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92)화 (93/237)

기르가 하는 말을 들은 시종장이 눈동자를 깜박거렸다. ‘우리 애’라니. 아까 분명 아들은 없다고.

“따님이 계셨습니까?”

“무슨 소리야? 아직 미혼일세.”

“방금 분명히 우리 애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프리아 말이야.”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기르의 말에 시종장의 눈이 크게 뜨였다.

“프리아 님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럼 프리아 님의 친부가…….”

“아까부터 무슨 헛소리인가. 꼭 낳아야만 자식인가. 근 20년을 내손으로 키우다시피 했으니 이젠 내 애나 다름없지.”

“프리아 님을 기르 저하께서 키우셨다고요? 아니, 대체 알훼니아에는 왜 가 계셨던 겁니까? 주치의는 또 뭐고요?”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다가 거기까지 흘러갔지. 날씨도 좋고 사람들도 순박하니 마음에 들더군. 유유자적 1년쯤 약초 연구나 하다가 떠나려고 했는데 자꾸 눈에 밟히지 뭐야. 그땐 아주 작고 귀여웠거든.”

프리아의 유년기를 떠올리던 기르가 미소를 머금었다. 기억은 곧 그해 봄날로 향했다.

풀무질을 해 키워 낸 불이 둥근 유리 용기를 뜨겁게 달궜다. 색이 변하기 시작한 액체를 주의 깊게 관찰하던 기르가 단지의 뚜껑을 열어 소금 한 스푼을 꺼냈다. 끓어오른 액체 위로 소금을 뿌리자 톡톡 튀는 소리를 내며 용액이 넘치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런.”

소금이 아니었나. 잠시 골몰하던 기르는 다른 단지에서 푸른빛을 띠는 가루를 퍼 다시 용액 위로 뿌렸다. 가루가 녹아들어 푸르게 변한 용액을 보며 안심한 것도 잠시, 유리 용기 속에서 펑 소리를 내며 푸른 연기가 솟아올랐다.

실패군. 낙심한 기르가 산소를 차단해 불을 껐다. 자욱한 연기를 손부채로 헤치고 있을 때 머리 위에서 흥분한 아이 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뭐야? 구름을 만들었어?”

웬 아이 목소리인가. 황급히 연 창문으로 연기가 빠져나가자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앉아 있는 작은 몸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또! 또 해 봐! 이번엔 빨간 구름 만들어 줘.”

내가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던가. 가늘게 눈을 뜬 기르가 꼬마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조막만 한 흰 얼굴에 붙어 있는 커다란 파란 눈이 반짝이는 빛을 담고 기르를 내려다보았다.

“또 해 줘! 응?”

솜털 같은 금발 머리카락이 아이의 고갯짓에 따라 흔들렸다. 그림에서나 볼 법한 아기 천사의 등장에 당황한 기르가 계단을 올라와 아이의 앞에 섰다.

“아가, 너는 누구니?”

“나는 프리아야! 너는 누구야?”

기르의 질문을 따라한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주를 허락받기 위해 만났던 대공의 연한 갈색 머리를 떠올린 기르가 아이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나는 기르라고 한다. 아가야, 너는 어디서 왔니?”

기르의 물음에 아이가 손가락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이 성에 사는 아이인가. 기르가 상냥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어디 계시니?”

“없어.”

아이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대공의 아이도 아닌가. 작고했다던 전 대공의 소생으로 보기엔 나이차가 심했다. 아이의 정체를 추리하고 있을 때 복도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리아 님! 프리아 님! 어디 계시나요? 목욕하실 시간입니다!”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아이가 움찔했다. 그러더니 눈동자를 굴리며 굳게 다문 입술에 검지 손가락을 갖다 댔다. 알겠다는 듯 기르가 행동을 따라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의 얼굴 위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이것이 기르와 프리아의 첫 만남이었다.

이건 뭐고, 저건 뭐야? 귀찮게 따라다니며 질문하던 아이는 기르가 책을 보는 동안에 의자에 앉아 잠들었다. 가벼운 몸을 안아들고 복도로 나서자 그때까지도 아이를 찾아 헤매던 나이 든 여인이 놀라 달려왔다.

“프리아 님!”

유모의 품에 아이를 넘긴 기르가 통성명을 하자 여인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이름과 아이의 정체를 말해 주었다. 작고한 대공이 늘그막에 얻은 아이었으나 그 어미가 출산 직후 세상을 떠났고 대공 역시 오래 살지 못하고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인은 프리아의 외조모가 어릴 때부터 그 집안에서 일하던 몸종이었으며 손녀와도 같은 아가씨를 돌보기 위해 이곳까지 따라왔다고 했다. 갑자기 대공위를 승계하게 된 프리아의 형제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조용히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했다.

“프리아 공자님이시군요. 형제들과 닮지 않아 몰라 뵈었습니다.”

기르의 말에 여인이 입을 다물었다. 프리아는 사실 대공가의 핏줄이 아니었다. 자작가의 차녀였던 프리아의 모친은 어린 나이에 임신했고 그 사실을 알자마자 부친의 분노가 두려워 호수에 몸을 던지려했다. 부친의 친구였던 알훼니아 대공이 자작가를 방문하던 중에 그녀를 구했다. 사연을 알게 된 대공이 아이의 부모를 자처하자 자작은 분노하면서도 구혼을 받아들였다.

