시종이 내실을 떠나가자 흥분된 시녀들의 목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이 정도면 거의 다 보내 주신 거나 다름없지 않아요?”
“다른 궁은 꿩 한 마리나 토끼 두세 마리가 고작이라고 하던데 그것도 폐하가 잡으신 것이 아니라 사냥꾼들이 잡아온 거래요.”
“주방장이 아주 신이 났더라고요. 이걸 다 어디다 보관하냐면서 말로만 불평하고 입은 아주 귀에 걸렸다니까요.”
짐승 씨가 마르지 않도록 기도하라며 호언장담하더니 정말 많이도 잡았다. 황제가 잡은 것들은 태후와 황친들에게도 고루 분배되어야 했다. 그 양을 제외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조궁에 이렇게 많은 짐승 고기를 보내온 것을 보면 어제 사냥의 결과가 어떠했을지 듣지 않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여우 모피 이야기에 신이 난 유디스는 벌써부터 어느 재단사를 지명해야 할지 즐거운 고민에 빠져 있었다. 우선 외투를 만들고 남은 것으로는 모자와 머프를 지어 달라고 해야겠다. 무슨 색깔을 가진 여우일까. 누런빛일까? 어쩌면 붉은 여우일까. 흰색도 좋았다. 무슨 색을 입어도 잘 어울리실 터이니.
“듣고 계세요? 프리아 님? 기장은 어디까지로 할까요? 발목? 너무 길면 불편하니 종아리까지로 할까요?”
유디스의 말을 흘려듣던 프리아가 재촉에 그제야 듣는 시늉을 했다.
“그렇게 많은 양이 나올까? 오면 결정하는 게 좋지 않겠어?”
“한두 마리여도 상관없어요. 나머지는 주문하면 되니까요. 폐하가 직접 잡아 주신 여우 모피가 들어갔다는 게 중요하죠.”
겨울 외투는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양이라고 황제는 말했지만 프리아는 괜히 유디스를 지금보다 더 흥분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정말 잘되었어요. 작년 겨울에는 춥다고 밖에도 잘 못나가셨잖아요. 올해는 그걸 입으시면 덜 추우실 거예요.”
지난겨울 처음 경험했던 제국의 추위는 생각했던 것보다도 혹독했다. 끓인 물을 넣은 탕파를 껴안고 잠들었어도 새벽이면 이를 덜덜 떨게 만드는 추위에서 깨어나야 했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어 둘 때마다 이불로 온몸을 감싼 채 떨고 있는 프리아를 딱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유디스는 그렇게 추우시냐며 제국인들에게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했다.
“정말 그대로 보내실 거예요? 좀 더 사랑을 담아서, 프리아 님의 마음을 표현해 주시면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텐데요.”
편지 작성을 마치고 서명을 적어 넣는 프리아의 뒤에서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유디스가 아쉬움을 표했다. 황제의 선물에 감사하는 프리아의 편지는 필요 이상으로 딱딱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어 공문서나 다름없었다. 어제는 그렇게 사랑스럽게 행동하시더니 프리아 님도 참 부끄럼쟁이란 말이야.
“됐어. 이대로 보내.”
녹인 밀랍에 인장을 찍어 편지를 봉한 프리아가 기다리고 있던 시종에게 건네주었다. 사랑을 담으라니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다. 쑥스러운 마음에 문장이 굳어 전장의 상황을 보고하는 장군처럼 써 버리고 말았다.
“직접 찾아가 말씀하셔도 좋지 않을까요? 오후 티타임에 찾아가시면 일에 지장도 드리지 않을 텐데.”
“됐어. 편지로 충분해.”
숨겨둔 야한 책을 오웬이 봤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다. 마지막 장까지 빼놓지 않고 적혀 있던 소감을 떠올리며 프리아는 책상 아래서 발버둥을 쳤다. 분명 놀릴 텐데 어찌 얼굴을 볼 수 있단 말인가. 레지나 공녀에게도 면목이 없다. 뭐라고 핑계를 대야 하지?
“책을 망가뜨리셨다고요?”
“……예.”
“아니 어쩌시다가. 침실에서 혼자 보시라고 말씀드렸는데.”
“미안합니다. 레지나 님께서 어렵게 구하신 것을 아는데… 제가 부주의했어요. 책값은 말씀해 주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
면목 없는 얼굴로 프리아가 고개를 숙였다. 장서관의 서가에 몸을 기대고 있던 레지나가 흥미로운 눈으로 프리아의 표정을 관찰했다.
“책값은 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내용은 마음에 드셨나요?”
