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94)화 (95/237)

기르의 질문을 들은 프리아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순간이었지만 푸른 눈동자 속에서 요동치는 감정을 발견한 기르가 쓰게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상태가 나빠지게 된 가장 큰 원인이 바로 황제에게 있었군.

“황제는… 좋은 사람이야. 늘 정무 보느라 밤낮없이 일하거든. 나이는 어리지만 좋은 황제 같아.”

동요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를 쓰며 프리아가 물음에 답했다. 프리아의 대답을 들은 기르가 다시 질문을 했다.

“프리아 님에게도 좋은 사람인가요?”

“응, 나에게 잘해 줘. 나 원래 처소도 이곳이 아니었는데 황제가 옮겨 줬어. 주변 경관이 정말 아름다워. 보러 갈래? 내가 안내해 줄게.”

황제에 대한 화제를 피하고 싶은 것처럼 프리아가 밤 산책을 가자며 말을 돌렸다. 기르가 피곤한 시늉을 해 보이며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어두우니 날이 밝으면 가도록 하지요. 먼 길을 왔더니 몸이 피곤해 이만 쉬어야겠습니다.”

“어서 쉬어. 유디스가 방 안내해 줬어?”

반가운 말을 들은 표정으로 프리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상자에서 꺼낸 물건을 품에 안고 기르가 일어섰다.

“저도 프리아 님과 같은 층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밤중이라도 몸이 안 좋아지시면 바로 부르세요. 가까운 곳에 있겠습니다.”

유디스에게 부탁해 자신의 방과 연결한 침실의 설렁줄을 가리키며 기르가 프리아에게 말했다.

“나 오늘만 기르랑 같이 자면 안 돼?”

기르의 방문 앞까지 따라왔던 프리아가 눈치를 살피며 허락을 구했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이 소리를 들었다면 분노하며 달려올 꼬마 시녀를 떠올리며 기르가 웃었다.

“큰일 날 소리를 하시는군요. 이제 프리아 님은 후궁이 되셨으니 황제 외의 사람과는 함께 잠을 청하실 수 없습니다. 잠이 오지 않으신 거라면 이야기를 더 나눠 드릴까요?”

“아니야. 기르 어서 쉬어. 피곤하겠다.”

아쉬운 표정으로 프리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며 기르가 다시 한번 웃음을 지었다. 천둥이 무섭다며 울며 찾아오던 어린 프리아와 다 자란 후에도 채집 활동을 갈 때면 멀리서 우는 밤짐승 소리에 움찔하며 바싹 몸을 붙여오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프리아 님을 두고 누가 혼인도 마친 다 큰 사내라 하겠습니까? 갑자기 어린애가 되셨군요. 꿀 넣은 우유를 올리라 하겠습니다. 드시고 푹 주무세요.”

“알았어.”

기르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프리아는 아쉬운 마음에 뒤를 돌아보았다. 잠이 들 때까지 기르에게 자신이 얼마나 그를 그리워했는지 다시 만나서 얼마나 기쁜지 들려주고 싶었다. 그 어떤 주종 관계나 이해관계도 없이 무조건 제 편을 들어주는 존재를 다시 만난 기쁨이 커 자신도 모르게 자꾸 어리광이 나왔다.

사실은 정말 힘들었고 사무치게 외로웠다고 말하고 싶었다. 낯선 땅과 낯선 사람들, 자신을 경멸하던 황제와 뒤에서 수군거리던 사람들의 편견 가득한 소문과 억측 속에서 힘들게 버텨왔다고 털어놓고 싶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더라도 따스한 손에 의지해 안심하고 잠들고 싶었다.

자신의 방에 돌아온 프리아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왜 이러지. 심장이 아프게 조여들며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튀어나왔다. 그동안 약을 먹지 않았던 탓일까. 오랜만에 다시 먹게 된 약 성분에 몸이 놀란 탓일까. 기르의 방과 연결된 설렁줄을 바라보던 프리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먼 길을 걸어와 이제야 만나게 된 기르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침대 위에 쓰러져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던 사이에 창밖으로 달이 떠올랐다.