온화한 성격의 대공은 딸처럼 그녀를 아끼고 돌보았다. 대공에게 늘 감사하면서도 미안해하던 아가씨의 유지에 따라 여인은 부모 잃은 프리아를 가능한 대공의 친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조용히 키웠다. 꽃같이 여리고 아름다웠던 아가씨의 외모와 약했던 체력을 그대로 빼어 닮은 아기는 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때문인지 유달리 잔병치레가 심했다.

“몇 살이죠?

어두워지는 여인의 표정을 알아챈 기르가 말을 돌렸다.

“네 살이에요. 네 살치고는 너무 작지만.”

“또래 친구는 없습니까?”

“마을에 나가면 있기야 하겠지마는 공자님을 여염집 아이들과 어울려 놀게 할 수가 없죠. 제가 연로한 까닭에 종일 프리아 님의 뒤를 따라다니려니 힘이 부치네요. 혹 앞으로도 프리아 님이 귀찮게 하시거든 타일러서 돌려보내 주세요.”

“폐가 되지 않는다면 가끔 돌봐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전히 근심 가득한 얼굴로 여인이 감사 표시를 했다. 그 후로 종종 프리아는 기르의 연구실에 놀러오게 되었다.

“뭐해?”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기르가 웃으며 돌아보았다. 기후가 좋은 곳이라 잘 자랄 것을 예상해 그동안 들렀던 나라에서 가져온 씨앗을 땅에 몇 개 심었는데 벌써 싹을 틔웠다.

“물을 주고 있습니다. 물을 많이 마셔야 무럭무럭 자라나거든요.”

“내가 줘도 돼? 내가 주고 싶어!”

발까지 동동 구르는 아이의 몸짓에 기르가 물조리개를 넘겨주었다. 그리 크지 않은 물통임에도 받아든 아이의 몸이 휘청했다.

“프리아 님도 많이 드셔야 키가 자라십니다. 힘도 세지고요.”

“나 많이 먹고 있어. 괴물이 나한테 밥 많이 먹으라고 했어.”

아이는 상상력으로 친구를 만들어냈다. 괴물이 밤이면 옷장에서 걸어 나와 신나게 놀아주고 간다고 했다.

“또 괴물을 만나셨습니까? 이번에는 뭐라고 하던가요?”

“싸우는 법을 알려 줬어! 누가 못되게 굴면 이렇게 앙! 하고 물어 버리면 된대!”

거의 웅덩이를 만들어 놓은 프리아가 물조리개를 내려놓고 양손을 쥐었다 펴 보이며 입을 벌려 깨무는 시늉을 했다.

“정공법은 아니지만 꽤 쓸 만한 공격이 되겠군요.”

“정공법이 뭐야?”

“정면으로 돌파하는 걸 말합니다.”

“돌파는 뭐야?”

“장애물이나 어려움을 뚫고 지나가는 것이죠.”

“장애물이 뭐야?”

“나아가지 못하도록 앞을 가로막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앞에 선 기르가 길을 막자 프리아는 입술을 내밀어보이다 다리 사이로 빠져나갔다.

“나 지금 돌파했지? 그렇지?”

“샛길로 빠져나가신 것에 가깝지만 뭐, 그렇다고 해두죠.”

낯선 단어가 맘에 든 듯 프리아는 ‘돌파! 돌파!’ 외치며 뛰어다녔다. 잠시 후, 조용해진 까닭을 그저 잠이 들었으려니 생각했던 기르가 채집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프리아 님?”

풀숲에 쓰러져 있는 아이의 얼굴이 코피로 얼룩져 있는 것을 발견한 기르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여인이 그토록 조용히 프리아를 혼자 키우려했던 이유 중의 하나를 그날 알게 되었다. 아이의 몸이 약하고 지병이 있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다. 그 이유가 또한 기르를 쉽게 떠나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몇 년 지나자 아이보다 앞서 유모가 사망했다. 자신만을 믿고 따르는 아이를 데리고 산과 들로 다니며 많은 것을 가르쳤다. 그렇게 지나온 세월이 벌써 20년이었다.

“폐하께 저하의 정체를 밝히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시종장의 물음에 먼 과거를 헤매던 기르의 시선이 현재로 돌아왔다. 코웃음을 치며 기르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밝히면 믿기는 하겠나?”

고집 세고 오만해 보이던 황제의 얼굴을 떠올리며 기르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알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실 어르신이라고는 거의 돌아가셔서 기르 저하밖에 남지 않으셨습니다. 곁에서 도와주시면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애를 그렇게 키웠나. 고생을 얼마나 시켰으면 우리 애 얼굴이 반쪽이 다 되지 않았겠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얼마나 착하고 바르게 자라셨다고요? 살아 계셨으면 진작 오셔서 저희 폐하를 도와주셨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각자 키운 아이들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 그러나 후궁에 대한 황제의 행동에는 켕기는 데가 없다고는 할 수 없어 시종장이 먼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직 경험이 부족하셔서 서투르실 때가 있습니다.”

변명처럼 꺼낸 시종장의 말에 기르의 표정이 매서워졌다.

“일국의 황제가 아닌가. 그런 변명은 꺼내지도 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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