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98)화 (99/237)

벌써 3시가 되었던가.

곁눈질로 장식장에 놓인 시계를 바라보는 프리아의 눈에 오후 2시 55분을 가리키는 분침과 시침이 보였다. 전에 없이 뜬금없는 방문 예고에 더해 예고한 시간을 지키지도 않다니. 무슨 생각이지?

프리아의 시선을 따라갔던 오웬의 눈도 역시 시계가 알려 주는 현재 시간에 멈췄다. 이런, 너무 빨리 도착했잖아.

오후 티타임을 백조궁에서 가지기로 한 것은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드디어 진짜 기르를 만났다고 떠들어대는 바이런의 수다를 한 귀로 흘리면서 서류작업을 이어갔으나 영 집중이 되지 않았다. 바이런을 집무실에서 쫓아보낸 오웬이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관을 손짓해 불렀다.

‘너는 지금 당장 백조궁으로 가서 나의 방문 소식을 알리도록 해. 오후 3시쯤 가겠다고 전해.’

충직한 시종관이 곧 예를 표한 후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갔다. 3시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굳이 미리 사람을 보내놓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후궁이 앞으로는 불쑥 찾아오지 말고 정식 방문을 해 달라 했으니 오웬은 이렇게라도 알리는 시늉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본궁에서 백조궁과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아 충분히 걸어갈 수 있었다. 시종관은 마차를 타고 갔으니 자신은 걸어간다면 적당한 시간차로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빨리 걸었나.’

오웬이 시계에서 시선을 돌려 애꿎은 바닥의 양탄자를 노려보았다. 고작 5분 일찍 도착한 것만으로 이렇게 눈치를 보게 될 줄이야.

‘왜 왔지?’

프리아 역시 어색한 침묵 속에서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테이블 위만 바라보았다. 피어난 가을꽃을 손질해 가득 꽂아놓은 화병이 제법 화사했다. 자신이 쓰러졌을 때 황제가 다녀갔다고는 하나 전해 듣기만 했을 뿐이다.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황제가 찾아왔던 밤 자신이 다시는 불쑥 찾아오지 말아 달라 부탁했던 이래로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아, 그래서였나? 갑자기 방문하겠다고 미리 알린 이유가. 몇 시간 전도 아니고 알리자마자 들이닥친 걸 보면 역시 그때의 부탁이 기분이 나빠서?

서로를 쳐다보지 못하는 두 사람 사이로 다과를 준비해 온 유디스가 비집고 들어왔다. 시간이 촉박하여 준비한 새 옷을 프리아에게 입혀 주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유디스는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다. 황제가 장미궁을 찾았던 일을 두고 오래 투덜거렸던 유디스였다. 장미궁에는 잠시 머물렀을 뿐이며 그 이후로 찾아가는 일 또한 없었다며 굳이 강조하다가도 분을 참지 못하고 정원에 핀 장미조차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옮겨 심으라며 정원사를 귀찮게 굴기도 했었다.

오랜만에 백조궁을 찾은 황제에게 모든 사용인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말없이 찻잔만 입으로 옮기고 있던 황제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헛기침을 했다.

“다시 올리겠습니다.”

여러 번 입으로 가져갔으나 줄어들지 않는 노란 찻물의 수위에 기겁한 시녀들이 몸을 굽혔다. 호들갑을 떠는 시녀와 시종들을 피곤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것 없으니 다 물러가도록.”

저까지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한 유디스를 황제의 눈짓을 받은 시종관이 데리고 나갔다. 오웬과 프리아, 두 사람이 남은 내실로 다시 침묵이 내렸다. 거슬리는 아랫것들은 사라졌으나 제일 신경 쓰이게 하는 존재가 눈앞에 있어 오웬은 마른 땀이 나는 손바닥을 쥐었다 펴며 입술을 축였다. 차 맛 따위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 프리아의 잔에 담긴 차의 색이 자신의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을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건 뭐지? 다른 차인가?”