기르의 방에서도 보일까.

이곳이 궁이 아니었다면. 야외의 들과 산에서 잠드는 밤이었다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하나의 풍경을 눈에 나눠 담은 채 잠이 들었을 것이다.

저 호수에 비친 달이 얼마나 예쁜지, 은은한 빛이 물 위로 떨어져 기슭까지 퍼지는 그 광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프리아는 이야기하고 싶었다. 어둠을 녹이는 달빛을 바라보며 프리아는 어느새 까무룩 잠이 들었다.

오웬이 던진 돌이 호수면을 튕기며 한참을 날아갔다.

달빛이 내린 호수는 장관이었으나 오웬은 고요한 표면에 자꾸만 돌을 던지고 싶었다. 오늘밤도 통로를 걸어왔으나 후궁의 침실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후궁의 침실로 연결된 문을 한참 노려보던 오웬은 결국 돌아서 호수 입구로 향했다.

오웬이 선 위치에서 백조궁의 전면이 올려다보였다. 호수 방향으로 창을 낸 후궁의 침실은 한참 전부터 불이 꺼져 있었다.

‘절 취하려고 오신 게 아니라면 이만 나가주세요. 여긴 제 처소고 사적인 공간입니다. 앞으로는 이렇게 비밀통로로 불쑥 찾아오시지도 않으셨으면 해요. 정식으로 방문해 주셨으면 합니다.’

프리아의 말을 다시 떠올린 오웬이 돌멩이를 집어든 손에 다시 힘을 주었다. 아까보다 무거웠던 탓일까 돌은 기슭을 얼마 벗어나지도 못하고 호수 속으로 가라앉았다.

“……네가 뭔데 날 오라 마라 해.”

잠들어 이미 듣지도 못할 상대에게 오웬은 다시 분노를 터트렸다. 자신은 황제이며 후궁 한두 명 함부로 대한다한들 뭐라 할 사람도 없었다. 오지 말라고 했어도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뿐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들어가서 뭘 어쩔 거야.”

잘못했다 말하며 무릎이라도 꿇겠는가? 네 의무를 다하라며 붙잡아 침대로 쓰러뜨리겠는가? 그도 아니면 네 몸이 걱정되고 신경 쓰여 잠이 오지 않는다며 품에 안아 도닥거리기라도 할까?

셋 중 어느 것도 할 수 없다.

영토 범위에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황제가 고작 후궁 하나가 마음이 쓰여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니. 본인이 설계한 판 위에 서 있으면서도 오웬은 함정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토라진 린드가르트의 화를 풀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형의 모습이 떠올랐으나 오웬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과 후궁의 관계가 그 두 사람과 같을 순 없었다.

떠돌이 연금술사를 만나 믿을 수 있는 신분임을 확인했다는 시종장의 말에 오웬은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어느 가문 출신이냐며 따지는 오웬의 말에 시종장은 고명한 귀족 가문의 차남이며 장남이 작위를 물려받은 후 평소 뜻이 있었던 의술에 몸을 던진 초야의 의인이라는 믿을 수 없는 이력을 늘어놓았다. 시종장이 올린 낯선 가문의 문장을 오웬은 불쾌한 눈으로 응시했다. 집어던지듯 문장이 찍힌 종이를 다시 넘겨주자 신분만은 자신이 보장한다며 시종장이 고개를 조아렸다.

‘얼마나 대단한 가문이길래 내 앞에서도 그리 뻣뻣하게 행동할 수 있는 거지?’

‘뻣, 뻣하시다니요. 그러실 리가. 워낙 욕심이 없고 청렴하신 분이라 곧이 태도를 포장하시지 않은 것 뿐일 겁니다.’

‘그 말은 다른 사람은 모두 내 앞에서 포장된 태도를 보인다는 뜻인가?’

‘아이고, 아닙니다요. 어찌 폐하 앞에서 거짓된 태도를 보이겠습니까?’

‘시종장, 지금 하는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건 알고 있어?’

