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99)화 (100/237)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곁에서 잠든 후궁, 프리아의 얼굴이었다. 실내는 어두워져 있었으나 아직 해가 다 지지 않아 눈앞의 사물 정도는 식별이 가능했다. 모로 누워 잠이 든 불편한 자세였는데도 불구하고 정신은 더 없이 맑았다. 어지러운 꿈도 꾸지 않고 중간에 깨어나는 일도 없이 이렇게 숙면을 취한 것이 얼마 만의 일이던가.

한쪽 손은 잠든 이에게 내어준 채로 나머지 손을 들어 그의 얼굴로 가져갔다. 조심스럽게 매만지는 손끝에 보드라운 살결이 묻어난다. 네 손가락으로 뺨을 감싸면서 엄지를 들어 아랫입술을 문질렀다. 꾸욱 누르자 하얗고 단단한 윗니의 감촉이 엄지로 느껴졌다.

한참을 지분거리는 오웬의 손길에 잠든 후궁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찌푸리는 미간과 이어진 눈썹을 쓰다듬다가 콧날을 따라 내려와 다시 입술로 돌아왔다. 고개를 후궁 쪽으로 더 기울이자 이마가 맞닿았다. 입술 또한 닿기 직전이다. 숨결이 오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오웬은 어둠이 내려 눈앞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프리아를 바라보았다.

장난을 치는 것처럼 간질였다가 부드럽게 도닥이는 손길에 눈을 떴다. 방이 어두워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일으키려던 몸이 잡힌 손에 의해 끌려갔다. 커다랗고 단단한 몸이 프리아를 잡아 제 품에 가뒀다.

“그냥 이대로 있어.”

품 안에서 꿈틀거리는 프리아의 몸을 더욱 단단히 감싸며 오웬이 입을 열었다. 덩굴처럼 몸에 감긴 오웬의 팔다리를 밀어내려 애쓰며 프리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폐하, 저….”

화장실도 가고 싶고 세수도 하고 싶고 무엇보다 배가 너무 고프다. 비록 식사량은 적지만 끼니는 거르지 않았던 터라 공복이 지속된 위장이 허기를 호소했다.

“아직도 졸리세요?”

잠은 혼자서 자. 제발.

덩달아 계획에도 없는 낮잠을 자게 된 덕분에 정작 밤에 정신이 말똥해지고 말았다.

“제가 자리를 피해 드릴 테니 편하게 주무세요.”

한숨을 쉬며 프리아가 하는 말에 오웬 역시 고개를 흔들었다.

“안 졸려. 다 잤어.”

그럼 왜 이러시는 겁니까. 신종 괴롭힘인가. 색사는 거절하더니 왜 이렇게 치대는 거야. 밀착된 까닭에 여전히 존재감을 자랑하는 그것을 프리아는 제 몸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냥 빨리 해 버리고 놔 달라고 할까. 아니다. 괜히 먼저 말을 꺼냈다가 아까처럼 성질만 돋우게 될지도 몰랐다. 이 녀석은 대체 나와 하고 싶은 일이 뭘까.

“폐하, 놔주세요.”

“싫어.”

“왜 싫으신 건데요?”

대답 없이 오웬이 얽힌 팔다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오웬의 목에 닿은 프리아의 입술이 다시 긴 숨을 꺼내놓았다.

그냥 이러고 싶었다. 이유 없이. 굳이 색사를 하지 않아도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공허했던 마음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자꾸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장난치고 싶은 이 마음이 무엇인지 굳이 정의 내리고 싶지 않다. 앞으로도 이렇게 그냥 예뻐하면 되지 않을까.

오웬이 부리는 고집을 후궁은 대부분 받아주었다. 지금처럼. 그것이 체념이라는 걸 알지 못하고 혼자만의 기쁨에 젖어 들었다. 결국 버둥거리는 몸짓이 잦아든 몸을 오웬은 소중히 끌어안았다.

“잠시 정원을 둘러보고 싶은데.”

결국 한참이 지나서야 프리아를 놓아주었던 오웬은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도 본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황제가 일어서자 일제히 따라나섰던 시종들은 현관에서 다시 발이 묶였다. 황제를 배웅하기 위해 내려왔던 프리아는 자신을 돌아보며 고갯짓하는 시선에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여기는 네 처소이니 앞장서도록 해.”

