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자제하고 있는 사람 부추겨 할 마음이 들게 만들어놓고는 자 버리다니. 잔인하다. 잠이 든 프리아의 몸에 깃털 이불을 덮으며 오웬은 무정한 연인을 향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눈치도 없이 아플 정도로 팽창된 아래가 도통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육욕에 거부감을 느껴 그 흔한 수음도 거의 하지 않고 소년기를 지나왔는데 다 자란 지금에 와서 홀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익히게 될 줄은 몰랐다.
천사같이 잠든 얼굴은 그런 욕구는 알지 못한다는 것처럼 순결해 보였다. 살짝 벌려진 프리아의 입술에 오웬의 시선이 멎었다. 저 부드러운 곳에 제 손가락이 소리를 내며 들락거렸던 것을 떠올리자 이미 서 있던 곳으로 더욱 피가 몰렸다.
“고문이 따로 없군.”
한참을 주먹을 쥐었다 펴며 아래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던 오웬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침실과 이어진 목욕실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 많은 후궁과 손 뻗으면 닿을 여인들을 두고서 황제가 홀로 욕망을 해소한다니. 거리의 시정잡배도 웃을 이야기였다.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오웬은 벽 너머에서 잠이 든 정인의 달콤한 육체를 떠올렸다.
‘죽으면 못 하니까. 그러니까 해요.’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억지를 부리다 못해 겨우 생각해낸 핑계가 그거란 말이야? 매일 밤 수없이 안아도 이제 불평은 하지 못하겠지. 이제는 프리아의 입에서 그만해 달라 울며 비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놓아주지 않을 작정이다.
자신보다 몇 살 많다고는 하나 프리아 역시 한창 나이의 청년이었다. 둘 중 하나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 이상 손잡고 먼 길을 기꺼이 함께할 것이다. 수천, 수만의 낮과 밤을 함께 하겠지. 그러니 오늘은 봐주기로 한다. 오웬 혼자뿐인 욕실에 가쁜 숨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한결 개운해진 몸으로 오웬은 침실로 돌아왔다. 이른 저녁시간부터 잠자리에 들었던 터라 아직 밤은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속 모르고 잠든 몸을 끌어안아 제 품으로 옮기며 오웬이 프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다음에는 안 멈춰.
머리가 깨어질 듯 아프다. 병으로 인한 아픔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두통은 필시…….
“주정뱅이, 그만 일어나.”
머리 위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리아는 숙취로 온통 얼굴을 찡그리며 오웬이 입가에 대어주는 물을 달게 마셨다. 연거푸 두 컵을 마시고나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단정히 의복을 입고 있는 오웬의 모습을 본 프리아가 입을 열었다. 내가 언제 왔는지도 기억 못 해? 오웬이 혀를 끌끌 차며 손가락으로 프리아의 입술에 묻은 물방울을 닦아 주었다.
“하루가 지났어. 너 일어나길 기다리다 또 정무에 지각하게 될 판이다.”
“하루요?”
내가 그렇게 잠을 많이 잤던가. 응접실에서 이사벨의 가문에서 보내왔다는 포도주를 시녀들과 함께 나누어 마셨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사실 궁의 저장고에도 포도주가 보관되어 있어 마시고자 한다면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보통 한두 잔 곁들어 식사의 흥을 돋우거나 과일을 넣고 끓여 감기를 예방하는 데 쓰곤 했다. 술은 쉽게 구할 수 있었으나 어제처럼 많은 양을 마실 기회는 없어 시녀들 앞에서 단 한 번도 취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과연 이사벨의 자랑대로 맛과 향이 뛰어난 술이었다.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색다른 주조 기술을 가지고 있어 평균 기온이 높지 않은 제국에서도 고품질의 포도주를 생산할 수 있다고 했다. 간만에 마음에 드는 술을 만난 기쁨에 평소보다 조금 욕심을 부려 보았는데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 마셨을 줄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고 하니 배웅 정도는 해줘야 하겠지. 힘들게 몸을 일으키는 프리아를 오웬이 부축했다.
“……어?”
흘러내린 이불 아래로 드러난 자신의 알몸에 프리아의 시선이 멈췄다. 침의도 입지 않고 잠이 들었던가. 흰 피부 위로 남은 애무의 흔적을 발견한 프리아가 빤히 오웬을 쳐다보았다.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잠자리를 가진 모양이다. 딱히 비난할 의도는 없었으나 그 시선을 받은 오웬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제정신일 때 잘해 주려고 그렇게 참은 것도 모르고. 지금 술 취한 틈에 맘대로 해 버렸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는… 너는 진짜…….”
오웬은 억울한 나머지 말을 제대로 끝맺지도 못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전적이 있었으니 프리아가 오해한다 한들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인 내가 이해해야지.
“너 이제 술 마시지 마.”
