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 일어나셨습니까? 상쾌한 아침입니다. 안녕히 주무셨….”
도저히 안녕히 잠을 취했다고는 볼 수 없는 황제의 몰골에 시종장이 말끝을 흐렸다. 어둡게 내려앉은 눈밑과 곤두선 표정을 보아하니 또 잠을 이루시지 못한 것 같다.
“폐하, 안색이 좋지 못하십니다. 불편한 곳이 있으시면 태의를 불러올까요?”
“아니, 그 돌팔이 의사를 불러.”
음산한 표정으로 입을 연 황제의 말에 시종장이 화들짝 놀랐다.
“예? 기르 저, 아니 기르 님은 어쩐 일로?”
“시종장, 언제부터 내 말에 토를 달았지?”
“토, 토를 단 것이 아닙니다. 그저 너무 이른 시간이라 실례가 되지 않을까 하여.”
“그럼 실례가 되지 않는 시간까지 기다렸다 모셔 와야 하나? 내가 귀하신 분께 퍽이나 실례되는 일을 저지를 뻔했군. 지적 고마워.”
가시가 돋은 비아냥을 들은 시종장이 한숨을 내쉬며 오웬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백조궁에 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우선 식사부터 하시지요.”
“안 먹어.”
뭐라굽쇼? 돌아본 시종장의 얼굴에 곤혹이 실렸다. 아니, 이게 무슨 어린애 같은 투정이시란 말입니까. 폐하.
시종장이 어르고 달래 씻기고 입히고 먹여 놓은 젊은 황제가 집무실 의자 위에 앉아 눈앞의 사내를 노려보았다.
“찾으셨습니까? 폐하.”
갑작스러운 오웬의 부름에도 사내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외려 뒤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시종장에게서 긴장한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네가 그렇게 뛰어난 의술을 지니고 있다지?”
“보잘 것 없는 기술 몇 가지를 익혔을 뿐입니다. 과찬이십니다.”
칭찬한 거 아닌데?
담담하게 대답하는 사내의 태도에 오웬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뭐 이렇게 뻔뻔한 놈이 다 있어?
“자신만만하군. 요 근래 통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대가 나의 불면을 치료해 줄 수 있겠는가?”
“고된 정무로 폐하의 몸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자신의 말에 덧붙이는 시종장의 염려에 오웬의 기분이 상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그깟 정무 하나 이겨 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잖아. 몸져누웠던 선황의 일을 대신하는 것은 물론 취임 초기 기강이 흐트러져 있었던 대신들과 공국들을 엄히 다스려 이만큼 안정되게 만들어 놓은 것도 오웬이었다. 며칠씩 밤을 새우고도 멀쩡했던 몸인데 왜 사람을 환자로 만들어 놓는 거야?
“태의가 계신데 제가 감히 폐하께 처방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그저 불면에 좋은 약초를 몇 가지 골라 시종장님에게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겨우 약초 몇 가지라. 효과는 확실한가?”
어떻게든 기르에게 트집을 잡고 싶은 오웬이 삐딱한 자세로 다시 물었다.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몸에 좋은 약이라도 개인차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탈이 나면 내 탓이란 뜻이군.”
“그 누구의 탓도 아니지요. 개인차일 뿐이니까요.”
기르가 하는 말마다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오웬의 말에 시종장이 고개를 돌리며 이마를 짚었다. 창피합니다, 폐하.
“내 후궁에게는 어떤 처방을 내렸지?”
불면증은 핑계고 이제부터가 본론일 것이다. 온몸으로 불손을 내보이는 황제와는 다르게 정중한 태도로 기르가 입을 열었다.
“기운을 북돋아주는 채소를 매끼마다 올리게 했습니다. 치커리와 둥굴레를 달여 물처럼 드시게 하고 자주 산책할 것을 권했습니다.”
“처방은 그게 다인가?”
과연 돌팔이군.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처방에 오웬이 실소를 지었다. 이런 놈을 여태 기다리고 있었다니.
“무엇보다 마음을 편히 가지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몸이 편해야 마음도 편해지기는 하지만 마음이 편해지면 몸도 편해질 수 있는 법이니까요.”