“예, 아니오! ……아니, 예.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삽시간에 말을 번복하는 프리아의 얼굴이 붉은빛을 띠었다. 참으로 순진하시구나. 딱 놀려먹기 좋은 성격이었다. 뜬소문으로는 사내 후궁이 요사스러운 외모와 성격으로 황제를 휘어잡고 있다고 했으나 눈앞의 사내는 휘어잡기는커녕 수십 수백 번을 휘둘리고도 남을 순둥이에 지나지 않았다.
“참 곱게 자라셨습니다.”
“예?”
레지나가 비꼬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프리아의 파란 눈이 놀람으로 더욱 커졌다. 여인이었으면 벌써 황손을 잉태하고도 남았을 테니 시기 어린 다른 후궁들에게 독살을 당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무리 총애를 받는다 해도 황후가 될 수도, 후손을 낳을 수도 없는 사내. 그 이유가 여태 프리아가 비웃음을 받는 이유이자 살아남은 까닭이기도 했다.
“칭찬이에요. 프리아 님을 보면 남동생 삼고 싶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남동생이요? 제가 손위일 텐데요?”
“저도 지난달에 스물넷이 되었습니다. 이제 동갑이지요.”
“생일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저도 곧 스물다섯이 되는 걸요.”
“그렇게는 보이지 않으십니다. 이것도 칭찬이에요.”
불만스러운 표정이면서도 책 망가뜨린 죄로 싫다 내색하지 못하는 프리아의 속마음이 들여다보여 레지나는 웃음이 나오는 입가를 간신히 다물고 있었다. 귀여워 진심으로 남동생 삼고 싶어졌다.
“제가 못쓰게 된 책 대신 다른 걸 드리면 어떨까요? 무엇이든 말씀해 주세요. 제가 구할 수 있는 거라면 바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프리아의 말에 레지나가 생각에 잠기며 눈을 가늘게 떴다. 원하는 게 있긴 하다. 그 차가운 황제가 이 사탕처럼 달콤한 오라버니를 어떻게 녹여먹는지 애정행각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차라리 백조궁 시녀가 되었다면 매일 눈이 즐거웠을 텐데 그 재미있는 볼거리를 몇 다리 건너 소문으로만 듣고 있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어떻게 망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돌려주시면 고칠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책을 구한 곳에 맡기면 되니까요. 걱정하지 마시고 돌려주세요.”
“안 됩니다! 고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어요.”
프리아의 격해진 반응에 레지나가 떠볼 의도로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쩌다 그렇게 심하게 망가뜨리셨을까요? 폐하와 함께 보시면서 실습이라도 하셨습니까?”
“예? 아닙니다! 그저 보시고 낙서만 하셨어요. 아직 따라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안 하셨구나. 곧 하실 계획이시군요.”
레지나의 유도신문에 걸려들었다는 걸 깨달은 프리아의 얼굴이 흰 치즈처럼 변했다가 다시 홍당무가 되었다.
“……안 합니다. 안 해요.”
“낙서가 뭐 대수라고 그리 걱정을 하셨어요? 폐하께서도 마음에 들어 하셨나요?”
“모르겠습니다. 그만 놀리십시오.”
화를 내도 귀엽구나. 다른 후궁들은 모두 이 사내를 질투하겠지만 레지나는 오히려 황제가 부러웠다. 본디 이렇게 예쁜 사내가 취향은 아니었던지라 가지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지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솔직한 얼굴을 보고 있다 보면 심심할 틈이 없을 것 같다.
“굳이 책값을 치르시겠다면 사슴 다리 한쪽만 보내 주세요. 저는 토끼 두 마리밖에 받지 못했거든요. 제가 고기라면 사족을 쓰지 못합니다.”
“드리겠습니다. 다른 것도 더 보내 드릴게요.”
레지나의 입을 막기 위해서라면 황제에게 받은 걸 모두 달라 해도 군말 없이 따를 셈이었다. 결연한 표정이 된 프리아의 속마음을 짐작한 레지나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황제의 분노를 사 한동안 근신해야 했던 바이런의 전철을 밟고 싶지는 않았다.
“사슴 다리면 충분합니다. 저는 오래 살고 싶거든요.”
장수와 다른 고기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레지나의 거절에 프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슴 다리 한쪽을 목련궁으로 보내라는 프리아의 말에 유디스는 입을 내밀었지만 빚진 것이 있어 그렇다하니 명령에 따랐다. 그 김에 자고새도 몇 마리 덜어내 작약궁과 모란궁으로 보냈다. 자고새는 육질이 부드러워 어린 아이들이 먹기 좋았다.
