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호한 기르의 말에 딱히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한 시종장이 한숨을 쉬며 시선을 피했다. 황제는 자신에게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자식 같은 존재였다. 기르의 마음 또한 그와 같을 것이라 생각하니 황제에게 시달리다 앓아눕기까지 한 프리아를 본 기르의 심정이 어떨지 물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저하의 저택과 영지는 바로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만 다른 분들께는 어찌 말씀드리면 좋을까요? 나이 든 대신 중에서 저하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가 나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안톤 자네도 나를 내 아들로 오해하지 않았나? 집요하게 물어보는 사람이 나오면 그렇게 둘러대게. 알아보는 이가 많지도 않을 테고 보통은 그저 닮은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겠는가?”
화제를 돌리듯 시종장이 꺼낸 말에 기르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황위에 관심을 갖지도 않았지만 설령 가졌다 해도 형의 심기를 거슬려 괜한 분쟁을 일으키고 싶지도 않았다. 사교계에 얼굴을 비추지도 않고 홀로 별난 연구에 빠져 있는 괴짜를 황족이라 한들 누가 제대로 상대하려 들었겠는가. 전속 시중을 들었던 시종과 시녀들도 모두 궁을 떠나 조용히 노후를 보내고 있거나 나이 들어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다.
“진정 폐하께도 알리지 않으실 작정이신가요?”
아쉬운 마음에 시종장이 다시 기르에게 물어왔다. 황제는 다양한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과학 지식이 뛰어난 종조부가 곁에서 이끌어주며 쌓인 경험을 전수해 준다고 하면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당장은 그럴 생각이 없어. 필요하다면 그때 밝히겠네.”
“선황께는 가 보셨습니까? 크게 앓아누우신 후로는 옛날 생각이 많이 나신다며 가끔 저하의 안부를 묻곤 하셨습니다.”
“형님이야 저세상에서도 여인들 쫓아다니면서 잘 지내고 있을 테지. 한번 가 보기야 하겠지만 혼은 이미 여기 없을걸세.”
그렇게 여러 나라에서 후궁을 데려와 품었어도 황가의 후손은 많이 늘어나지 않았다. 어느 나라에 머물렀어도 제국의 황제에 대한 이야기는 가끔 들려왔기에 크게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후궁을 또 들였군 하고 형의 지치지 않는 정력에 쓴웃음을 지었을 뿐이다. 그저 남의 일이라 여겼다. 제 손으로 키운 아이가 후궁이 되어 제국으로 떠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프리아 님의 건강은 어떠신가요? 갑자기 쓰러졌다 하시어 폐하께서 걱정이 많으셨습니다.”
다시 나온 황제의 얘기에 기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젊은 황제가 보였던 눈빛이 프리아에 대한 걱정인지 소유욕인지 아직은 판단내릴 수 없었다.
“사람을 끌고 가 빗속에서 그렇게 고생을 시키다니 제정신인가. 그래놓고 이제 와서 걱정을 한다고?”
그날 추적에 동원되었다고 하는 경비병의 이야기를 들었던 기르는 크게 분노했다. 황제가 프리아에게 애정을 품건 품지 않건 그리 대해서는 아니 되었다.
프리아가 궁에서 황제의 사랑을 받으며 잘 지낸다고 했던 대공의 이야기와는 딴판이었다. 대공에게 보내는 편지는 물론, 돌아올 자신에게 전해 달라 남긴 편지에서도 프리아는 늘 즐겁고 행복하게 지낸다는 말밖에 쓰지 않았다. 여인도 아닌 사내 후궁으로 궁에 들어갔으니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1년 만에 이렇게 상태가 나빠져 있을 줄이야.
“폐하께서도 프리아 님을 아끼십니다. 그것만큼은 이 안톤이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하의 피붙이 아니십니까? 어린 나이에 아비와 형제를 잃고 외롭게 자라셨습니다. 조금만 따스한 눈으로 지켜봐주세요.”
