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아는 오웬의 어깨에 기대어 그가 들려주는 지난 이야기를 들었다. 어릴 적부터 의젓하여 황손의 위엄을 보였다고 했던 시종장의 말과는 다르게 오웬의 소년기는 불안과 초조로 가득 차 있었다고 했다. 모친의 냉대로 인한 서러움과 수치심, 파렴치한 부친에 대한 분노를 털어놓을 적마다 흔들리는 그의 손을 프리아는 꼭 붙들고 있었다.
오웬의 이야기가 끝나자 프리아 역시 화답하듯 자신의 유년기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프리아에게 있어 기르는 부친과도 같은 존재였다는 걸 오웬은 이제야 믿어 주는 듯했다. 꽃들이 활짝 피어나는 알훼니아의 봄과 여름, 풍요로운 수확이 이어지는 가을과 아름다운 겨울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오웬은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바다가 정말 그렇게 커?”
“정말 한 번도 본 적이 없으세요?”
“책과 그림에서나 보았지. 크다고는 들었지만 실감이 나지 않아.”
“저 호수를 만 개 이은 것만큼이나 커요.”
프리아가 손끝으로 가리키는 창밖의 호수로 오웬의 시선이 따라갔다. 검은 물 위로 조각달이 녹아 흐르고 있다. 바람이 불자 기슭에 와 부딪히는 물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만 개씩이나?”
“과장 좀 보태서? 아무튼 그만큼 커요.”
내륙 중앙에 자리 잡은 제국이라 바다를 보기 위해서는 해안을 낀 공국을 방문해야만 했다. 여러 나라를 오가며 무역하는 상인들이 아니고서는 태어나 평생토록 같은 곳에서 머물다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부친은 정부를 데리고 외유를 떠나곤 했으나 황손 보호를 이유로 오웬과 아서에게는 먼 외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부친이 선심 쓰듯 황손궁에 보내온 이국의 선물은 보지도 않고 그대로 창고로 보내 버렸다.
오웬에게 있어 비로소 실감하게 된 이국이란 바로 프리아였다. 한 번도 말해 본 적은 없지만 늘 예쁘다고 생각해 온 금빛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오웬은 프리아의 푸른 눈 속에 비치는 달 조각을 보았다.
자신이 이 사내를 이렇게 애틋한 손길로 만지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손쉽게 버릴 수 있는 체스 판 위의 장기말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히려 오웬 자신이 사내 후궁의 눈빛과 표정, 말 한마디, 동작 하나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무너져 버리고 말았으니. 지고도 기꺼운 달콤한 패배였다.
입 맞추고 싶지만 더하다가는 그만 자제력을 잃을 것 같다. 조금 전에도 옷 속으로 파고들려던 손을 가까스로 멈췄다. 안으려 데려온 것이 아니라고 제 입으로 말한 것이 바로 직전이지 않은가. 그리고 더는 불편한 곳에서 프리아를 안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황제가 되지 않으셨다면 뭘 하고 싶으셨어요?”
손끝에 감기는 머리카락을 연신 쓰다듬으며 오웬이 프리아의 물음에 대답했다.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어렸을 때 용을 무찌르는 기사가 되고 싶다고 말하고 다니긴 했지.”
“아, 저도. 그런데 용은 실제로는 없다고 유모가 말해 줬어요.”
괴물도 진짜가 아니고 용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한 유모가 미워서 숨어서 한참을 나오지 않다가 결국 밤이 되자 무서워서 엉엉 울어 버렸던 과거가 있다.
“제국이 안정되면 바다를 보러 갈까. 아니면 네 고향에 가 보는 것도 좋겠어.”
“정말요?”
알훼니아에 갈 수 있다는 오웬의 말에 프리아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앞으로도 웃게 하려면 이런 말을 해 줘야겠어. 돌팔이 따위는 오가는 것도 황제의 명에 따라야하지만 자신은 얼마든지 프리아를 데리고 다른 곳에 갈 수 있지 않은가.
“당장은 안 돼. 대신들이 난리를 칠 거라서. 몇 년 후에 데려가 줄게. 기다려.”
몇 년 후라. 이 몸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기르가 온 이후 더는 발작이 일어나지 않았다. 약을 잘 먹고 몸 상태를 관리한다면 1, 2년은 버틸 수 있을까? 어쩌면 그보다 더.
“기다릴게요, 폐하. 데려가 주세요.”
프리아의 기쁜 대답을 들은 오웬이 조금 쑥스러운 얼굴로 손짓했다. 예? 가까이 얼굴을 가져간 프리아의 귓가로 오웬이 속삭였다. 둘만 있을 때는 내 이름을 불러.