폐하께서 프리아 님과 헤어지고 싶지 않으신가 봐요. 곁에 선 유디스가 속닥거리는 말에도 프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백조궁을 찾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거늘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안내를 청하는 오웬이 프리아는 이해되지 않았다. 갑자기 트집이 잡고 싶어졌거나 이상한 장난으로 또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나마 손톱 크기만 하게 떠 있던 달을 몰려온 구름이 덮었다. 앞뒤에서 시종들이 등불을 들고 길을 비췄다. 설명을 청했으면서도 꽃과 나무와 설치된 시설물 대신 자신의 옆얼굴만을 바라보고 있는 오웬을 프리아는 외면했다.

“다 아시는 곳이 아닙니까?”

“왜 웃지 않지?”

대답 대신 기막힌 질문이 돌아왔다.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프리아를 바라보며 오웬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몸이 좋지 않은 건가?”

“아니요, 괜찮습니다. 제가 의무 하나를 또 깜빡했네요.”

걱정이 되어서 물어본 것뿐인데 굳어지는 프리아의 표정을 오웬은 답답한 마음으로 내려다보았다.

“왜 화를 내는 거야?”

황제는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겠지. 제멋대로 내킬 때마다 베푸는 다정은 폭력이나 다름없다. 차라리 자신을 강압적으로 안았던 그때가 더욱 견디기 쉬웠다. 오웬이 따뜻한 눈길로 바라볼 때마다, 다정한 손길로 매만질 때마다 마음에 상처가 푹푹 패였다.

“화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화내고 있잖아.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얘기를 해.”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를 좀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 또다시 내칠 거면서 잠깐의 흥미로 나를 흔들어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길에 멈춰 선 황제와 후궁을 지켜보던 시종들이 다가왔다. 초조한 표정을 한 오웬이 손짓으로 다시 그들을 물렸다. 후궁이 또 화가 난 것 같은데 어떻게 풀어줘야 할지를 모르겠다. 답답한 마음에 두서없이 주위를 둘러보던 오웬이 호숫가에 있는 건물 하나를 발견했다. 작은 집으로 후궁을 데려가는 황제를 본 시종들이 거리를 유지한 채 주변에서 대기했다.

구름에서 벗어난 조각달이 창문으로 들어와 실내의 어둠을 몰아냈다. 만월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적은 양의 빛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어둠은 제 힘을 잃고 구석으로 물러났다.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해 두는데 안으려고 데려온 게 아니야.”

구석에 있던 장의자를 끌어와 밖이 내려다보이는 창 앞에 놓은 오웬이 프리아를 그 위에 앉혔다. 오웬이 잡고 있던 손에서 벗어난 프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표정은 그 사이 무심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냥 안으세요.”

“너는 왜 자꾸!”

울컥한 마음에 목소리를 높였던 오웬이 표정을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숲에서 거칠게 취했던 날 이후로 후궁의 마음이 닫힌 건 알고 있었다. 이제 더는 자신을 싫어하지 않느냐는 후궁의 질문에 오웬은 최악의 형태로 답했다.

싫어하지 않지. 당연히 싫어하지 않는다. 그걸 프리아 또한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 그 질문은 단순히 호오를 묻는 것이 아니라 프리아에 대한 오웬의 진심을 알고 싶다는 의미가 되었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깊은 거부감이 몰려왔다. 어느새 잊고 있던 남색에 대한 혐오감까지 순식간에 밀려들어 왔다. 사실 그건 남색이 아니라 부친과 그의 정부에게 느꼈던 혐오이자 증오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전혀 강하지 않아.’

아서의 사고 후 매일 밤을 울며 보냈다. 형이 죽을까 봐, 자신을 떠날까 봐 무서워서 울었다. 형이 떠난 후에는 자신이 홀로 짊어지게 된 황좌에 짓눌려 숨 막히는 공포로 수많은 밤을 불면으로 지새웠다. 형이라면 자애롭고 지혜로운 황제가 되었겠지만 자신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럴 자신도 능력도 없다고 생각했다.

장난을 좋아하고 다정하며 두려움이 많던 소년을 오웬은 서서히 지워 없앴다. 도망가고 싶은 충동과 싸우며 대관식날 새벽이 되어서야 간신히 그 소년을 제 몸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오웬은 그렇게 차갑고 냉정한 황제가 되었다. 아는 이가 몇 되지 않던 그 나약한 소년은 시종장의 추억에서만 가끔 되살아날 뿐이었다.

‘폐하께서 예전처럼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시종장의 그 말을 그저 바람일 뿐이라 생각해 흘려들었다. 분명 없애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자신은 그 소년으로 돌아가 있다는 걸 후궁의 물음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죽여도 죽여도 되살아난다.

이 사내, 프리아 앞에 서면.

“…왜 자꾸 나를…….”

살려 내는 거야.

내가 뭘 했다고.

무참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오웬 앞에서 프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도 폐하가 예전처럼 절 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몸만 취하고 가던 그때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안았던 후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 예전이 언제를 말하는 거야?”

