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는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유디스의 제의를 거절했었다. 초상화를 그린다 해도, 머리카락을 잘라 넘겨준다 해도 언젠가는 왕실 소장품 일부가 되어 먼지 쌓인 채 잊혀질 것이었으니. 마상대회날 오웬이 자신의 스카프를 가져가긴 했으나 다시 돌려놓았기에 그저 장난을 치려는 의도인줄로만 알았다.
“스카프도 이렇게 몰래 와서 가져가셨던 건가요?”
프리아의 머리카락이 든 로켓을 만족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오웬이 프리아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스카프? 아, 그거. 내색이 없어서 알아차리지 못한 줄 알았는데 알고 있었군.”
“유디스가 그거 찾는다고 온 방을 다 뒤집어 놓았다고요. 그냥 달라고 하시지.”
“달라고 하기 전에 먼저 줬으면 이런 일이 없잖아?”
딱딱 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로켓 표면을 두드린 오웬이 조금 토라진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이런 걸 원하실 줄은…….”
이어진 프리아의 말에 한숨을 내쉰 오웬이 프리아의 머리카락을 아프지 않게 잡아당겼다.
“언제까지 폐하라고 할 거야? 그것도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해?”
아무것도 모르고 미래를 입에 담는 오웬을 바라보며 프리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전에 고칠게요.”
“도대체 너는. 내가 위험한 사냥대회에 나가는데 태평하게 잠만 자고 있고. 걱정은 안 해?”
과장된 억지를 늘어놓는 오웬의 말에 프리아가 빙긋이 웃었다. 훈련된 사냥개와 몰이꾼, 매를 데리고 황가 전용 사냥터에서 그저 친목을 위한 행사를 가질 뿐이면서 엄살은.
“걱정해야 해요?”
걱정해야 할 정도로 실력이 형편없는가. 도발하듯 묻는 프리아의 질문에 오웬의 말문이 막혔다.
“짐승의 씨가 마를지도 모르니까 걱정해야지. 내가 돌아올 때까지 동물들의 명복을 빌고 있어.”
자신이 말하고도 억지다 싶어 오웬이 피식 소리내어 웃었다. 별거 아닌 말이거늘 왜 이렇게 웃음이 나는지 모르겠다. 떠오른 아침 해가 방 안 가득 빛을 뿌렸다.
“늦겠어요. 어서 가요.”
“기도 많이 해.”
마주보고 웃는 두 사람의 사이에서 해를 받은 로켓이 반짝이는 빛을 냈다. 흐렸던 어제 날씨가 무색하게 청명한 아침이었다.
“기르 님, 외출하시나요?”
소박한 차림새로 문을 나서는 기르의 뒤를 유디스가 따라왔다.
“네, 장서관에 다녀오려 합니다. 오후에 돌아오겠습니다.”
장서관에 들어온 새로운 의학서가 있는지 가서 확인해보고 쓸만하면 몇권 대출해 올 생각이었다. 전에 없이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유디스를 기르가 의아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제가 할 말이 있으십니까?”
유디스는 그동안 눈앞의 사내와 마음 속으로 일방적인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누가누가 프리아 님과 더 친한 사이인가.’ 여전히 이 사내가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프리아 님의 건강관리에 대해서는 그래도 전문가의 조언을 따르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벨의 가문에서 포도주가 몇 통 들어왔는데 프리아 님이 맛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드셔도 괜찮겠죠?”
프리아는 과실주를 즐겨 마시는 편이었다. 취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기에 주량이 꽤 될 것이리라 짐작했지만 앓고 난 이후니 건강에 염려가 되지 않을까 싶어 한 질문이었다.
“술이라면 꽤 잘 드시지요. 너무 많이 마시지만 않으면 괜찮습니다.”
약재를 넣어 빚은 술을 오래 마셨던 터라 프리아는 어느 정도의 양으로는 취하지도 않았다. 보통 사람보다 주량이 센 편이었다.
“너무 많이가 어느 정도에요?”
유디스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던 기르가 웃으며 답을 내려주었다.
“자꾸 웃으시면 그만 드시게 하세요.”
어제부터 웃지 않고 있는 순간이 없는데 어찌 판단한단 말인가. 난감한 얼굴로 유디스가 다시 물었다.
“요샌 계속 웃고 계신데요?”
“어리광이 좀 심해진다 싶으면 멈추게 하세요.”
“어리광이요?”
“여간해서는 나오지 않겠지만. 주사가 어리광입니다.”
프리아 님의 어리광을 볼 수 있다고? 안 돼. 그 전에 멈추시게 해야지. 아, 그런데 조금은 보고 싶다. 프리아 님의 어리광.
유디스의 마음속에 일어난 유혹을 모르고 기르가 문을 빠져나갔다. 찬 바람이 불어 과실주 마시기에 좋은 계절이었다. 여기서도 약술을 좀 담가 볼까. 돌아와서 마실 포도주의 맛을 기대하며 기르가 걸음을 재촉했다.
들어서자마자 진동하는 포도주 냄새에 오웬이 얼굴을 찌푸렸다. 사냥 후 이어진 연회에서 적당히 어울리다 겨우 빠져나왔거늘 이게 웬 술판이란 말인가. 사냥 수확을 자랑할 생각에 한걸음에 달려왔다. 자신을 보며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는 시녀들의 낯빛 또한 평소보다 붉은 걸 보니 거하게 술판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더 마실 거야! 더 줘!”
