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91)화 (92/237)

“유디스! 발밑 조심해! 위험…….”

여러 조각으로 깨진 물병의 파편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디스가 프리아에게로 달려왔다. 그러더니 기르의 허리를 잡고 있는 프리아의 손을 급히 떼어 놓았다.

“프리아 님! 안 돼요!”

뭐가 안 된다는 건지. 그녀의 행동에 당황한 프리아가 유디스를 쳐다보았다.

“유디스, 왜 그래?”

“아무리 폐하께 화가 나셔도 그렇지. 이러시면 안 돼요!”

“내가 뭘 했는데?”

“프리아 님이 저분의 허리를 막 끌어안으시면서 보고 싶으셨다고,  안 돼요! 제 입으로는 더 말할 수 없어요!”

제 입으로 말은 다 해 놓고 손끝을 떠는 유디스를 프리아가 기가 찬 표정으로 다시 쳐다보았다. 설마 지금 나와 기르의 사이를 오해한 거야?

“프리아 님, 이분은 누구십니까?”

마치 무슨 영문인지 모른다는 것처럼, 기르가 시치미를 떼고 소녀의 정체를 프리아에게 물었다. 나 정말 창피하다, 유디스. 프리아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수석시녀를 기르에게 소개했다.

“유디스, 내 수석시녀야. 제국에 왔을 때부터 날 도와줬어.”

가끔 충성이 지나쳐 지금처럼 헛발질을 하기도 하지만 유디스가 없었다면 후궁전에서의 외롭고 긴 나날을 버텨낼 수 없었을 것이다. 프리아는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는 유디스에게도 기르를 인사시켰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돌봐준 분이야. 그러니 이상한 생각 하지 마.”

“기르라고 합니다, 레이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유디스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기르는 여유 있는 태도로 정중한 인사를 했다.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을 더해 눈앞에 서 있는 낯선 사내가 프리아 님이 고국에 두고 온 잊지 못하는 첫사랑은 아닐까, 유디스는 의심하고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폐하께 고했다가는 프리아 님도 위험해질 수 있으니 좋게 타일러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유디스, 기르는 내 가족이야. 전에 왔던 로한 형님이나 던컨과 마찬가지라고.”

실제로는 전에 제비궁을 방문했던 그 두 사람보다도 더 오랜 시간을 함께했으며 누구보다 친밀한 사이였다. 먼 길을 마다하고 달려와 준 기르 앞에서 이런 오해를 받게 되다니. 이보다 더 민망할 수가 없다.

“……진짜 가족 같은 사이에요?”

그래도 경계를 풀지 않으며 유디스가 기르를 슬쩍 다시 올려다보았다. 일전 만나 보았던 프리아 님의 가족을 보면서는 이런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었다. 다른 시녀들의 반응도 달랐다. 그 두 사람을 보았을 때는 저분들이 프리아 님의 가족이냐, 저게 알훼니아 유행인가 보다 하고 복식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기르라는 자를 먼저 본 시녀들은 하나같이 멋진 분이라며 얼굴을 붉히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그게 문제였다. ‘그림’이 된다는 것. 차분한 인상을 가진 지적인 미남이 최근 들어 수척해져 더욱 청초해 보이는 프리아 님과 함께 있으니 그 풍경이 마치 그림과도 같았다. 차갑고 수려한 미모를 지닌 황제와 프리아가 함께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워 감탄을 자아내면서도 가슴 어디선가 긴장을 자아낸다면 눈앞의 두 사람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편안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갑자기 기침을 하는 프리아의 어깨에 이불을 끌어올려 주는 기르를 보며 유디스는 눈매를 치켜올렸다.

“프리아 님이 아직 어린 아이셨을 무렵부터 돌봐드렸습니다. 그러니 그냥 사내인 유모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레이디께서도 유모의 손에 크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유모는 당신 같은 미남이 아니라서요. 푸근한 인상을 지닌 중년 여인과 눈앞의 사내를 비교하면서 하는 수 없이 내키지 않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알았어요.”

“그래, 유디스. 그러니까 더는 오해하지 말아 줘.”

유모는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프리아는 할 수없이 덩달아 미소를 지어보였다. 후궁이 되고부터 온갖 오해를 받아왔지만 하다하다 이제는 기르와의 사이를 의심받을 줄이야.

