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디스.”
머리를 빗기는 유디스의 손길에 순순히 몸을 맡기고 있던 프리아가 시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 프리아 님.”
후궁의 몸단장을 빙자한 인형놀이에 열중하고 있던 유디스가 동작을 이어나가며 대답했다.
“오늘 날씨가 정말 좋은 것 같아.”
온통 흐렸는데?
자수틀을 잡고 있기는 하지만 딱히 바늘 놀릴 생각은 없어 보이던 이사벨이 뜨악한 표정으로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맞아요, 프리아 님. 선선해서 딱 좋아요.”
부지런히 손을 놀려 프리아의 머리카락에 윤기를 더하며 유디스가 대답했다. 황제가 다녀간 이후로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 프리아가 실없는 소리를 할 적마다 유디스는 동의하다 못해 한술 더 뜨는 발언을 내놓기까지 했다. 폭우가 내리건 우박이 쏟아붓건 심지어 땅이 얼어붙거나 혹은 쪄죽을 만큼 무덥다 해도 무슨 상관이겠는가. 프리아 님의 마음이 봄날인 것을.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프리아 님은 처음 보았다. 한동안 우울해 보이던 얼굴에 생기가 돌아온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그러지 않아도 아름다운 얼굴이 여름 복숭아처럼, 가을 사과처럼 빛이 났다. 더 반짝반짝 빛나게 해 드려야지. 유디스는 빗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어서 여길 관두고 다른 곳으로 가던지 해야지 원.
눈꼴이 시다. 지나치게 시다. 아침나절 보았던 황제와 후궁의 닭살행각을 떠올리며 이사벨이 진저리를 쳤다. 하룻밤 내 붙어 있었으면 되었지. 다시 돌아올 건 뭔가. 그래놓고는 또 문 앞에서 한참을 손을 잡고 뺨을 만지고 머리를 쓰다듬고 온갖 난리를 쳐댔다. 그렇게 좋으면 집무실에 데려다놓고 들여다보던가. 백조궁과 본궁의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생이별을 하는 것처럼 유난을 떠는지. 외롭다. 결국 빳빳한 천 위로 바늘을 찔러넣으며 이사벨이 쓴 입맛을 다셨다.
“아직 미열이 남아 있군요.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찹니다. 다시는 밖에서 밤을 지새우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자기 전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들린 기르가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프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르에게서 꿀 넣은 우유가 든 잔을 받아들었다. 내 나이가 몇인데 기르는 애 취급을 하고 그래. 툴툴거리면서도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있잖아, 기르. 폐하가 나중에 알훼니아에 데려가 준다고 했어.”
잔을 쥔 채로 한참을 입술만 열었다 다시 다무는 일을 되풀이하던 프리아가 결국 말을 꺼냈다. 아이처럼 들뜬 표정을 내려다보며 기르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지셨던 겁니까? 언제 데려간다고 하던가요?”
“지금은 안 되고 나중에. 그래도 꼭 데려가 준다고 했어.”
젊다 못해 어린 황제가 등극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알훼니아처럼 먼 곳으로 외유를 떠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언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에 저리 기뻐하다니. 약초에 대해 가르치기 보다는 사기를 간파하는 기술이나 알려 줄 걸 그랬다. 애를 곱게 키운 내 죄려니. 기르는 심란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어 프리아의 맥박을 다시 헤아렸다.
“그리고 또 뭐라 하던가요? 프리아 님에게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사과했나요?”
“미안하다고 했어. 그리고… 내가 좋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말했지만 살짝 숙인 귓가에 붉은 물이 들어 있었다. 시종장만 탓할 것이 아니었다. 순진하다 못해 처음 사랑에 빠진 열세 살처럼 구니 이를 어찌할꼬.
“좋다라……. 겨우 그 말에 넘어가신 겁니까? 화도 다 풀리셨고요?”
책망하듯 말하는 기르의 말에 프리아가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었다.
“그럼 어떻게 해. 나는 시간이 없는데.”
화를 낼 시간도, 사랑할 시간도 넉넉하지 않다. 이미 시작된 마음은 쉽게 접히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이 달라진 것처럼 황제 또한 무언가 바뀌었다는 건 짐작했지만 직접 듣기 전에는 확신할 수 없었다. 좋지도 싫지도 않은 존재. 그저 품에 안은 후궁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감일 뿐이라고 그가 말했을 때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체념하고 수긍했다. 자각하지 않으면 슬퍼할 일도 없다. 언젠가 닥쳐올 죽음의 날을 떠올리며 차라리 잘되었다 되뇌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마음이 바뀌었다. 이대로가 좋아. 그렇게 여기면서도 정작 찾아온 황제에겐 제 마음 알아달라는 듯 틱틱거렸다. 황제가 오든 오지 않든 상관없다는 듯 굴었으나 사실은 그가 와줘서 기뻤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좋아한다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그것이 자신이 오래도록 기다려온 대답이라는 걸 깨달았다.
“프리아, 황제가 좋습니까?”
시선을 맞추며 기르가 다시 물어왔다.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몸이 아픈 자신은 그러면 안 된다고 책망하는 것처럼 들려와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처음엔 싫었는데……. 싫었는데 좋아졌어.”
사람을 좋아하는 게 무에 잘못이라고.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는 프리아의 모습을 보자 마음이 착잡해졌다.
“황제에게 프리아 님의 몸 상태를 알렸나요?”
기르의 질문을 들은 프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꼭 깨문 입술이 잠시 후 답을 들려주었다.
