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디스가 아직 어리기는 해. 그래도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만큼은 진심인걸. 나를 위해 많이 노력하고 있어.”
비록 그 노력이 황제의 마음을 얻게 하는 일에 치중되어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신분이 후궁인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유디스는 임무에 충실할 뿐이었다.
“그렇습니까? 다른 꼬마와는 다르게 기특하군요.”
“다른 꼬마는 또 누구야?”
꼬마들 운운하는 기르의 말에 프리아가 의문을 표했다. 설마 이사벨과 올가를 말하는 것인가.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유디스만큼 자신에게 애착을 보이지는 않는다는 걸 프리아는 잘 알고 있었다. 프리아는 그 사실을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내 후궁인 자신의 시녀로 오게 된 그녀들의 처지에 오히려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황제 말입니다. 도착한 날 만나 보았는데 어제 태어난 핏덩이더군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는 제국의 황제를 감히 핏덩이로 취급하는 기르의 말에 프리아가 피식 웃음을 짓다가 급기야는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렇게 말하면 안 돼. 특히 시종장 앞에서는.”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기르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프리아가 염려를 표했다. 누구 앞에서건 늘 공손하고 정중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기르는 결코 단 한 번도 비굴해 보이거나 비겁해 보이지 않았다. 기르라면 진정 황제 앞에서도 당당한 태도를 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황제에게 어떻게 비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시종장이 아니라 황제라 해도 사람의 생각까지 강제할 수는 없지요.”
“그래도 황제가 화가 나면 기르를 내쫓을 수도 있잖아. 이렇게 겨우 다시 만났는데 헤어지고 싶지 않아.”
“염려 놓으세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불안한 표정을 한 프리아의 손을 잡아 다독이며 기르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황제는 자신을 함부로 쫓아낼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꼬마여도 프리아에게 단 하나뿐인 주치의인 자신이 필요하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눈치챘을 것이었다. 걱정되어 죽겠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가시를 세우며 자신의 정체를 캐묻던 황제를 떠올리며 기르는 프리아에게 고정했던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멀리서 시종장이 쩔쩔매며 황제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래도 나에게 질투하는 다른 꼬마가 황제라는 건 틀렸어. 기르가 잘못 생각한 거야.”
보나마나 자신이 그의 소유물이라는 이유만으로 권리와 의무를 행세하려 들었겠지. 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런 황제의 행동이 애정 표현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제가 잘못 본 것일까요?”
“응. 황제는 나에게 질투하지 않아.”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프리아의 표정은 허무하고 쓸쓸해 보였다. 그런 프리아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기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 있다가는 몸에 구멍이 뚫릴 것 같습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할까요?”
햇살이 따갑지도 않은데 이상한 소리를 하는 기르를 갸우뚱 쳐다보며 프리아 역시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저렇게 자꾸 웃는 건데.”
오웬의 발밑에 떨어져 있던 마른 나뭇가지가 퍼석 하는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조만간 제국을 방문한 타국의 사절들과 간단한 사냥 대회를 치를 예정이었다. 그에 앞서 사냥터 정비를 하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지나는 길에 들렀다며 자연스럽게 백조궁을 찾을 생각이었다.
백조궁을 코앞에 두고 오웬은 길에 멈춰 섰다. 사내 후궁 프리아가 주치의라는 자와 단둘이서 문을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뭐하는 수작인지 잠시 지켜보려만 했을 뿐인데 어느새 두 사람의 뒤를 쫓으며 오웬은 사냥터와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한 번도 해 준 적이 없는 백조궁의 정원 안내를 프리아가 사내에게 해 주고 있었다. 지어진 지 오래되어 고풍스러우면서도 대대로 황제의 큰 사랑을 받았던 후궁이 지내던 곳이라 곳곳마다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사방이 뚫린 정자는 물론이거니와 방 하나로 이루어진 작은 건물을 경치 좋은 곳마다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곳 중 어느 곳에도 오웬은 프리아와 방문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과도 아직 가지 않은 곳을 저 사내와 함께 가고 있다니.
