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새 자작나무 잎사귀 가득 노란 물이 들었다.
바람이 나무 사이를 가로지를 때마다 마른 잎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늘씬한 흰 몸통 가득 깊은 상흔을 달고 있는 나무들은 모두 비슷해 보였다. 황제에 의해 눕혀졌던 자리가 어디쯤이었는지 프리아는 찾아낼 수 없었다. 그날 퍼부었던 빗줄기가 무색하게 마른 땅을 밟을 적마다 낙엽이 파삭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난 여기가 제일 마음에 들어.”
드디어 도착한 정상에서 프리아는 가쁜 숨을 내쉬며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 황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여전히 높은 곳을 좋아하시는군요.”
기르 역시 시선을 발아래 황궁으로 두었다. 사람을 압도하던 장대한 건물들이 코담뱃갑 크기로 줄어들어 보였다. 수십 년이 지났어도 황궁은 변한 것이 없다. 그 안을 채운 이들만 바뀌었을 뿐이다.
“저기 보이는 작은 성이 제비궁이야. 그리고 저 둥근 건물이 중앙궁, 그 뒤에 보이는 게 목련궁이고 장미궁은 저 뒤쪽, 그리고 저 큰 건물은 기르도 가 봤지? 본궁이야. 그리고 저긴 장서관인데 가 보면 기르도 좋아할 거야.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이 수련관이야.”
황궁에 든 이래로 지금까지 가 보았던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프리아가 말했다. 장미궁은 그저 입구를 스쳐지나갔을 뿐이고 목련궁 역시 장서관에서 만난 레지나와 대화하다 문 앞까지 가보았을 뿐이지만 위치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친근감이 들었다.
“호흡이 아직 거칩니다. 여기 앉아 잠시 쉬도록 하세요.”
다가온 기르가 빠르게 뛰는 프리아의 맥박을 헤아렸다. 그리고 주변의 넓적한 바위 위로 프리아를 앉히더니 허리에 매어둔 주머니에서 물병을 꺼내 건넸다.
입 안을 채우는 시원한 물을 연거푸 들이켜던 프리아가 곧 목 안쪽에서 올라오는 쓴 맛에 얼굴을 찌푸렸다.
“기르, 또 이상한 약초 넣었지?”
“이상하다니요. 제 한 몸 희생해 프리아를 건강하게 만들어줄 텐데 감사하게 생각해야죠.”
어린 아이였을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다. 약초 달인 물과 기르의 잔소리가 이렇게 반갑게 느껴지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성의 뜰에 심었던 은방울꽃을 기억하십니까?”
흔들면 방울소리가 날 것처럼 작고 귀엽던 흰 꽃줄기를 떠올리며 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르가 만든 화단에는 늘 작은 꽃들이 계절마다 번갈아가며 꽃을 피웠다. 꽃이 진 자리마다 생겨난 열매들은 프리아의 간식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어주기도 했다.
“여기에서 가져간 겁니다. 제국의 국화지요.”
“제국의 국화였어? 은방울꽃이?”
큰 영토를 거느린 제국답지 않게 소박한 국화에 프리아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제국이라면 장미처럼 화려하거나 해바라기처럼 크기가 큰 꽃을 국화로 삼을 줄 알았다.
“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꽃입니다. 제 어머니도 좋아하셨죠.”
“기르의 어머님이 제국인이었어?”
“아버지도 제국인입니다. 대대로 이 나라에서 살아온 집안이죠.”
“기르가 제국 사람이었구나. 여기 오기 전까지는 제국인을 본 적이 거의 없어서 알아차리지 못했어. 그럼 기르는 고향에 온 거네?”
다행이다. 이 먼 곳까지 자신을 위해 달려와 준 기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던 프리아의 얼굴이 밝아졌다. 자신이 알훼니아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기르 역시 제국을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
“워낙에 변한 것이 없어 감흥이 느껴지지 않더군요. 근처에 제가 지내던 곳이 있는데 가 보시겠습니까?”
“응, 좋아. 가 보고 싶어.”
자신이 살았던 곳에 가 보자는 기르의 권유에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던 프리아는 곧 황제의 허락 없이 궁 밖을 나갈 수 없는 본인의 처지를 떠올리고 난처한 얼굴을 내보였다.
“궁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황궁에서 살았으니까요.”
그런 프리아의 마음을 짐작한다는 듯 기르가 웃으며 하는 말에 프리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황궁에서 살았다고? 기르가?”
“가 보시겠습니까? 오래 비워두어 먼지 냄새는 좀 나겠지만 프리아의 마음에도 들 겁니다.”
기르가 황궁에 살았던 제국인이었다니.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사실에 프리아는 느긋한 표정의 기르를 연신 올려다보았다.
“기르 혹시 황족이었어?”
“그렇게 불리던 시절도 있었지요. 그래도 저를 알아보는 이는 거의 없을 테니 지금과 달라지지는 않을 겁니다.”
“기르도 친구가 없었어?”
어딘가 기뻐 보이는 프리아의 질문에 기르의 입술이 호선을 그었다.
“저는 제가 만들지 않은 겁니다. 귀찮아서요.”
“왜 제국에서 계속 살지 않았어?”
“사고 치고 도망간 겁니다. 그리고 제가 없는 편이 형에게 도움이 되었을 테니까요.”
“왜?”
“저는 빼앗을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제 존재가 형을 불안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기르의 형님은 지금 어디 있는데? 지금은 제국에 없어?”
“작년에 돌아가셨더군요. 천수를 누리신 셈이죠.”