기어코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시종의 옆구리를 시종관이 손가락으로 꼬집었다. 아픔에 깜짝 놀라 잠이 깬 시종이 황급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새들도 잠이 든 깊은 밤, 황궁 시종들만이 밤이슬을 맞으며 호숫가에 서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며 후궁을 별채로 데리고 들어갔던 황제가 이번에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다시 등장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군요, 폐하. 황제와 후궁의 애정 행각을 지켜보느라 밤을 새운 시종들이 원망스러운 눈빛을 감추며 예를 차렸다. 다행히 이제 본궁으로 돌아갈 생각이 든 모양이다.
“아침은 백조궁에서 먹겠다.”
뭐라굽쇼?
후궁의 손을 잡으며 황제가 하는 말에 시종관의 눈빛이 흔들렸다. 백조궁으로 돌아간다니. 이미 교대시간도 지났는데 자신들은 언제가 되어야 쉴 수 있단 말인가.
“폐하, 피곤하실 텐데 돌아가 쉬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표정이 부드러워진 후궁이 하는 말에 시종들이 앞다투어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우리들도 좀 쉬게 해 달라.
“안 피곤해. 너 밥 먹는 거 보고 갈 거야.”
“그럼 같이 먹어요, 폐하.”
역시 미소가 떠나지 않는 얼굴로 프리아가 대답했다. 손을 잡은 두 사람이 백조궁 방향으로 돌아서는 걸 본 시종들이 지친 다리를 따라 움직였다. 부디 식사시간은 짧게 가지시기를.
백조궁으로 바로 돌아간 것도 아니다. 지난밤 냉랭한 분위기에서 돌아보았던 정원을 이번엔 눈에서 꿀 떨어질 듯 다디단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천천히 다시 걸어갔다. 아침이슬을 떨구며 꽃잎을 펴기 시작한 나무들에게서 청신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그 사이를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림처럼 아름다웠으나 시종들은 졸려 죽을 지경이었다.
겨우 백조궁에 도착한 그들은 황제와 후궁이 2층으로 올라가자마자 로비 의자에 지친 몸을 기대었다. 일찍 일어난 시종장이 백조궁으로 찾아온 덕분에 시종관도 임무를 교대하고 쉴 수 있었다.
백조궁의 시녀들 또한 황제를 따라 나간 후궁이 돌아오지 않아 초조해하던 차였다. 지난밤 상황을 보러 간 백조궁 시종이 아직 두 분 다 근처에 계시다는 본궁 시종의 말을 전해 주기는 했으나 어떤 분위기인지 알 수 없어 걱정했던 것이다. 지난번처럼 기절한 채 실려 오시면 어쩌나 유디스는 문 앞에서 밤을 지새우며 동동거렸다.
멀쩡히 걸어서, 그것도 황제의 손을 잡고 돌아온 프리아의 모습에 시녀들이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입을 벌렸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건 쩔쩔매는 시종장을 곁에 세운 기르뿐이었다.
“제가 걱정하실 필요 없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하. 두 분 다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저하께서도 염려 놓으십시오.”
“몸도 좋지 않은 애를 또 밖으로 데리고 나갔으니 하는 말 아닌가. 감기 들면 어쩌려고 밤이슬을 맞게 해?”
정작 밤이슬을 맞은 건 시종들뿐이었지만 사실을 알았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일교차가 심해져 밤에는 이미 알훼니아라면 초겨울이라고 느낄 정도로 온도가 내려가 있던 것이다. 저 들뜬 표정을 보니 추운 것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구석에 서 있던 자신과 시종장도 못 본 채로 내실로 들어가는 오웬과 프리아의 상기된 표정을 바라보며 기르는 혀를 끌끌 찼다.
“제가 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저하도 이제 쉬십시오. 저희는 이제 무리하면 골병드는 나이가 아닙니까.”
한창 기운찬 청년들보다는 노구의 몸을 더 챙겨야 할 때다. 쑤시기 시작한 허리를 두드리며 시종장이 기르에게 휴식을 권했다.
“나는 아직 말짱해. 오히려 궁에 있을 때보다 체력이 더 좋아졌네.”
시종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제힘으로 살아가다보니 궁 안에서 연구만 거듭하던 때에 비해 근력이 붙었다. 채집활동을 나가다보면 수일씩 노숙하는 일도 잦았기에 나무를 베고 불을 피우고, 작은 짐승을 잡아 끼니를 때우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체력도 늘어났다.