“굉장한 궤변이군. 대단한 명의를 지금껏 몰라보았어.”
“과찬이십니다. 폐하께서도 마음을 편하게 가지신다면 숙면에 드실 수 있을 겁니다.”
“고견에 감사하네. 그만 나가 봐.”
내쫓는 듯한 오웬의 말에 기르가 태연히 예를 표했다. 서 있던 자리에서 물러나는 기르의 등을 오웬이 다시 돌려세웠다.
“내 후궁이 어릴 때부터 자네 손에 컸다고 들었는데 어찌 된 연유인가.”
“프리아 님을 돌보던 유모가 죽어 그 자리를 대신했을 뿐입니다. 제 서툰 보살핌에도 훌륭히 성장하셨지요.”
“설마 제 손으로 키운 아이에게 손을 대는 일은 없겠지?”
곁에서 황제의 무례한 질문을 함께 들은 시종장이 놀라 딸꾹질을 시작했다. 폐, 폐하 종조부 어르신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건 기르 저하뿐만이 아니라 폐하를 자식처럼 키운 제게도 실례되는 말씀이시라고요.
“프리아 님께 체벌을 내린 적은 없습니다.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황제의 우문을 기르가 현명하게 비껴나갔다. 담담한 표정을 한 기르를 쏘아보며 오웬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래야지. 이젠 내 후궁이니까.”
집무실을 빠져나간 기르의 등을 시종장이 쫓았다. 거죽만 늙지 않은 것이 아니라 체력도 그대로인지 육십이 넘은 노인이 쫓기에는 지나치게 빠른 걸음이었다.
“기르 저하! 아이고,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걸음을 멈춘 기르에게 달려온 시종장이 격한 숨을 몰아쉬었다.
“안톤 자네도 운동을 좀 하게. 그 몸으로 젊은 애 보필을 어찌 하겠나?”
한심하단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기르에게 시종장이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했다.
“저하, 제 나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올해 예순셋입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그럼 내 나이는 예순다섯이겠어.”
제 나이를 프리아에게 말해 줄 생각에 기르가 기쁜 얼굴을 했다.
“누가 저하를 예순다섯이나 되었다고 믿겠습니까. 그러니 폐하께서도 실례되는 발언을 하시게 된 것이지요. 저하께서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한참 어린 조카 손주가 아닙니까?”
“다 자네가 응석을 받아준 결과로군. 올해 나이가 몇이지?”
기르가 얼굴을 찌푸리며 시종장에게 물었다.
“얼마 전에 스무 살 생일을 맞으셨습니다. 좀 일찍 오셨다면 탄신제를 보셨을 텐데요. 제가 열심히 준비했답니다.”
탄신제를 무사히 치러낸 자신의 자랑과 고생담을 늘어놓기 시작한 시종장의 입을 기르가 혀를 차 다물게 했다.
“스물이면 그렇게 어리지도 않군. 지금까지 제 맘에 드는 이에게 저렇게 대해왔나?”
주변에 여인도 사내도 많았을 텐데 누구도 따끔하게 가르쳐 주지 않은 모양이다. 황손이라 절절매며 받아주기만 했겠지. 시종장처럼.
“그것이… 실은 처음이십니다.”
제 일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며 시종장이 모기만 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처음이라고? 스무 살이 되도록?”
“여인도 사내도 품은 적이 없으십니다. 프리아 님이 오시기 전까지는요.”
동정이었단 말인가. 시종장의 대답을 들은 기르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품지는 않았어도 마음 맞은 여인이나 사내는 있지 않았겠는가? 인물이 나쁘지는 않아 보이던데.”
“나쁘지 않다 뿐입니까? 제국에서 제일가는 헌헌장부시지요. 지금껏 우리 폐하보다 잘난 사내는 본 적이 없습니다.”
“황궁 말고 다른 곳에도 가 보지 그래? 자네의 세계관은 지나치게 좁군.”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말하는 시종장의 허세에 기르가 핀잔을 놓았다. 기죽지 않고 시종장이 기르에게 반격을 시도했다.
