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90)화 (91/237)

문이 열리는 소리에 사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오웬이 입고 있던 복식으로 그가 황제임을 알아본 사내가 정중히 자세를 낮췄다.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오웬의 말을 들은 사내가 물 흐르듯 우아한 동작으로 인사를 마치고 다시 일어섰다.

“그대가 알훼니아에서 온 기르라는 자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저를 찾고 계시다는 말을 대공께 전해 들었습니다.”

사내의 입에서 막힘없이 제국어가 흘러나왔다. 제국어가 공용어로 쓰이는 까닭에 각 공국인들은 유창하게 제국어를 구사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투에는 여전히 각 공국 특유의 악센트가 남아 있었다. 사내 후궁 또한 알훼니아 특유의 악센트를 가지고 있어 가끔 독특한 울림을 오웬에게 들려주곤 했다. 그러나 눈앞의 사내에게서 흘러나오는 제국어에는 그 어떤 공국의 억양도 섞여 있지 않았다.

떠돌이 연금술사라는 말을 듣고 오웬은 그의 신분을 중인 계급이거나 기껏해야 하급 귀족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의 억양과 인사를 올리는 몸동작에서는 오랜 시간 엄격한 상류층의 교육을 받아 온 흔적이 엿보였다. 고위 귀족 출신이거나 더 나아가서는 황가의 피가 섞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한 탓일까 어쩐지 얼굴 또한 낯설지 않고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 가문 출신이지? 틀림없는 제국인으로 보이는데.”

“가문이라 말할 것도 없는 한미한 출신입니다. 젊을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랏일을 하셨다고는 들었습니다.”

빙그레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사내에게서는 감히 황제와 처음 마주한 하위 귀족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기백과 여유가 묻어나왔다. 그에 대한 불쾌한 궁금증을 뒤로 하고 오웬은 우선 사내 후궁의 상태를 묻기로 했다.

“내 후궁을 오랜 시간 돌봐온 주치의라고 들었다. 갑자기 쓰러졌다고 하는데 어찌된 연유인지 말해.”

프리아를 ‘내 후궁’이라 칭하는 오웬의 말을 들은 사내의 입가에 미세한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사내는 곧 고개를 돌려 잠들어 있는 프리아를 내려다보며 답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막 도착한지라 그간의 상황을 알 수 없어 확정지어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워낙 몸이 약하셨던 분이라 제국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잔병치레가 심해진 것은 아닐까 추정됩니다.”

“최근 들어 피를 자주 흘린다고 하는데 그것도 잔병치레에 속하는가.”

“아이였을 적에 주무실 때면 늘 코피를 쏟곤 하셨습니다. 겨울이면 더 심해지시곤 하는데 알훼니아에 비해 워낙 기온이 낮은 곳이라 프리아 님의 몸이 더욱 약해지신 듯합니다.”

“그렇지만 작년…….”

작년 겨울에는 이렇지 않았다 그리 말하려던 오웬이 입을 다물었다. 막 즉위를 마쳤던 작년 겨울에는 사내 후궁의 건강 상태는커녕 존재조차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작년 가을, 기르는 안식년에 들어가기 앞서 프리아에게 온갖 영약을 먹여 통통히 살을 찌우고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어 놓고 떠났었다. 그리 해 둔 덕분에 제국의 추위를 마주하고서도 크게 앓지 않고 버텨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어두워지는 황제의 얼굴을 바라본 기르가 담담한 말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시녀에게 들으니 최근 찬비를 오래 맞아 고뿔을 앓으셨다 합니다. 원래 체력이 좋으신 분이 아니셨던지라 몸에 무리가 온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제가 살뜰히 살필 터이니 크게 염려하지 마십시오.”

말을 마친 사내가 때마침 신음을 뱉어 내는 프리아의 이마를 짚었다. 그러고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꼼꼼히 땀을 닦아 주더니 아이를 재우는 것처럼 다정한 손길로 도닥거렸다. 거창한 조치를 취한 것도 아닌데 금세 차분해지는 후궁의 숨결을 오웬은 무력한 기분에 휩싸여 내려다보았다. 저 사내가 도착하길 기다렸음에도 막상 마주하니 심기가 불편해지는 이유를 오웬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프리아 님이 깨어나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왜 아직도 그러고 서 있냐고 물어 오는 것처럼 사내가 빤히 오웬을 쳐다보았다. 백조궁의 시녀는 애타게 황제를 찾았으나 막상 오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다시 편 오웬이 서늘한 표정으로 후궁의 침실을 빠져나갔다.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젊은 황제의 퇴장을 웃으며 지켜보던 기르가 잠든 프리아에게로 속삭였다.

“아가, 얌전히 잘 먹고 잘 자고 있으라고 했더니 어쩌자고 저런 어린애한테 시집가 버렸단 말이냐.”

장미궁에 간다던 황제가 씩씩거리는 얼굴로 돌아오자 시종장은 쩔쩔매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황제를 따라갔던 시종관이 황제의 등 뒤에서 시종장을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장미궁은?’ 입 모양으로 물어오는 시종장에게 시종관이 양손을 교차해 흔들어 보인다. 황제를 곁눈질하고 다시 물어오는 시종장에게 시종관이 요란하게 손을 움직여 보였다. 저건 백조궁을 가리키는 암호인데 프리아 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그자가 도착했다.”

“예? 폐하? 그자라고 하심은…….”

마침내 입을 연 황제의 말에 시종장이 의문을 표했다. 밑도 끝도 없이 ‘그자’라고 하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알훼니아 주치의 말이다. 그 떠돌이 연금술사.”

