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예뻐도 그렇지.
황제의 귀에 들어간다면 경을 치고도 남을 소리를 지껄이던 관리는 한참이 지나고서야 아쉬운 기색을 보이며 사내를 놓아주었다. 그는 잠시 후 미리 준비해온 간식을 꺼내먹기 위해 책상 서랍을 열고나서야 잊고 있던 공문의 존재를 떠올렸다. 알훼니아에서 오는 방문자는 지체 없이 통과시키라는 내용이었다. 뭐, 보내줬으니 되었겠지. 관리는 거친 빵의 표면을 뜯어 창문 앞에 뿌려놓았다. 새가 날아든다. 오늘도 평화로운 북문의 풍경이었다.
황제가 장미궁을 찾았다.
즉위 후 처음으로 황제를 맞이하게 된 장미궁의 궁인들은 설렘과 흥분으로 들떠 일손이 잡히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들은 기대에 찬 눈동자로 황제가 들어간 2층의 방을 연신 흘끔거렸다. 신이 나 이곳저곳에 황제의 방문 소식을 떠들어대고 돌아온 어린 시녀가 일의 진행을 동료에게 물었다.
“어찌 되었어? 폐하께서 로제타 님의 침실로 들어가셨어?”
“아직 알현실에서 대화 나누시는 중이셔. 다른 궁에서는 뭐라고 하던?”
“뭐라고 하기는. 부러워죽지. 아닌 척하려고 애쓰던데 내 눈에는 다 보이더라니까.”
“백조궁에도 갔어? 거기 반응은 어때?”
또래 시녀들의 기대 가득한 눈빛이 한곳에 모여들었다. 그 시선을 받은 어린 시녀가 어깨를 한껏 으쓱거리며 입을 열었다.
“난리났지 뭐. 그렇지 않아도 폐하께서 발길을 끊은 지 한참 되었대.”
그간 백조궁 시녀들의 위세를 아니꼬워하던 시녀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건 시작일 뿐이다. 보지 않았으면 모를까. 아름답고 우아한 로제타 님을 보고 사랑에 빠지지 않을 남자가 있을까.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지? 날 여기까지 불러낸 목적을 말해 봐.”
황제의 차가운 물음을 받은 로제타의 입술이 긴장으로 떨렸다. 오랜 기간 사내 후궁을 제외한 나머지 후궁들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했던 황제다. 그렇기에 그가 자신을 보는 순간 첫눈에 사랑에 빠져 그간의 외면을 사죄하며 따뜻이 품에 안아 줄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앞으로 서로를 알아갈 잠깐의 시간만이라도 내어주기를 바랐다.
황제가 택할 수 있는 최적의 황후는 자신뿐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부정하지도 않았다. 후궁은 총애의 대상이지만 황후는 신뢰의 대상이었다. 가장 큰 사랑을 받을 수는 없어도 가장 오래 황제의 곁에 머물 존재였다.
그럼에도 로제타 자신은 부질없는 기대를 품고 있었던 것 같다. 후궁행 통보와 함께 건네받은 초상화를 보는 순간 이미 그녀는 그에게 마음을 내어 주었다. 설렘으로 가득 찼던 제국행은 곧 무료한 일상으로 바뀌었지만 언젠가 그를 독대하게 된다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 다짐했다. 태어나 자라오면서 늘 존중과 이해와 애정이 담긴 시선만을 받아왔던 까닭에 누구든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면 서로를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낙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눈앞의 황제는 로제타가 태어나 처음 마주하게 된 벽이었다. 로제타가 무슨 말을 할지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차가운 냉소를 보내는 황제와 마상 대회 결승전 날 투구를 벗으며 환하게 미소 짓던 청년은 같은 사람이 맞을까. 그날 설렘으로 떨렸던 심장이 무색하게 싸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황제는 로제타를 여인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그의 연심의 대상에 여인이 들어 있기는 했을까.
황제는 장미궁에 도착하자마자 로제타가 그를 미리 맞이할 준비를 해놓은 응접실이 아닌 알현실로 향할 것을 명했다. 사적인 응접실이 아니라 공적인 알현실을 택한 것이다.
황제가 손도 대지 않은 차가 식어 가고 있었다. 로제타는 떨리는 마음으로 부친이 준비해 준 마지막 패를 던졌다.
“감히 마음에 품어 달라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여인으로 대해 주세요. 폐하의 아이를 낳고 싶습니다.”
로제타의 말을 들은 오웬의 눈에 불쾌감이 서렸다. 몸은 언제든지 내어줄 것이나 취할 생각이 없다면 찾아오지도 말라던 사내 후궁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이 후궁이건 저 후궁이건 누굴 색에 미친 놈으로 아는지.
“그 말인즉슨 황후의 자리를 달라는 건가?”
“아닙니다. 그저 황손을 낳아 폐하의 치세에 보탬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싸늘한 오웬의 말투에 놀란 로제타가 고개를 내저었다. 황제의 취향이 여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후계는 반드시 필요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어느 후궁이든 황손을 낳게 될 것이다. 어차피 그리해야 한다면 그 기회를 자신이 먼저 붙잡을 생각이었다. 아스문드의 희생을 피할 수 없다면 이 정도의 대가는 받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적의 황후가 그대라는 사실에 동의해.”