‘폐하, 소신이 아둔하여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아듣지 못하겠나이다.’

시치미를 떼는 시종장의 태도가 화가 난 오웬이 그를 물러나게 했다. 고명한 가문이니 뭐니 포장을 했지만 실상은 황가와 연결된 뒷배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오웬은 황실 가계도에서 누락된 직계나 방계의 자손이 없는지 그 자의 나이를 계산해 역순으로 되짚어 보기로 했다.

기르가 주방에 지시해 올리게 한 아침 식사를 프리아는 내키지 않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몸에는 좋지만 쓴맛이 강해 먹기 싫어하는 양치식물이 샐러드 재료가 되어 식탁의 한자리를 당당하게 점하고 있었다.

“어머, 이건 프리아 님이 못 드시는 건데 기르 님은 모르고 계셨나 봐요?”

몸을 가득 부풀린 거위처럼 당당하게 프리아의 옆에 서 있던 유디스가 호들갑을 떨며 샐러드 접시를 뒤로 물렸다.

“못 드시는 게 아니라 안 드셨던 거겠죠. 모르셨나 봅니다.”

뒤로 빠져 있던 접시를 다시 프리아의 앞으로 보내며 기르가 싱긋 웃었다. 자신의 눈을 쳐다보며 짓는 그 웃음에 프리아가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며 포크를 집어 들었다.

“내가 입맛이 조금 변해서. 하하하.”

연이어 프리아의 입 속으로 사라지는 샐러드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유디스가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그래, 프리아 님과 저 사내가 오래전부터 가까운 사이였다는 건 인정한다. 사심이 없다는 것도 아직 완벽히 믿을 수는 없지만 믿어 보려 하고 있다. 그래도, 저 사내가 아무리 프리아 님과 가깝다고 해도 자신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아니되었다. 프리아 님의 가장 근거리에서 시중을 들 수 있는 건 나뿐이어야만 해.

그동안 프리아와 가장 가까운 사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유디스는 스스로 사내 유모라 칭하는 기르의 등장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잘 드셨습니다만 그동안 편식을 하고 계셨군요.”

“아니야. 제국에 너무 맛있는 음식이 많아서 그걸 먹느라 바빴어.”

“당분간 매끼마다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젠 어린애도 아니시니 실수인 척 바닥에 흘리시지도 않으시겠지요?”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기르. 창피하게.”

얼굴이 빨개진 프리아가 기르가 잘게 썰어 주는 고기조각을 입에 넣었다. 도발에 걸려들어 평소보다 배가 넘는 양을 먹게 된 줄을 모르고 입을 우물거리며 투덜거린다.

낯설다. 다른 이에게 저토록 허물없이 구는 프리아 님이.

섭섭하다. 유디스 자신은 알지 못하는 둘만의 추억과 교감을 나누는 프리아 님이.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함께했던 가족 같은 사이라 하니 지극히 당연한 광경임에도 불구하고 유디스는 질투에 휩싸였다. 더 먼저 태어날 것을.

자신도 모르는 새, 소원이 할머니가 되어 버린 유디스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삐쭉거렸다.

“프리아 님 덕분에 이 늙은이가 핏덩이들에게 질투를 다 받아 보는군요.”

“누가 질투를 해?”

식후 산책을 가자며 프리아가 기르를 밖으로 끌어냈다. 풍요롭게 조성된 정원들과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분수, 호수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지어진 정자를 자랑하며 이곳저곳으로 끌고 다녔다. 잠시 쉬어가기 위해 앉은 정자에서 기르가 꺼낸 말에 프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꼬마들이요.”

꼬마 시녀와 꼬마 황제. 경계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노려보던 두 사람을 떠올리며 기르가 답했다.

“꼬마가 어디 있… 아, 유디스?”

“친구를 빼앗긴 듯한 표정이던데요.”

그리고 다른 꼬맹이는 아내를 뺏긴 듯 굴고 있지. 멀리서 지켜보는 황제와 시종장의 모습을 발견한 기르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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