이럴 수 있는가. 황제가 내어준 궁에서 후궁이 다른 사내와 저토록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정답게 걸어도 되냔 말이다. 뭐가 좋다고 저렇게 웃는 거야?
곁에 선 황제의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고 있던 시종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분이 원래 시니컬한 듯 보이시지만 의외로 유머 감각이 있으십니다.”
“그래? 내가 주치의가 아니라 광대를 궁에 들였나?”
삐딱한 오웬의 말투에 움찔한 시종장이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광대라니 아니 될 말씀입니다.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시피 유서 깊은 가문의 황, 아니 자제분이시지요.”
“어떤 유서 깊은 가문이 아들을 떠돌이 연금술사로 만들지?”
그 유서 깊은 가문이 바로 황실입니다.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다. 시종장은 진땀을 흘리며 유서 깊은 가문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 그것은 개인의 자유의사를 깊이 존중하는 가풍을 지닌 집안이라…….”
“그런 가풍이 있는 집안이라면 진작에 박살이 났겠지. 억압과 희생이 가문 유지의 첫째 조건 아닌가.”
그 어느 가문과 견주어도 이보다 강압적일 순 없다. 황실을 유지하기 위해, 황위를 잇기 위해서는 일개 가문의 수배에 달하는 희생이 필요했다. 시종장도 자신이 하는 말이 얼토당토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가 황실 종친 어르신을 시정잡배로 취급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워낙 영혼이 자유로우신 분이라 어른들도 함부로 하지 못하셨다 합니다.”
“시종장이 퍽이나 잘 알고 있군. 친척이라도 돼?”
“아이고 친척이라니요, 제가 어찌 감히. 황, 아니 자제분과 친척이 될 수 있겠습니까.”
“시종장 말만 들으면 저 사내가 나보다 더 높은 신분인 것 같아. 후궁도 그렇게 생각해서 저렇게 따르는 건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프리아와 기르를 손가락질해 보이며 오웬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아니옵니다, 폐하. 이 제국 내에 폐하보다 높으신 분이 계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프리아 님도 워낙 어리실 적부터 가까이 했던 분이라 반가운 마음에 저리 대하시는 걸 테지요. 기르 저, 아니 기르라는 자가 거의 키우다시피 하였다 들었습니다.”
“키웠다고?”
저 사내가 황실의 핏줄일 것이라는 오웬의 의심에 점점 쐐기를 박고 있는 줄도 모르고 시종장이 급히 부연했다.
“20년이나 직접 곁에서 프리아 님을 가르치며 키우셨다 하셨습니다. 거의 아비나 다름없죠.”
시종장의 말을 들은 오웬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코웃음 쳤다.
“아비라고? 저렇게 젊은 자가?”
“그렇게 젊지는 않으십니다. 저래 보여도 원숙하십니다. 나이가 꽤 드셨죠.”
“네 말대로 20년이라 했으니 그럼 프리아가 네 살 때부터 저자의 손에 컸다는 건데. 알훼니아에는 그리 인재가 없는가? 기껏해야 열대여섯 먹은 소년의 손에 아이를 맡기다니.”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흰 수염이 지긋한 학자들에게 황실 교육을 받아왔던 오웬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그것이…….”
저 분은 30년 전부터 저 얼굴이셨습니다, 라고 말해 봤자 세상 누구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가슴이 답답해진 시종장이 손을 들어 제 심장을 쳤다. 아랫것들이 해야 하는 사냥터 체크를 굳이 본인이 하겠다고 나서서, 사냥터와는 거리가 먼 백조궁 쪽으로 굳이 마차도 타지 않고 걸어오겠다 하여, 하는 수 없이 시종장이 따라 나선 길이었다. 핑계 대고 백조궁을 찾을 것은 알았지만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애꿎은 종조부를 비난하며 이리 시간을 지체하게 될 줄은 몰랐다.