“프리아 님은 어떠셨습니까? 제국에 오시기 전의 일은 알 수가 없어서요. 알훼니아에 성혼하지 않은 공자님이 있다하여 저도 매우 놀랐습니다. 형제분들과 견주어도 혼인이 꽤 늦은 편이지 않습니까?”
“우리 애는 인기가 많았네. 손위의 형제가 혼인이 늦어 덩달아 그렇게 된 것이야.”
어렸을 때부터 말썽이 심했던 대공가의 늦둥이 넷째의 혼인을 입에 올리며 기르가 불편한 심기를 내보였다.
“그럼 프리아 님께서는 연애 경험이 풍부하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런 것치고는…….”
황제에게 홀딱 빠져 있던 프리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시종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우리 폐하께서 너무 잘나신 탓인가? 하긴 남편 있는 귀족 여인들도 흠모한다 넋을 놓곤 했으니.
“연애 얘기야? 그런 거라면 나를 끼워줘야지!”
오웬의 집무실로 가던 중에 낯선 사내와 서 있는 시종장을 발견한 바이런이 두 사람 사이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이고, 깜짝이야! 바이런 님. 기척도 없이 무슨 일이십니까?”
“오웬을 놀리러 가는 중인데 어디선가 연애 이야기가 들려와서 말이야. 누가 경험이 풍부하다고? 나?”
경험이 풍부하다 못해 넘쳐흐르는 바이런의 등장에 시종장이 입을 다물었다. 시선을 회피하는 시종장을 귀찮게 추궁하던 바이런이 기르를 향해 돌아보며 다정하게 눈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는 분이시네. 안녕하세요? 바이런이라고 합니다.”
“바이런 님이시군요. 프리아 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기르라고 합니다.”
기르가 악수를 건네며 하는 말에 바이런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혹시 알훼니아에서 오신? 그 ‘기르’ 님이십니까? 프리아의 주치의인?”
“예, 제가 바로 기르입니다. 구해 주신 의학서는 잘 받았습니다.”
“와,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제가 얼마나 만나 뵙고 싶었다고요. 시종장도 기억하지? 내가 예전에 기르, 아니 기르 씨를 찾아 다녔었잖아?”
기르의 손을 힘차게 흔들며 바이런이 반가운 눈빛을 보냈다. 아이고, 바이런 님, 기르 씨라니요. 저분은……. 황제에 이어 연이어 무례를 범하는 바이런을 차마 말리지도 못하는 시종장이 끙끙 앓는 소리만 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친구할까요? 그 김에 백조궁도 놀러가고요. 오웬 빼놓고 저만 갈게요.”
만난 지 몇 분도 되지 않아 친구하자 청하는 바이런의 스스럼없는 태도에 기르가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프리아와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지 듣지 않아도 짐작 가능한 인물이었다.
“폐하께서 오늘 오후 3시경에 방문하시겠다고 프리아 님께 말씀드리라 하셨습니다.”
갑자기 웬 전언인가. 지금껏 미리 알리지 않고도 잘만 출입했던 황제의 방문 예고에 프리아가 의아한 눈빛을 시종관에게 보냈다.
“지금이 벌써 오후 2시 45분인데?”
어차피 곧 들이닥칠 것을 뭐하러 힘들게 사람을 보냈는가. 의미 없네. 그렇게 생각하는 프리아와는 다르게 사색이 된 시녀들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올가 님! 어제 도착한 프리아 님의 새 옷을 가져다주세요!”
“네. 다녀오겠습니다.”
“유디스 님! 향수병이 안 열려요! 이게 왜… 꺄아악!”
서두르던 이사벨이 들고 있던 향수병을 놓치고 말았다. 방 안 가득 풍기는 향수 냄새에 시녀들이 코를 찌푸렸다. 환기를 위해 전부 열어 둔 창에서 바람이 휘몰아쳤다. 매듭이 풀린 커튼이 크게 부풀어 프리아의 시야를 가렸다. 잦아든 바람과 함께 커튼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을 때 긴장한 표정을 한 황제가 프리아의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