“……아니.”
“말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언젠가는 알게 될 텐데요.”
외면하려 했던 사실을 기르가 지적하자 고여 있던 눈물이 한순간에 흘러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지만 기르는 언제나 필요한 순간에는 엄격한 스승이었다.
“말 하지 마. 말하면 안 돼.”
떼쓰는 아이처럼 프리아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 얼굴이 안타깝고 애처로워서 기르는 손을 가져가 눈물을 닦아 주다가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
“기르가 나 좀 도와주면 안 돼?”
“이 기르가 무얼 도와드리면 될까요.”
울음과 섞여 그동안 한 번도 말하지 못한 진심이 흘러나왔다.
“나 살고 싶어.”
조금만 더.
“몇 년만. 아니 1년만 더.”
몇 년이면 만족할까. 1년이면 될까. 아니다. 사실은 더 오래 살고 싶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기르가 아니었다면 소년 시절에 이미 죽었을 몸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만으로도 선물처럼 주어진 생임을 알면서도 자꾸만 욕심이 생겼다. 오로지 기르의 선의로 버텨온 삶임을 알면서 이렇게 또 도와 달라 손을 뻗다니.
처음엔 그저 공국에 보탬이 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형님들과 마티아를 도울 수 있어 기뻤다. 그 후에는 자신을 따르는 유디스가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디딤돌이 되기만을 바랐다. 황제를 상대하는 일이 싫고 괴로워도 그 생각만으로 버텼다.
버티는 사이에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워지고 그가 와주기를 기대하게 되었다. 어느새 좋아하게 되었지만 진정 좋아한다면 이렇게 행동해서는 아니 되었는데. 세상은 다 알아도 그만은 몰랐으면 해.
“나 너무 못됐지? 내가 이렇게 욕심이 많은 줄 몰랐어.”
태어나 자라오면서 욕심이라곤 고작해야 좋아하는 간식을 하나 더 먹겠다거나 자지 않고 이야기책을 몇 장 더 읽겠다는 투정을 부린 것이 전부인 아이였다. 마음의 평정을 잃으면 그것이 곧 건강악화로 돌아오기에 절제와 배려를 최우선으로 가르치며 키웠다. 좋아하는 사람이 똑같이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 사랑하는 이와 오래 함께하는 것.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당연한 그 마음을 욕심이라 칭하다니.
“저는 황제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황궁은 어린아이를 괴물로 길러내는 곳이지요. 빈틈을 보였다가는 하루밤새 주검으로 발견될 수 있는 곳입니다. 선황은 물론 황제의 아비인 태자 역시 사람을 함부로 휘두르며 자신의 쾌락만을 중시했던 사람이라 들었습니다.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저는 프리아 님이 마음 다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심하게 군 적도 있지만 오웬은 괴물은 아니야.”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반박하는 프리아의 말에 기르가 헛웃음을 지었다. 오웬은 괴물이 아닐 수 있지만 황제는 괴물이 되지 않고서는 버텨낼 수 없다. 자리가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러기를 바랍니다.”
기르가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프리아의 얼굴을 닦았다. 눈물에 콧물에 이게 다 뭡니까. 알훼니아 형님들께서는 프리아 님과 같은 나이에 이미 아이를 여럿 가진 아비가 되셨다고요.
부드러운 타박에 비로소 안심한 표정이 된 프리아가 미지근해진 우유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다 자랐어도 기르에겐 언제나 프리아는 보호해야 할 아이였다.
네가 원한다면 아가, 네 소망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줄게.
“폐하?”
잠에서 깨어난 프리아가 눈을 길게 감았다 다시 떴다. 꿈도 아니고 헛것을 본 것도 아니다. 오늘 저녁에야 오겠다던 황제가 이른 아침부터 제 옆에 누워 있었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넌 잠이 너무 많아.”
일어나길 기다리다가 공식 일정에 지각할 뻔했다. 다행히 지금 출발한다면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아침 식사야 거르게 되겠지만 말이다.
“언제 오셨어요?”
잠이 덜 깬 얼굴로 프리아가 능글맞은 미소를 짓는 오웬의 손길에 뺨을 맡겼다. 빵 반죽을 치대는 것처럼 오웬이 흰 뺨을 잡아 늘린다.
“새벽에. 한 번도 깨지 않고 잘 자더군. 그리고 이름을 부르라고 했잖아.”
또 폐하라 칭한 얄미운 입술도 꾹꾹 누르며 오웬이 자신의 말을 상기시켰다.
“사냥 안 가세요?”
어제 분명 바쁘다고 했는데. 아직까지 곁에 누워 빈둥거리는 오웬을 프리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갈 거야. 가기 전에 행운의 증표를 받아가려고.”
그런 건 신관에게 부탁해야지. 생뚱맞게 여기에 와서 왜.
누워있던 오웬이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풀어 두었던 허리장식에 달린 단도가 날카로운 칼날을 빛내며 프리아의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오웬?”
“가만히 있어. 다쳐.”
소리도 없이 잘린 금빛 머리카락이 뚜껑 열린 로켓 속으로 들어갔다. 딸각 소리와 함께 닫힌 로켓을 흔들어 보이며 오웬이 말했다.
“너는 늘 받기만 하고 보답을 안 해. 기다리다간 할아버지가 되어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흔들리는 로켓은 언젠가 프리아가 오웬에게 받았던 것과 동일한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초상화가 싫으면 머리카락이라도 잘라 답례를 해야 한다던 유디스의 말이 그제야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