“약차입니다. 당분간 차 대신 마시라고 기르가 말해서요.”

“그렇군. 이리 줘.”

그 돌팔이 놈이 말한 둥굴레인지 치커리인지 하는 걸 달인 물인가 보았다. 온통 시커매 보이는 것이 보기에도 영 수상쩍었다.

“예?”

자신이 마시고 있는 찻잔을 넘겨 달라는 듯 손짓하는 오웬의 동작에 프리아가 당황했다. 왜 저러지? 이게 더 맛있어 보이나?

프리아가 넘겨준 검은 물을 입으로 가져간 오웬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쓰고 떫은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뒷맛은 구수하기도 했으나 참고 넘길 만한 맛은 아니었다.

“마실 만하군.”

“입에 맞으시면 본궁으로 보내 드릴까요?”

꽤 쓸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프리아는 입을 열었다. 치커리 외에도 쓴 맛이 느껴지는 여러 약초가 함께 들어간 약차였다.

“아니야. 여기에 와서 마시겠다.”

또 온다고?

프리아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오웬은 황급히 눈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름도 아닌데 내실의 창이 모두 활짝 열려 있었다.

“왜 창문을 다 열어 놓았지? 더운가?”

“향수가 쏟아져 환기를 하기 위해 열어두었습니다. 거슬리시면 자리를 옮길까요?”

“그래, 그러지.”

신경이 온통 프리아의 반응에 쏠려 있어 바로 긍정하고 말았는데 하필 옮긴 자리가 침실이었다. 앉을 곳이라고는 불 꺼진 벽난로 앞에 있는 안락의자 하나밖에 없었으나 하필 커버 교체를 위해 벗겨져 속이 드러난 상태였다.

오웬은 당황했으나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 침대에 앉았다. 프리아 역시 뒤를 따라 침대 위로 올라왔다. 넓은 침대라 불편함은 없었으나 마주 앉고 나니 어쩐지 분위기가 더 요상해졌다.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 무심코 오웬의 눈이 프리아가 입고 있는 옷으로 향했다. 그저 사심 없이 바라보았을 뿐인데 그 시선을 후궁은 오해한 듯했다. 갑자기 옷의 단추를 푸르기 시작한 프리아의 손을 오웬의 손이 붙잡아 제지했다.

“폐하?”

내가 색에 미친 놈도 아니고. 아무리 침대 위라고는 하지만 그냥 쳐다보기만 했는데 옷을 벗을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오웬은 갑자기 서러워졌다.

“지금 뭐하는 거야?”

오웬의 추궁을 들은 프리아가 영문을 모른 채 눈동자를 깜박였다. 이거 아니야?

“저는 그저…. 폐하께서, 의무를 다하라고 하셨기에.”

먼저 효용가치니 뭐니 원하는 건 정사일 뿐이라고 말한 게 누군데. 하려고 온 게 아니라면 뭐 하러 여기까지 찾아왔단 말인가.

“후궁의 의무에 잠자리만 있어?”

“저는 아이는 낳지 못하는데요?”

“그게 아니라! 왜 그런 쪽으로만 생각해?”

“예?”

답답해 죽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오웬의 모습에 프리아 역시 기가 찼다.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게 만든 게 누군데?

“얘기만 해도 되잖아. 그냥 차 마시면서 대화나 나누려고 온 거라고.”

“무슨 얘기요?”

그럼 진작 말을 하든가. 가만히 있다가 먼저 침대에 가서 앉은 게 누군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며 자꾸 몸만 쳐다봤지 않은가?

무슨 이야기냐고 묻는 프리아의 질문에 오웬의 말문이 막혔다. 사실 꼭 할 이야기가 있어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그냥 얼굴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네가 후궁의 의무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다시 얘기해 주려고 왔다.”

아무 말이나 꺼내놓은 오웬의 입술은 다시 닫힐 줄을 몰랐다.