한참을 억울해하던 오웬이 입 밖으로 말을 뱉어냈다.
“예?”
마시지 말라니 무슨 말이죠? 영문 모르고 금주령을 받게 된 프리아가 두 눈을 깜박였다.
“폐하,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시녀들에게 물어보거라.”
가장 큰 잘못은 자신을 부추겨놓고 혼자 잠이 든 것이지만. 차마 그리 말할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마시지 마. 한 잔도 안 돼.”
프리아의 주량을 잘못 짚은 오웬이 다시 경고의 말을 날렸다. 프리아에게 있어 한 잔은 물이요, 두세 잔은 음료수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예.”
몰래 마셔야지. 어차피 취하지 않을 테니 들킬 일도 없다 생각한 프리아가 뾰로통한 얼굴로 답했다.
“나오지 마. 술이나 얼른 깨.”
바닥에 발을 딛으려던 프리아가 숙취로 휘청거리는 걸 오웬이 급히 다가와 다시 침대로 뉘였다. 침의도 가져와 입혀준 덕에 바닥에 발을 딛을 필요가 없어졌다. 필요한 모든 것이 손닿는 곳에 있도록 배치해 준 오웬이 침실을 빠져나가기 위해 돌아섰다. 몇 발자국 걸어가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고갯짓으로 자신을 배웅하는 프리아를 바라보고 있던 오웬이 한마디를 남기고 다시 돌아섰다.
“안 했어.”
하면 한 거고, 안 했으면 안 한 거지. 뭘 저렇게 억울한 얼굴로.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하고 떠난 오웬의 얼굴을 떠올리며 프리아가 웃어 댔다. 애무의 흔적은 있되 욱신거림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하던 중에 자신이 잠들어 버린 것 같다. 여간해서는 취하는 일이 없지만 드물게 취했어도 고작해야 말이 좀 많아지다 잠이 들 뿐이었다. 술 취한 김에 황제에게도 뭐라 잔소리를 한 것일까. 평소 오웬을 어리다 생각하고 있었으니 그 김에 손위행세를 하려고 들었을지도 모른다.
두통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다 아침 시중을 들기 위해 방으로 들어온 유디스를 붙잡고 프리아는 어제 저녁의 일을 물어보았다. 그러고는 황제에게 이름을 부르는 불경을 저지르다 못해 하대했다는 말을 듣고 역시를 외치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래서 화가 났구나.”
“예? 폐하께서 화를 내셨어요? 어제는 괜찮아 보이셨는데.”
괜찮다뿐일까. 입이 귀에 걸렸다. 내실을 빠져나오던 시녀들도 폐하의 표정을 봤냐며 신나게 쑥덕거렸다. 목숨을 걱정하며 울던 어린 시녀 역시 금세 기가 살아나 장미궁에 염장 지르며 가겠다며 빠른 걸음으로 궁을 나섰다.
“어제는 술이 과하셨어요. 그 큰 병을 세 번이나 비우시다니요.”
어찌나 큰지 세숫물 담는 사기 주전자만 했다. 한 병을 시녀들이 나누어 마시는 동안 프리아는 그 큰 병을 연거푸 세 번이나 비워 댔다.
“많이 마시긴 했네.”
덕분에 오랜만에 이토록 강한 숙취를 느끼게 되었다. 기르의 잔소리를 어떻게 피한담.
“저는 프리아 님이 취하면 그렇게 귀여워지시는 줄 처음 알았어요.”
“귀엽다니 무슨 소리야.”
사내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예쁘다는 찬사를 입에 달고 사는 유디스였기에 프리아는 귀엽단 말도 그저 흘려들으려했다.
“기르 님에게 업어 달라 하실 때는 좀 난감했거든요. 귀엽기는 했지만. 그런데 폐하가 나타나시니까 애교를 부리시면서 품에 안겨 얼굴을 막 부비시고. 폐하의 이름을 계속 부르시는 그 모습이 정말 사랑스러웠어요.”
“애교를 부렸다고? 내가?”
황제의 이름을 부르며 하대했다는 말에 프리아는 연장자답게 평소 생각하고 있던 잘못을 오웬에게 지적하고 훈계를 늘어놓았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 귀여우셨어요. 그래도 다음부턴 많이 드시지 마세요. 폐하 앞에서만 드시는 게 좋겠어요.”
유디스 지금 장난치는 거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수석 시녀를 바라보던 프리아의 머릿속으로 갑자기 기억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오웬, 오웬, 오웬, 오웬…….’
다른 기억이 연이어 그 뒤를 이었다.
‘오웬 나 업어 줘. 응?’
‘오웬, 사냥은 잘 했어?’
‘하자. 하고 싶어.’
‘죽으면 못 하니까. 그러니까 해요.’
‘네가 하자고 한 거야. 잊으면 안 돼. 아침에 기억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