몇 시간 전 프리아가 물었던 질문을 이번엔 오웬이 꺼내놓았다.

“폐하를 처음 뵈었을 때. 아니 그 전으로.”

만나기 전으로. 서로를 알 수 없었던 그때로.

“그게 무슨 말이야? 더는 찾아오지 말란 뜻인가? 그걸 원한다고?”

“예.”

담담한 표정으로 프리아가 내놓은 대답에 오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도 내키는 대로 찾아왔다가 발길을 끊었음에도 후궁이 그렇게 요구하니 사형 선고를 들은 사람처럼 몸이 와들와들 떨려왔다.

“네가 진짜 그걸 원한다고?”

“싫으시면 그냥 폐하 마음대로 하세요.”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그럼 앞으로 웃지 않고 그런 표정만 하고 있을 거야?”

“제 표정이 중요하시다면 앞으로는 많이 웃도록 하겠습니다.”

프리아는 억지로 입술을 끌어올렸다. 웃으라 말하던 황제의 표정이 더욱 참담해졌다.

“누가 억지로 웃으라고 했어? 네가 진심으로 웃기를 바라는 거잖아.”

내게 환하게 웃어 주기를. 진심으로 나와 있을 때 즐겁기를 바란다.

“진심이요? 제 진심이 언제부터 폐하께 중요해졌나요? 왜 제 감정에 신경을 쓰세요?”

“네가 그 돌팔이한테만 자꾸 웃어 주잖아!”

“예?”

돌팔이라니. 기르를 말하는 건가. 내가 언제 기르만 보고 웃었다고. 그런데 황제가 자신이 기르와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던가?

“네가 자꾸 아프니까 그놈을 쫓아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너에게 화를 내지도 못하겠어.”

기르가 뭘 잘못했다고 쫓아낸다는 거지. 제 사람 밉다는 오웬의 말에 프리아 역시 반발심이 들었다.

“지금 화내고 계시잖아요?”

축 처진 풀잎같이 굴던 프리아의 태도가 바뀌었다. 돌팔이 놈을 욕했다고 화나서 저러는 건 알지만 그래도 생기가 돌아온 얼굴이 너무나 반가웠다.

“너한테 화내는 거 아니야. 나한테 화내는 거야.”

그럼 거울 보고 말을 하든가. 이참에 다시는 기르를 쫓아낸다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다짐을 받아야겠다. 용감해진 프리아가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고개를 높이 들었다. 그와는 반대로 오웬의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지 않아도 어두워 잘 보이지 않던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풀죽은 아이처럼 고개 숙인 오웬의 입에서 자신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신경이 쓰여. 네가 너무 신경이 쓰여 미치겠어.”

“예?”

잘못 들었나. 프리아가 오웬에게로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섰다. 기르 얘기인가?

“못 들었어요. 다시 말씀해 주세요.”

가까이 다가온 프리아의 얼굴에 오웬이 뒷걸음쳤다. 다시 말할 수는 없다. 어떻게 다시 저 말을 한단 말인가. 그 대신 줄곧 말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말이 입술 밖으로 흘러나왔다.

“네 몸만 취하기를 바란 건 아니야.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프리아의 눈동자가 두 번 깜박였다. 또 듣지 못한 건가. 사실은 사과보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오웬은 숨을 삼키고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좋아. 좋아해.”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눈만 깜빡이고 있는 프리아를 바라보며 오웬이 거듭 입을 열었다.

“네가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와 오래 함께하고 싶어.”

오웬의 고백을 들은 프리아의 얼굴이 울 것처럼 흐려졌다.

“내 곁에 네가 있어 줬으면 좋겠어.”

그건.

그것은.

“안 돼?”

다리의 힘이 풀린 프리아를 안아 다시 장의자에 앉힌 오웬이 무릎을 꿇고 앉아 간절하게 물었다. 자세 따위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렇게 해야 프리아가 고개를 숙여도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속박에서 해방된 소년의 얼굴 위로 조각달이 떠올랐다. 달빛이 내린 얼굴. 그 얼굴 위로 프리아의 손끝이 닿았다.

저도 좋아해요, 폐하. 영원할 수 없지만.

그렇게 말하는 대신 고개를 내려 입술을 겹쳤다. 첫 입맞춤을 하는 소년처럼 숨도 쉬지 못하고 오웬이 떨리는 손을 들어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감쌌다. 오웬의 뺨과 귓가로 가늘고 부드러운 금빛 머리카락이 닿을 적마다 머리끝까지 터지는 전율이 일었다.

나를 살게 하는 이

온전한 나의 것

나의 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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