“감히 손을 잡아? 저놈이…….”
프리아의 손을 잡아 도닥거리는 기르의 움직임을 본 오웬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그런 오웬의 표정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던 시종장이 다시 어설픈 두둔을 시도했다.
“프리아 님의 건강 상태를 살피고 계시네요. 주치의로서 마땅히 하셔야 할 일이죠.”
“시종장 눈에는 저게 주치의가 할 행동으로 보여?”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오웬의 손을 잡아 도닥거리며 시종장이 어색한 미소를 선보였다.
“폐하, 맥박이 빠르게 뛰고 계십니다. 이러지 마시고 들어가셔서 프리아 님과 담소도 나누시고 편안히 휴식을 취하시면 어떨까요?”
“내가 왜 백조궁을 가? 난 사냥터에 가는 길이다.”
아이고 그러문입쇼. 어서 사냥터로 가셔야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시종장이 공손한 자세로 오웬의 몸을 돌려세웠다. 몇 걸음 떼기도 무섭게 오웬이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로 간 거야?”
그 짧은 사이에 시야에서 사라진 두 사람의 자취를 오웬이 눈으로 쫓았다. 어디 으슥한 곳으로 함께 손잡고 숨은 건 아니겠지?
“저, 저어기 보이시네요. 숲으로 걸어가고 계십니다.”
시종장이 자작나무 숲을 향해 걷기 시작한 기르와 프리아를 가리켜보였다. 숲이라는 말에 더욱 사나워진 오웬의 눈이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숲에는 왜 가는데? 무슨 짓을 하려고?”
“무슨 짓을 하다니요, 저긴 유명한 산책로가 아닙니까.”
아이고, 폐하. 그러게 아까 그냥 들어가셔서 이야기나 나누자 그러셨어야죠. 아무리 프리아 님께서 폐하를 좋아하셔도 모질게 대하시면 마음이 변하기 마련입니다.
아이고, 기르 저하. 알 만한 분이 왜 자꾸 폐하를 놀리시는 겁니까. 이쪽 보시고 프리아 님 손 잡으신 거 다 알고 있습니다. 나이도 잡수실 대로 잡수신 분이 조카 손주를 괴롭히시다니요. 폐하께서 종조부를 질투하게 하시다니 황실이 콩가루가 되어 버리겠어요.
속에 있는 말을 차마 당사자 앞에 할 수 없는 기르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그러니까 산책을 왜 주치의랑 하냐고? 내가 태의랑 산책하는 거 봤어?”
“산책이 건강에 좋지 않습니까? 몸에 좋은 치료법을 행하는 거겠지요.”
눈에 거슬리는 떠돌이 연금술사를 자꾸 두둔하는 시종장의 태도에 결국 오웬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렇게 저 사내가 좋으면 백조궁으로 소속을 바꿔 줄게! 가 버려!”
“폐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속을 바꾸라니요?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저는 오직 폐하만을 모시겠다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질투에 불타는 어린 권력자가 당기는 분노의 화살을 온몸으로 맞게 된 시종장이 진땀을 흘리며 쩔쩔맸다.
“그런데 왜 자꾸 저놈을 편들어?”
“저놈이라니요! 아이고 폐하,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시종장은 내 편이야? 저놈 편이야?”
아이처럼 유치한 타박에 시종장이 입을 벌렸다. ‘시종장은 내 편이야? 아서 편이야?’, ‘그래, 시종장은 오웬 편이야? 내 편이야?’ 형제의 다툼을 중재하려다 받았던 유치한 질문이 십수 년 만에 다시 시종장에게 되돌아왔다. 아서의 사망 이후로 애어른이 되어 버렸던 오웬이 세월을 거슬러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기르 저하, 이런 기분이셨군요.’
아이가 떼쓰는 것처럼 어거지 타박을 받으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린 날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오웬을 향해 시종장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