“우리 애도 힘들게 자랐어. 우리 애도 외롭게 자랐다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기르가 시종장의 말을 반박했다. 황제 또한 떠돌이 연금술사라 칭하며 기르를 경계하는 눈치였으니 정체를 밝히지 않는 이상은 쉽게 친해질 수 없을 것이다. 지끈지끈 아파오는 머리를 짚으며 시종장이 반문했다.
“프리아 님께는 형제가 여러 명 있지 않으십니까?”
“있으면 뭘 해. 애가 클 때까지 자기들 동생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던 사람들이네.”
“그러셨습니까. 그래도 대공께서는 프리아 님을 많이 아끼시는 눈치던데요?”
“아끼기야 하겠지. 속으로 아껴봤자 무슨 소용인가. 행동을 해야지.”
내심 몸까지 약한 프리아를 후궁으로 가게 두었던 대공가의 형제들을 향한 서운함을 품고 있던 기르가 툴툴거렸다. 폐하께 하시는 말씀입니까? 억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시종장은 기가 죽어 반박하지 못했다.
“시간이 늦었군. 이만 가 봐야겠어.”
창밖의 풍경이 어두워지는 것을 본 기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를 배웅하며 시종장이 말했다.
“처소는 어디로 정하셨습니까? 저택을 쓰시려거든 제가 정리해 놓겠습니다. 다만 오래 비워 두었던 곳이라 1, 2주 정도는 기다려 주셔야 합니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고 그냥 둬.”
“예?”
“재미삼아 설치해 놓은 것들이 아직 작동할지 몰라.”
“설치라니요? 대체 무엇을…….”
발을 들이는 동시에 몸이 터져나가는 상상을 하며 시종장이 몸을 떨었다. 그런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기르가 마지막 말을 남겼다.
“우리 애 몸이 많이 약하네. 함부로 대하다가는 후회할 거라 전해.”
“기르! 어디 갔다 왔어?”
내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르를 본 프리아가 무작정 쫓아다니던 어린 시절처럼 쪼르르 달려왔다. 그 모습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기르가 답했다.
“본궁에 다녀왔습니다. 시종장께서 찾으셔서요.”
“시종장이? 기르에게 엄격하지 굴진 않았어?”
깐깐한 노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프리아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신분이야 큰형님이 보장해 주었겠지만 기르가 정식 의사는 아니었던지라 증명서를 내놓으라고 까다롭게 굴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친절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급여도 높게 책정해 주셨던데요?”
기죽은 얼굴로 항변하던 시종장의 모습을 회상하며 만족스럽게 웃던 기르가 공손히 대답했다.
“그래? 다행이다. 기르, 이쪽으로 와 봐.”
눈에 띄게 안심한 프리아가 기르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 손에 끌려가며 기르가 프리아에게 다시 물었다.
“시종장께서 프리아 님께 엄격하게 굴던가요?”
“아니, 잘해 주셨어. 잘해 줬어.”
“어떻게 잘해 주시던가요?”
기르에게 구체적인 질문을 받은 프리아가 눈동자를 굴렸다. 잘해 주긴 했는데 그게 과연 잘해 준 것이냐 따진다면. 프리아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황제의 지시를 따른 것이 대부분이었다.
“어… 이것저것 많이 알려 줬어.”
황제의 출생에서부터 사소한 일화까지 초상화를 앞에 두고 오랜 시간 들어야 했던 그날의 강의를 떠올리며 프리아가 얼버무렸다.
이것저것이라니. 들어보나마나 황제에게 유리한 정보였겠지. 프리아의 표정을 보고 내용을 짐작한 기르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 봐 봐. 내가 기르한테 주려고 모은 거야.”
의상실로 기르를 데려간 프리아가 구석에 있는 옷장의 문을 열어 커다란 상자 하나를 꺼냈다. 남은 간식이며 각종 잡동사니가 담긴 상자를 옷장에 몰래 숨겨두던 어릴 적 버릇이 여전해 보이는 프리아의 모습에 기르가 미소를 지었다.
“열어 봐! 빨리.”