“너는 후궁이니까 나를 따르고 기쁘게 해 주고 경애해야지. 내 후궁이니까.”

“어떻게요?”

뭘 해서 기쁘게 하라는 거지?

순수한 의문을 담은 프리아의 시선이 흥분한 나머지 들썩이는 오웬의 다리 사이로 향했다. 이거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당황한 오웬이 베개를 들어 어느새 살짝 솟아오른 다리 사이의 물건을 가렸다.

“하시고 싶지 않으세요?”

하고 싶다. 하고 싶은 동시에 진짜 하기 싫다. 이런 기분으로는 하고 싶지 않았다.

“안 해! 당장 그 손 내려. 어서 내려놔.”

자신이 손을 뗀 후에도 여전히 단추를 붙잡고 있었던 프리아의 손등을 보며 오웬이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손으로 벗겨 주기 전까지는 함부로 벗지 마. 내 앞에서도. 다른 사람 앞에서도.”

“예?”

아니 그럼 시녀들이 일을 할 수 없는데.

내손을 쓰지 말라, 시녀들 손도 쓰지 말라. 그러면 오웬 네가 옷 갈아입히고 목욕까지 시켜 줄거야?

하루 종일 붙어 있을 수도 없는 일인데 무리한 요구라는 걸 깨달은 오웬이 뒷말을 수정했다.

“시녀들은 빼고.”

왜 이러는 걸까? 뭘 잘못 먹었나.

물끄러미 쳐다보는 프리아의 파란 눈이 자꾸 자신에게 진심을 물어오는 것 같아서 오웬은 고개를 숙였다.

“……예전처럼. 그냥 그렇게 해.”

그냥 나를 좋아하면 되잖아. 예전처럼.

“어느 예전?”

황제를 처음 보았던 초야에서부터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에 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변덕스러운 황제의 태도만큼이나 프리아의 마음 자세 또한 함께 바뀌었다.

“그만 좀 물어봐. ……알고 있잖아.”

더 이상의 질문은 피하고 싶은 오웬이 프리아의 어깨를 잡아 자리에 눕히고 자신 역시 그 옆에 누웠다.

“잠을 못 자서, 좀 자야겠어.”

자려고 왔습니까? 아니, 자려고 오는 곳이 맞기는 하지만. 그 잠이 아니라 다른 잠을 청하고 있는 오웬을 어이없어하며 프리아는 말똥말똥한 눈을 옆으로 돌렸다. 자고 싶다는 말은 진짜였는지 곧 오웬에게서 고른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저는 졸리지 않는데요, 폐하.”

난감하다. 한손을 잠든 오웬이 맞잡고 있어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유디스를 불러 책이라도 가져달라고 해야겠다. 오웬의 잠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며 프리아는 남은 팔을 뻗어 유디스의 방과 연결된 설렁줄을 당겼다. 수차례 당겨 보았으나 통 소식이 없었다. 한숨을 쉬며 오웬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던 프리아의 눈에도 어느덧 잠이 내렸다. 고요한 침실에 잠든 숨소리만이 가득하다.

영 기척이 없다. 내실에서 쫓겨난 후, 문에 귀를 대고 있던 유디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아무 말도 없으시지. 도저히 궁금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유디스는 내실의 문을 아주 살짝 잡아당겨 열었다.

다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내실에는 흰 커튼만이 흩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오웬과 프리아의 모습을 찾아 헤매던 유디스의 시선이 결국 내실과 이어진 침실의 문으로 향했다. 침실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어머.”

잤네, 잤어.

마찬가지로 내실의 상황을 궁금해하는 시녀들에게 유디스는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머, 대낮부터.”

“역시 젊어.”

“이러려고 나가라고 했구만.”

수근대는 시녀들 또한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미궁의 로제타가 아무리 아름답다한들 아직은 우리 프리아 님이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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