“아, 그자가 도착했습니까? 예상보다 빨리 왔네요.”

“지금 만나고 오는 길이다. 제국 출신이더군. 어떤 인간인지 어느 가문 출신인지 샅샅이 조사해. 태의도 보내서 실력을 검증해.”

“제국인이었군요. 귀족입니까?”

“못해도 고위 귀족. 어쩌면 황가의 어느 정신 나간 인간이 싸지른 방계일지도 모르지. 선황을 닮았어.”

“선황제 폐하 말씀이십니까?”

예상도 못한 소식에 시종장의 입이 벌어졌다. 공식적인 후궁과 비공식적인 정부에 더해 하룻밤 스쳐간 여인들도 많았던 선황제였으니 혼외 자식이 존재할 가능성이 없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본인 말로는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고 하던데 그런 것치고는 태도가 묘하게 당당해서 말이야.”

“알아보겠습니다.”

갑자기 황위계승서열을 주장하는 황손이 나타나도 곤란하다. 물론 직계여야 가능한 이야기였고 방계라면 권한조차 없었다. 직계 혈족들은 모두 궁의 가계도에 그 출생이 기록되어 있으니 방계일 가능성이 높았다.

“장미궁에 가셨던 일은 어찌 되셨습니까?”

장미궁의 일을 묻는 시종장의 말에 오웬의 눈이 치켜올라갔다. 백조궁 일에 휩쓸려 잠시 잊었지만 건방진 주치의의 신분을 캐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기는 했다.

“대공에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본궁 알현실로 오라고 해.”

잠시 후, 굳은 표정을 한 아스문드 대공이 알현실을 찾았다. 이어진 회의에서 저마다 공국 규모에 맞는 병사와 물자를 차출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미 준비된 제국군의 규모 또한 상당하여 무리한 지원을 요구하지 않았다.

대공들은 그 어느 공국에게도 힘을 실어주지 않는 황제의 정책에 다들 실망하면서도 내심 안도했다. 균형의 유지도 파열도 젊은 황제의 발끝에 달려 있었다. 그 걸음이 자신에게로 행하기를 공녀들은 바라고 또 바랐다.

프리아는 눈을 떠 자신의 곁에 앉은 기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꿈결에서 본 것이 아닐까. 눈을 감았다 떠 보아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기르의 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진짜 기르 맞아?”

아까는 멀쩡히 일어나 약까지 받아먹고서는. 잠자고 일어나 딴소리를 하기 시작하는 프리아를 기르가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럼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새 제 모습이 달라지기라도 했나요?”

“아니, 똑같아.”

마치 어제 보고 다시 보는 것처럼 태연하게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기르의 손길에 프리아가 뺨을 갖다 댔다. 만나자마자 부리는 프리아의 어리광에 기르의 눈매에 온기가 서렸다.

“다 큰 지가 언젠데 어리광입니까. 제멋대로 결혼까지 하셔놓고는.”

“화났어?”

“났지요. 몸이 이게 뭡니까? 손목이 톡 부러질 것 같군요.”

“안 부러져.”

과장 섞인 기르의 말에 프리아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부러지면 기르가 고쳐 줄 거잖아?”

“제 능력을 과대평가하시는군요. 이 상태로는 쉽게 붙지도 않을 겁니다. 약은 언제부터 드시지 않았죠?”

“한 달 보름쯤 되었나. 다 기르 때문이야. 새까맣게 만들어 놓으니까 시녀들이 쥐똥인 줄 알고 다 버렸잖아.”

자신을 탓하는 프리아의 말에 기르가 콧방귀를 뀌었다.

“간수를 하지 못한 본인 탓이죠. 한 달 반 먹지 않은 것치고는 상태가 꽤 심각한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기르의 질문을 들은 프리아가 눈동자를 굴리며 말을 돌렸다. 그저 후궁 노릇을 충실히 했을 뿐이다.

“아무 일도 없었어. 기르는 그동안 어디 있었어? 몇 나라나 가 봤어? 어디가 제일 좋았어?”

“그건 앞으로 차차 말씀드리죠. 색이 예쁜 꽃들을 많이 모아서 이번에는 다행히 검은 색은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까 드셨던 것 색이 기억나시나요?”

“아니. 기르가 그냥 입에 넣어 버렸잖아.”

꿀꺽 침을 삼키자 올라오는 쓴맛에 진저리를 치며 프리아가 대답했다. 품 안에서 주머니를 꺼낸 기르가 보랏빛을 띠는 환약을 그 안에서 꺼내 보여 주었다.

“색이 그러니까 독약 같아.”

“독약이죠. 다른 사람이 먹으면 죽습니다.”

그러니 조심히 간수하셔야 해요. 말을 마친 기르가 살이 내린 프리아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다시 한번 혀를 찼다.

“여기 음식이 입에 맞지 않던가요? 얼굴이 그게 뭡니까?”

“아니. 맛있는데 입맛이 없어. 계절 타나 봐. 그런데 기르, 나 목말라.”

언제부터 그런 걸 타셨다고. 계십시오, 물 가져오겠습니다. 못마땅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일어서는 기르의 허리를 프리아가 뒤에서 끌어안았다.

“기르, 너무 보고 싶었어!”

“아이고, 다시 어린애가 되셨군요. 이걸 놓으셔야 물을…….”

쨍그랑, 갑자기 난 소음에 두 사람이 일제히 문 쪽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열린 문으로 물병을 들고 들어오던 유디스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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