이상하다. 기르의 형이라면 아무리 나이차가 난다고 해도 노인은 아니었을 텐데 천수를 누렸다니. 그때 기르의 생김새와 나이를 물어왔던 시종장의 말이 프리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데 기르는 몇 살이야?”
돌이켜 생각해 보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린 시절에 처음 만났던 기르의 얼굴 역시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알훼니아에 있는 큰형님의 나이와 얼추 비슷하리라 생각했는데 그러자면 프리아와 처음 만났던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젊은 모습이어야 했다. 어렸던 자신이 청년으로 자라는 동안 기르는 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결같은 기르의 얼굴을 보면서도 지금까지 한 번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 자신이 갑자기 이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제 나이 말인가요? 하도 오래 살아서 언젠가부터는 세지 않았습니다만 시종장보다는 몇 살 많을 겁니다.”
“뭐라고?”
태연하게 답하는 기르의 말을 들은 프리아가 걸음을 멈춰 섰다. 프리아는 기르가 이끄는 대로 숲을 빠져나와 낯선 길을 걷고 있는 중이었다.
“궁금하시면 시종장에게 물어볼까요?”
“기르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머리의 대부분이 하얗게 세어버린 시종장과 여전히 짙은 밤색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는 기르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대조하던 프리아가 골이 난 표정을 지었다.
“불로의 비밀을 조금 엿보았거든요. 장생까지는 좀 더 두고봐야겠지만요.”
“무슨 소리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믿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쉽게 믿기지는 않을 이야기군요.”
“그것 봐. 역시 놀리는 거지?”
추궁하는 프리아의 말에도 계속 웃기만 하던 기르가 어느새 눈앞에 나타난 별궁을 가리켰다.
“다 왔습니다. 이곳이 제가 지내던 곳입니다.”
한때 프리아가 머물렀던 제비궁만큼이나 아담한 궁전이었다. 검은 벽돌을 쌓아 만든 별궁의 벽마다 담쟁이덩굴이 덮여 있었는데 여름에는 푸르렀을 잎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여기 말고도 한 곳 더 있었는데 지붕이 날아간 후로 수리를 하지 않아 폐허가 되었더군요. 아끼던 연구실이었는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숲 너머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기르에게 프리아가 질문을 했다.
“태풍이 불어서 지붕이 날아갔어?”
“제가 날렸습니다. 그때는 경험이 부족해서 불 조절을 잘하지 못했지요.”
답하는 표정이 너무도 태연해 농의 연장인지 진담인지를 구분할 수 없었다.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프리아에게 기르가 주머니에서 꺼낸 열쇠를 건넸다.
“그곳도 이후에 가 보도록 하죠. 열어 보세요.”
낡은 외부와는 다르게 열쇠구멍에 들어간 키는 부드럽게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열어본 현관 안에는 썩어 내려앉은 나무 자재들이 쌓여 통행을 방해하고 있었다.
“막혔는데?”
“이곳으로 들어갈 순 없겠죠? 그럼 어디로 가야 할까요?”
수수께끼처럼 던진 기르의 말을 들은 프리아가 서 있던 자리에서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온통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궁벽을 바라보고 있다가 한곳을 가리켰다.
“아직 기억하고 계셔서 다행입니다.”
정답이었다. 기르는 채집활동을 떠나 버려진 빈집에 머물 때면 들짐승과 도적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은신처를 만드는 방법과 입구를 위장하는 기술을 프리아에게 가르쳤다. 젊은 시절 한창 빠져 있던 잔기술을 별궁 두 곳에 설치해 두었는데 그 덕분에 시종들은 기르가 열어 주지 않고서는 처소에 들어오지도 못했다. 당시 형의 수족이었던 전대의 시종장이 찾아왔다가 덫에 걸려 성밖으로 튕겨나간 이후로는 누구도 쉽게 방문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덩굴 아래 가려진 입구를 찾아낸 프리아를 기르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들어갈까요?”
안은 역시 밖에서 보는 것만큼이나 엉망이었다. 시종장에게 소유권이 적힌 문서와 열쇠를 받아온 기르는 부러 층마다 어지럽게 널려 있는 잔해들을 치우지 않았다. 묵은 먼지는 제거했지만 멀리서 볼 때 쌓인 먼지로 보일 수 있도록 직접 배합한 가루를 뿌려두었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 역시 겉으로는 썩은 것처럼 보였지만 장정 여럿이 뛰어다녀도 될 만큼 튼튼했다.
다른 층과는 다르게 지하실의 내부는 깔끔하고 안락했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맡긴 프리아가 차를 준비해 오는 기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같이 살 때는 몰랐는데 기르는 참 별난 사람이야.”
“제가 키웠으니 프리아 님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왜 지하실만 치워뒀어?”
“여기서는 등불을 켜도 바깥에서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프리아 님이 언제든 혼자서 쉬고 싶을 때 오십시오. 누구도 찾지 못할 겁니다.”
아이가 없어졌다며 유모가 기르를 찾아올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면 프리아는 다락이나 옷장, 지하실의 바구니 같은 곳에 몸을 둥글게 말고 잠들어 있곤 했다.
“여기 진짜 엉망인데 이상하게 마음에 들어…….”
줄어들던 말소리는 이내 고른 숨으로 바뀌었다. 소파에 누워 그대로 잠이 든 프리아의 몸에 기르가 찾아낸 담요를 덮어주었다. 황제도 찾아낼 수 없는 이곳이라면 잠깐일지라도 숨을 편하게 쉴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