익숙한 목소리가 문 안쪽에서 들려왔다. 평소보다 톤이 높은 목소리로 보아 거나하게 취했음이 분명한 프리아의 상태를 미루어 짐작한 오웬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응접실로 들어섰다.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지?”
등 뒤에서 들리는 서늘한 음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는 프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기르가 뒤를 돌아보았다.
“오셨습니까?”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흐트러진 프리아의 차림을 본 오웬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그런 오웬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그저 기르가 고개를 돌린 것만이 서러운 프리아가 칭얼거렸다.
“기르, 나 안아 줘.”
헉.
아까부터 한참을 안아 달라, 업어 달라 떼쓰는 후궁을 바라보며 동요하던 시녀들의 숨이 일순 멎었다. 많은 양을 마시고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멀쩡했던 후궁에게 감탄하며 어쩜, 이렇게 잘 드시냐 신기해하던 것이 바로 조금 전의 일이었다. 거대한 포도밭을 소유한 이사벨의 가문에서 보내온 술은 맛과 향이 뛰어나기로 소문나 있었다. 모두 함께 나눠마시자며 후궁이 허락했기에 다들 기쁜 마음으로 잔을 들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거들먹거릴 핑계가 생긴 이사벨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연신 주위에 술을 권했다. 한두 잔 받아마신 시녀들이 전혀 취하지 않는 프리아를 보며 감탄하기 시작했다.
‘프리아 님, 이제 그만 드세요!’
프리아의 어리광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시녀의 본분에 충실하겠다 마음먹은 유디스가 제지한 순간이었다.
‘나 안 취했어. 멀쩡해. 괜찮아.’
전형적인 주취자의 핑계를 대며 프리아가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목소리와 말투에는 전혀 취기가 없어 표정을 보지 못했다면 멀쩡하다 여겼을 것이다. 연신 터져나오는 웃음과 되풀이하기 시작한 말만 아니었다면.
취하지 않았다는 프리아의 말을 여러 번 듣고 나서야 유디스가 기겁하며 잔을 빼앗아들었다. ‘지금 취하신 거였어?’ 시녀들이 당황하기 시작했을 때 장서관에 갔던 기르가 백조궁으로 돌아왔다.
보자마자 상황을 파악한 기르가 유디스에게 프리아가 마신 술의 양을 물어보았다.
‘전혀 취하신 티가 나지 않아서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죄송해요.’
‘원래 그런 주사입니다. 내버려두면 잠이 들 테니 주변부터 치워주세요.’
술과 술잔을 모두 치우도록 지시한 기르를 뒤늦게 발견한 프리아가 지나치게 반가워하며 엉겨붙었다.
‘기르! 보고 싶었어!’
아무에게나 부리는 어리광이 아니라 상대가 정해져있던 거였나. 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업어 달라 떼쓰는 프리아의 모습에 유디스가 당황했다. 시녀들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던 중에 황제가 당도한 것이다.
“왜 안 업어주는데에?”
안아 달라 양팔을 벌렸다가 반응이 없자 기르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기 시작한 프리아가 말끝을 늘였다.
“프리아 님, 이제 다 크셨으니 제 발로 서셔야지요. 업어드리는 건 다섯 살까지입니다.”
무슨 주사가 이렇게 불경하단 말이야. 경악한 오웬과는 다르게 온화한 표정을 한 기르가 태연히 다시 입을 열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폐하, 프리아 님은 어디까지나 어렸을 적 어리광을 부리고 계신 것이옵니다.”
“왜애?”
다시 말끝을 늘이던 프리아가 뒤늦게 오웬을 발견했다.
“어? 오웬이다.”
프리아의 얼굴로 번져가는 미소에 넋을 잃은 오웬과는 다르게 후궁의 불경에 놀란 시녀들이 눈을 크게 떴다. ‘저희 다 죽는 거 아니에요?’ 울먹이기 시작한 어린 시녀가 고참 시녀의 손을 잡았다.
“오웬.”
이번엔 자신을 바라보며 양팔을 벌리는 프리아에게로 오웬이 걸어갔다.
“기도한다더니 술이나 퍼마시고.”
프리아의 얼굴을 잡은 오웬이 볼을 붙잡아 늘렸다. 볼이 잡힌 프리아의 입가로 발음이 샜다.
“오웨, 아프….”
“주정뱅이.”
더없이 사랑스러운 존재를 보는 얼굴로 오웬이 미소 지었다. 곧 황제의 품에 안긴 프리아가 탄탄한 가슴 위로 얼굴을 부볐다.
“오웬, 오웬, 오웬, 오웬….”
후궁이 맞지 않을까 겁이나 제 몸으로 막기 위해 달려왔던 유디스가 분위기를 파악하고 뒷걸음쳤다. 둘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오웬과 프리아를 보며 혀를 찬 기르가 먼저 내실을 빠져나갔다. 시녀들 또한 힐끔거리면서도 일제히 문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내실을 빠져나가는 유디스의 눈에 보인 것은 덥썩 안아들다못해 그대로 프리아를 어깨에 걸친 오웬이 침실로 들어가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