미혼의 남녀가 한자리에 있게 되면 동석하는 샤프롱처럼 유디스는 내내 프리아의 침실을 지켰다. 프리아가 물어보는 알훼니아의 가족들의 안부를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며 기르 역시 곁을 지켰다.

다시 잠에 빠진 프리아가 고르게 숨을 내쉬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기르는 가져왔던 짐을 챙겨들었다.

“제가 머물 곳을 안내받을 수 있을까요? 가능한 프리아 님의 방에서 가까운 곳이었으면 합니다.”

“다른 건물의 처소를 쓰셔야죠. 후궁의 처소에 사내가 기거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경비병과 시종들이 쓰는 처소를 안내해 줄 생각이던 유디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저는 프리아 님의 주치의입니다. 갑자기 몸이 좋지 않아지셨을 때를 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사내가 하는 말이 일리는 있었다. 오늘처럼 갑자기 프리아 님이 쓰러지실 것을 생각한다면 가능한 주치의가 가까운 곳에 머무는 편이 나았다.

“2층의 비어 있는 방을 쓰세요. 시중 들 아이가 필요하면 붙여 드리겠습니다.”

경계를 완전히 푼 것은 아니지만 프리아 님의 얼굴을 보아서라도 소홀히 대접하지는 않아야겠다 결심한 유디스가 얼굴을 들었다.

“배려는 감사하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혼자 지낸 지 오래되어서요. 식사 외에는 제 스스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옷차림은 평범했지만 말투나 애티튜드를 보아서라도 평민은 아닌 것처럼 보였던 사내가 시중을 거절했다. 그러고 보니 입궁 초기, 스스로 하겠다며 시중을 거절해 프리아 역시 유디스를 난감하게 했던 과거가 있었다. 실랑이 끝에 프리아는 시녀들의 시중을 받아들였지만 굳이 사용인에 해당하는 사내에게 그렇게까지 애를 써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아무리 가족 같은 사이라고는 하지만 프리아 님께 예의는 지켜 주세요. 프리아 님은 이제 알훼니아의 공자가 아니라 폐하의 후궁이 되셨으니까요. 꼭 지켜 주시리라 믿어요.”

콧대를 높이며 엄포를 놓는 유디스를 기르가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렇게 어린 소녀가 수석시녀를 맡았다는 것은 프리아의 향한 제국인들의 시선이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명심하도록 하죠.”

야무지게 경고하는 모습이 꼭 하룻강아지 같아 웃음이 나오면서도 기르는 정중하게 몸을 숙여 답을 했다. 프리아는 어린 시절부터 무언가를 주워오기 일쑤였는데 둥지에서 떨어진 어린 새끼 새에서부터 고슴도치, 상처 입은 들개, 성에 공연을 하러 온 광대 패거리의 원숭이까지 그 종류도 다양했다. 그 중에서도 기세로 따지자면 이 꼬마 아가씨가 으뜸이었다.

‘그동안 내 아가가 심심하지는 않았겠군.’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종장의 집무실까지 기르를 안내한 시종이 문을 열었다. 저녁 무렵 본궁의 시종이 알훼니아에서 온 사내를 찾았다. 앞으로는 황궁 소속이 되어 녹봉을 받아야 하니 총 관리를 맡은 시종장의 허가가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기르가 안으로 들어서자 시종이 밖으로 나가 다시 문을 닫았다.

“저를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궁을 관리하는 각 부서에서 날아든 청구서를 쳐다보고 있던 시종장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아, 자네가……. 자, 자네가! 이럴 수가!”

“알훼니아에서 온 기르라고 합니다.”

사내를 올려다본 시종장의 얼굴이 경악으로 휩싸였다. 말을 더듬어대는 시종장을 본 기르가 빙그레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안톤.”

“기, 기, 기르 저하가 아니십니까? 아, 아니 이게 무슨. 말이 안 되는!”

30년 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난 황실 악동의 모습에 기르가 소리를 내질렀다. 내가 꿈을 꾸는 것인가. 헛것을 보았나. 혹시나 싶어 꼬집어 본 뺨에서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이제는 시종장인가? 출세했군.”

“유, 유령이 되어 나타나신 건가요? 어찌 이런 일이!”

“아쉽지만 아직 살아 있네. 나를 불렀다고 해서 왔는데 그렇게 소리만 지르고 있을 건가?”