궁을 옮긴 이후 자주 볼 수 없게 된 어린 공녀들을 떠올리다보니 황제의 조카인 레온 생각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오웬이 어련히 챙겼으랴마는 소년의 작은 체구와 반짝이던 눈빛이 자꾸 눈에 밟혀 프리아는 한 번 더 그를 찾을 결심을 했다.
생각지도 못한 방문자가 백조궁을 찾았다. 오후 티타임 시간에 맞춰 방문한 사내를 본 프리아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이런!”
“오랜만에 뵙습니다, 프리아 님.”
마상 대회날 경기에 출전한 바이런의 모습을 수련관에서 바라보기는 했지만 실제로 만나 대화하는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장서관에서 황제에게 끌려간 이후로 처음이었으니 그사이 계절은 여름을 지나 늦가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렇게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는데.”
프리아가 사칭했던 궁정인의 신분이 아닌 후궁과 황제의 신하로 만나는 자리였기에 바이런은 깍듯이 예의를 차렸다. 그런 바이런의 태도가 섭섭해 프리아가 아쉬움을 표하자 바이런은 빙긋 웃으며 눈썹을 장난스럽게 끌어올렸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무서운 사촌 동생에게 무슨 벌을 받을지 모르오. 그사이 잘 지내셨습니까?”
입가를 가리며 작게 속삭이던 바이런이 다시 말을 높였다. 프리아의 뒤에서 노려보고 있는 유디스에게 눈을 찡긋해 보이고 다른 시녀들에게도 능청스런 인사를 건네는 것이 제가 알던 바이런의 모습 그대로인 것 같아 프리아는 안심했다.
“전에 보내준 책은 잘 읽었소. 고맙다는 인사가 늦었구랴.”
프리아 님 말투가 왜 그래요? 갑자기 구수해진 어투에 놀란 유디스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사벨의 얼굴 또한 떨떠름해진 것을 보고서야 귀는 정상임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이 프리아가 생각해낸 최대한 사내다운 말투임을 알고 있는 바이런이 유디스를 올려다보며 다시 한번 눈을 찡긋했다. 미쳤나? 눈신호는 왜 자꾸 보내는 거야?
“잠시나마 프리아 님을 즐겁게 해 드렸다니 영광입니다.”
바이런이 보내왔던 책은 한물간 개그담이었지만 그 마음이 기뻐 잠시나마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진작 고맙다는 편지라도 보냈어야 했는데 이렇게 찾아오기 전까지 한동안 그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전부터 찾아뵈려고 했는데 질투 많은 누군가가 통 허락을 해 주지 않아서 말입니다. 목숨을 내놓았더니 이제야 허락을 해 주더라고요.”
목숨을 내놓았다는 말이 늘 하는 너스레라고 생각한 프리아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궁에 와서 처음 사귄 친구인 바이런은 늘 자신을 즐겁게 해 주는 소중한 벗이었다. 이렇게 만나게 해 준 것을 보면 앞으로도 자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품은 프리아에게 바이런이 본론을 꺼내놓았다.
“내일 국경으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한동안은 돌아오기 어려울 거라 폐하께 어렵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국경이라니… 왜?”
바이런의 말에 놀란 프리아가 눈을 깜박였다. 설마 오웬이 바이런을 추방이라도 한 걸까? 그렇다면 막아야 했다.
“국경에 사소한 문제가 발생했는데 제가 가서 해결하고 오웬에게 점수 좀 따려합니다.”
그제야 최근 국경문제로 궁이 소란스럽다는 이야기를 시녀들에게 전해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자신의 일로만 머리가 가득 차 주변 상황을 챙기지 못하고 있던 것이 후회되었다.
“출전하는 거요?”
“그렇습니다. 너무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저는 백전백패, 아니 백전일패의 사나이니까요.”
마상대회에서 오웬에게 패배했던 한 번의 승부를 더하며 바이런이 미소를 지었다. 져줄 생각이기는 했으나 방심한 사이에 정말로 지고 말았다. 자신 역시 프리아를 진심으로 좋아하기는 했지만 오웬의 마음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행복에 겨운 얼굴로 거만하게 한 번의 알현을 허락해 준 사촌 동생의 얼굴을 떠올리며 바이런은 다정하게 말을 이어갔다.
“폐하까지 오시는 일은 없도록 제가 열심히 싸우겠습니다. 그러니 두 분은 행복하세요.”
바이런의 말을 들은 프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오웬이 출전할 수도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