“……비법 좀 알려 주십시오.”
억울함과 부러움이 반반 섞인 얼굴로 시종장이 기르를 올려다보았다. 요즘 들어 몸이 전 같지가 않다. 젊을 때 그대로까지는 아니어도 한 10년만 젊어지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도 자네를 도와줄 수가 없네. 내가 가장 알고 싶어.”
당시 연구실에는 다른 실험을 위해 잡아두었던 동물들이 여러 마리였다. 증기와 연기에 휩싸여 기절했다가 깨어났을 때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는 기르 하나뿐이었다. 살 만큼 산 자신의 목숨 대신 프리아의 시간을 멈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태산처럼 강건했던 형도 마지막엔 나무껍질처럼 쪼그라들어 죽음을 맞았다하니 그도 결국 영생의 비밀은 찾지 못했던 것 같다.
“주방장을 불러 와.”
유독 풀이 많은 프리아의 샐러드 접시를 발견한 오웬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고기를 더 먹여도 모자랄 판에 웬 풀밭이란 말인가.
“건강에 좋은 식물입니다. 회향과 병꽃풀, 크레송, 쑥과 미나리, 디기탈리스가 들어 있죠.”
애꿎은 주방장이 경을 치르기 전에 기르가 선수를 쳤다. 프리아의 시선을 피해 몰래 돌팔이를 한 번 노려본 후 오웬은 시종장에게 손짓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저 접시 이리 가져 와.”
먹고 있던 접시를 갑자기 빼앗기게 된 프리아가 기르 몰래 입술을 끌어올렸다. 몸에 좋다는 건 알지만 샐러드는 심각하게 맛이 없다 못해 지독하게 쓰기까지 했다.
“이걸 어떻게 먹지?”
윽, 입에 넣고 씹자마자 넘어오는 쓴맛에 얼굴을 잔뜩 찌푸린 오웬이 시종장에게 다시 손짓했다. 시종장이 들고 있는 손수건에 풀을 뱉어 내고 급히 레몬 넣은 물로 입을 헹궜다.
“입에 쓰긴 하지만 몸에 좋습니다. 환절기라 몸이 차가운 프리아 님은 꼭 드셔야 할 약이죠.”
“그래? 그럼 더 먹어.”
접시가 다시 프리아에게로 돌아왔다. 기르와 오웬을 번갈아 바라보던 프리아가 결국 한숨을 쉬고 포크를 다시 집어 들었다.
“많이 먹어. 다 먹어.”
덧붙인 오웬의 말에 프리아가 입술을 씰룩거렸다. 본인은 한 입도 참지 못한 것을 많이 먹으라니. 언젠가 감기라도 들면 마리포사를 잔뜩 따와 제대로 복수해 줄 작정이다.
다른 식물은 그저 쓸 뿐이지만 디기탈리스는 독성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날 것으로 먹으면 복통을 유발하는 부작용이 있는 식물이었다. 심장병에 효과가 있어 프리아에게는 꼭 필요한 약이기도 했다. 이왕 가져간 것 많이나 먹을 것이지. 아쉬운 표정으로 기르가 메인요리가 담긴 오웬의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조카 손주의 복통을 바라는 줄도 모르고 시종장이 든든하다는 표정으로 기르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내일 사냥대회가 있어서 오늘은 준비로 바빠 더는 오지 못해. 내일 끝나면 바로 올게.”
겁나 바쁘죠. 그걸 아시는 분께서! 또 발걸음을 떼지도 못하시고! 또다시 백조궁 문 앞에서 시간을 지체하고 있는 황제의 등을 시종들이 지친 얼굴로 바라보았다. 폐하, 제발 이제 그만 돌아가면 안 될까요?
“네, 조심하세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안부 인사를 밀어나 되는 것처럼 속삭인 프리아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조심할게.”
대담한 다짐이라도 하는 것처럼 오웬 역시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분위기 뭐죠. 역시나 문 앞에 나와 황제를 배웅하던 백조궁의 시녀들 또한 눈짓을 교환하며 입술을 끌어올렸다. 한참을 프리아만 바라본 채로 돌아서지 못하던 오웬은 곧 정무가 시작된다는 시종장의 알림을 듣고서야 마차로 향하는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애를 너무 순하게 키웠나.’
조금은 화난 것 같더라니 하룻밤 사이에 녹아 다시 설탕물이 되었다. 황제가 어떻게 다독였는지 몰라도 실실 풀어져 선물받은 아이 표정이 된 프리아를 기르는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