권하지 않아도 알아서 의자를 끌어다 앉는 기르의 천연덕스러운 모습에 시종장이 다시 두 눈을 비볐다.

“이게 말이 됩니까? 저하의 나이 올해 예순다섯인데 그 모습이라니요? 궁을 떠나셨던 그때와 달라지신 것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달라진 게 없긴. 많이 변했네.”

놀란 마음에 삿대질까지 하던 시종장이 떠오른 의문에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기르 저하의 아드님이 되십니까? 저하께 들으신 말씀으로 저를 놀리고 계신 게 아니냔 말입니다.”

“나에게 아들은 없는데? 놀라는 까닭은 이해하지만 이제 좀 진정을 해 줬으면 좋겠어.”

“제가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귀신의 조화도 아니고! 어찌 그 모습 그대로시란 말씀이십니까? 저를 보십시오. 저는 이렇게 늙어 버렸지 않습니까?”

눈앞에 보이는 모습을 믿을 수 없어 기르 저하를 쏙 빼닮은 자식은 아닐까 의심하던 시종장이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켜보였다. 본인만 차분하고 듣는 사람 열 받게 하는 저 말투를 보아하니 틀림없는 기르 본인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어찌 사람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있겠는가.

“나도 늙긴 했어. 몇 년 전서부터는 흰머리도 나던걸.”

“몇 년 전이요? 전 이미 백발이 된 지 오래입니다. 그리고 머리만 조금 세었지. 얼굴은 뻔질뻔질한 그대로시라고요.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여전히 미남인 기르의 얼굴을 바라보며 시종장이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판 것일까. 어릴 적부터 몹쓸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물건이라면 분해하고 죽은 동물의 시체는 해부했으며 결국 실험을 거듭하다 별궁의 지붕을 날려 버리기까지 한 망나니 황족이었으니 자신의 궁금증을 해소해 준다면 설령 악마와의 계약이라도 덥석 받아들일 위인이었다.

“나도 몰라. 처음 10년째는 알아차리지도 못했지. 20년째에 들어서고 나서야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네. 젊을 때와 완벽히 같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세월이 좀 비껴가고 있다는 걸 느꼈어.”

“악마와 계약을 하신 게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의심에 가득 찬 눈매로 자신을 살피는 시종장의 몸짓에 기르가 쓴웃음을 지었다. 제 몸에 실험한다고 먹었던 각종 약물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시종장 말대로 악마와 계약을 하고서 그대로 잊어버린 것일까. 원인을 정확히 짚을 수는 없지만 짐작되는 것 한 가지는 있었다.

“안톤 자네가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언젠가 내가 이 황궁에서 작은 실험을 하나 하지 않았던가.”

“실험이야 늘 하셨었죠. 그러시다가 별궁 지붕까지 날려 버리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그 실험. 내가 실은 그때 형님이 숨겨 두신 걸 몰래 가져다가 좀 가지고 놀았는데. 지붕까지 날려 버릴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지.”

황제가 애지중지하며 비밀 금고에 보관해 두던 약병을 꺼내 일부를 덜어왔다. 영생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신비한 약의 정체를 까발릴 속셈이었다. 한참 빠져 있던 과학 실험도구에 옮겨 분해 작업에 열중하던 그때 램프가 폭발하며 실험실 가득 연기에 휩싸였다. 정신을 잃었던 까닭에 별궁의 지붕까지 날아가는 대사고가 벌어졌다는 건 나중에 전해 들었다.

몸이 회복된 후 자신은 형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황궁에서 도망쳤다.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자신에게만 시간이 멈춰지다시피 느리게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 약이 정말 영생을 유지시켜 준 것일까. 그때 들이마셨던 증기에는 약 성분이 농축되어 들어 있었을 것이다.

“폐하께서, 아니 선황께서 화가 많이 나셨습니다. 그래도 나중에는 저하를 그리워하셨어요. 폐하께서 몰수하셨던 영지와 저택을 언젠가 저하가 돌아오면 돌려드리라 하셨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생을 꿈꾸던 황제는 먼저 세상을 떠나고 자신만이 남아 세월을 비껴가게 되었다. 묘한 표정으로 창문 밖 궁정을 내려다보던 기르가 시종장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래? 그럼 어서 내놔. 우리 애 갖다 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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