웃기만 하는 기르의 모습을 본 프리아가 재촉해 댔다. 기르가 연 상자에는 여러 권의 책과 신체 모형 그리고 말려 둔 약초가 들어 있었다. 꺼내 든 책이 최신 연구 자료가 수록된 의학서임을 알게 된 기르가 놀란 시늉을 해 보였다.
“이걸 다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다 귀한 것들이네요.”
“친구가 구해 줬어. 그리고 약초는 내가 캐서 말려 둔 거야.”
전공자에게 유통되는 자료라 발매 전부터 미리 예약을 해 놓지 않고서는 일반인은 구하기 힘든 물건들이었다. 이미 다 읽은 책과 가지고 있던 자료가 대부분이었지만 기르는 진심으로 기쁜 표정을 지었다.
“고생하셨군요. 친구도 만드셨습니까?”
직접 수집한 약초를 제외하고는 다 바이런이 구해 준 것들이었다. 주치의라는 자신의 거짓말에 속아 선물로 주었던 것들이었지만 기르가 기뻐하는 것을 보니 바이런에 대한 고마움이 커졌다.
“바이런이라고 황제 친척인데 나에게 잘해 줬어.”
“황제의 친척이라고요?”
친척이라는 말에 황족일까 싶어 프리아에게 묻자 황제의 외사촌이며 의정대신인 페르마 공의 아들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친분은 없지만 젊었을 적 이름을 들어보았던 공작가의 후손임을 알게 된 기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 말고도 또 친구가 있습니까?”
“악센다르 후궁인 레지나 공녀와도 친해. 그리고 마티아와 비슷한 나이인 로잔나라는 아이도 있고 모란궁 후궁인 마가렛이라는 아이도 있어.”
“마티아 님과 또래라니 그렇게 나이 어린 후궁도 있습니까?”
나이 든 황제가 자신보다 수십 살이 어린 후궁을 두는 예는 적지 않았다. 아직 현황제의 나이가 젊어 후궁의 나이 또한 어린 것이었다. 실제로는 열몇 살의 나이 차에 불과했지만 대여섯 살의 나이로 후궁이라니. 듣기만 해도 끔찍했다. 기르가 처음 프리아를 만났던 시절에 후궁으로 데려간다는 자가 있었다면 그자를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프리아 또한 어린 조카를 보낼 수 없어 후궁을 자처했겠지만 부모나 다름없는 기르의 심정으로는 다 자란 프리아라고 해도 궁에서 빼내오고 싶을 정도였다. 아픈 몸으로 어렵게 자라나 혼인한 후에도 후궁전에 갇혀 같은 처지의 후궁들과 친구가 되다니. 내세울 수 있는 친구라는 게 고작 황제의 친척이라는 자와 후궁들뿐이라니. 자세히 묻지 않아도 프리아가 궁 안에서 어떻게 지내왔는지 기르는 짐작할 수 있었다.
딱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기르를 눈치챈 프리아가 과장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완전 아기들이야. 정말 귀여워. 다른 후궁들도 다 예쁘고 귀여워. 내가 거기 끼는 건 좀 이상하지?”
“이상합니다. 프리아 님이 예쁘고 귀여워서가 아니라, 사내라서가 아니라. 후궁전의 존재 자체가 기이합니다. 저 혼자 좋자고 여러 여인들을 새장에 가둔 거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기르의 눈에는 여전히 제일 예쁘고 귀여운 프리아였지만 꽤 자란 후에는 그런 표현보다는 멋지다는 말을 듣길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르의 말을 들은 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기르의 말이 맞아. 내가 황제라면 후궁전을 없애 버렸을 거야.”
“저도 황제였다면 후궁 제도를 폐지했겠지만 안타깝게도 기회를 이미 놓쳤네요.”
공국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후궁제도이고 공국에서도 정치적 이해관계가 달려 있어 환영한다고는 하나 희생되는 인간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기적인 변명에 불과했다.
“다시 태어나야겠네.”
기회를 놓쳤다는 기르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인 프리아가 피식 웃었다. 그런 프리아를 바라보며 기르가 나직이 질문을 던졌다.
“황제는 어떤가요? 어떤 사람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