다음 순간 흘러나온 황제의 말에 로제타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이어진 다음 말이 그녀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아직 그리하지는 않을 생각이야. 그대의 공국이 감당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원만을 받겠다. 이다음은 그대의 부친과 직접 이야기하도록 하지.”
아직이라는 단어에 희망을 걸어도 될까. 혼란에 휩싸여 깜빡이는 그녀의 귓가로 바깥의 소란이 들려왔다. 알현실 문 앞에 서 있던 리엔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왔다. 궁 출입문 앞에서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장미궁의 시녀들이 문 앞을 에워싸고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와서 이런 무례를 저지르시는 거죠?”
“당장 끌어내요! 다들 경을 치러야 정신 차리겠어요?”
“욕심도 과하지! 그동안 그렇게 폐하를 독차지했으면 되었지. 여기까지 찾아와 훼방을 놓을 셈이야?”
“돌아가! 우리 로제타 님을 방해하지 말라고!”
경비병에 제지당한 백조궁 시녀가 버둥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폐하를 뵙게 해 주세요! 꼭 드려야 할 말씀이 있어요! 폐하! 폐하!”
분노에 찬 리엔이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수치도 모르고 사내 후궁이 제 수족을 보내 황제의 시선을 끌려는 모양이었다. 듣던 대로 성격이 간요하기 짝이 없는 후궁이다. 얼마나 기다렸던 황제의 행차였던가. 이 순간을 방해하는 인간이 있다면 누구라도 도륙을 낼 각오가 되어 있었다.
“어서 그 입 다물게 해. 폐하가 와 계신데 이 무슨 소란이란 말이냐.”
리엔이 지시한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알현실에서 걸어 나온 황제가 계단 아래를 노려보고 있었다. 황제의 뒤를 따라나온 로제타가 불안한 얼굴로 사촌인 리엔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버둥거리는 유디스를 발견한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백조궁 아이가 아니더냐? 여기까지 무슨 일이지?”
황제의 시선을 받은 백조궁 시녀가 더욱 큰 몸집으로 버둥거렸다. 놓아주라는 황제의 명령에 풀려난 유디스가 황급히 계단을 올려오려다 장미궁 시녀들에 의해 제지당했다. 길이 막히자 유디스가 위쪽을 올려다보며 다시 소리를 쳤다.
“폐하! 큰일 났습니다! 프리아 님이 쓰러지셨어요!”
유디스의 말을 들은 오웬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야? 또 왜?”
“갑자기 피를 쏟으시더니 정신을 놓고 쓰러지셨어요! 폐하! 태의를 불러 주세요! 상태가 위중하십니다!”
황제가 뛰다시피 계단을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관에게 태의를 불러오라 지시하더니 백조궁 시녀를 앞장세워 장미궁을 빠져나갔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장미궁이 소란스러워졌다. 기어코 요부 같은 사내 후궁이 황제를 꾀어 데려갔다며 저주하듯 부르짖는 유모의 말을 들으며 로제타는 그저 망연히 서 있을 뿐이었다.
“피를 쏟았다니 어떻게 된 거야? 자세히 말해 봐.”
얼결에 황제의 마차에 함께 올라타게 된 유디스가 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 무작정 장미궁으로 달려오긴 했는데 황제가 자신의 말을 들어줄 줄은 몰랐다.
“요즘 계속 코피를 쏟으세요. 프리아 님께서 숨기셔서 저희도 오늘에야 알았어요. 피 묻은 옷과 손수건을 몰래 처리하셔서 모르고 있다가 그만…….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너희 앞에서 감췄다고? 그렇다면 언제부터 그랬는지도 모른다는 말이 아니냐?”
“밤에 입혀드린 침의를 갈아입으신 지는 꽤 되었습니다. 제가 부족하여 일찍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낮에는 그저 기운 없는 모습만 보이셔서 고뿔 때문에 그러신 줄 알았습니다. 그동안 밤마다 혼자 앓으셨던 것 같아요.”
그날 새벽 창백한 얼굴로 자신을 맞이하던 후궁의 모습이 오웬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방문을 거절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까. 침통해진 황제의 얼굴을 올려다본 유디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한숨을 내쉰 오웬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있었던 정황을 자세히 말해. 어느 것도 빼놓지 말고.”
유디스는 황제에게 아침부터 일어난 일을 바른대로 고했다. 프리아는 식사를 마치고 정원을 잠깐 걷다가 돌아와 내실에서 책을 읽었다. 그리고 유디스가 몸 상태를 묻던 순간 시녀 아이가 들어와 소리쳤었다.
“……폐하께서 장미궁의 로제타 님께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그 자리에서 다시 피를 흘리시며 쓰러지셨습니다. 아이들이 궁정의를 부르러 갔는데 저는 폐하께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 장미궁으로 왔어요.”
궁을 떠도는 소문 중에는 황제가 다른 후궁에게 가지 못하도록 사내 후궁이 엄살을 부려 앓아눕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럴 성격이 아니지. 사내 후궁을 찾았던 수많은 날, 그가 원했던 밤은 없었다. 더는 찾아오지 말라며 내쫓기기까지 했는데 처음으로 자신이 다른 후궁의 처소를 방문한 순간 쓰러지다니. 공교로운 일이었다.
“제가 잘 살펴드리지 못하여 태의께서 오셨을 때 물으신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물으셨던 증상이 지금 프리아 님의 상태와 비슷한 듯합니다. 비를 맞으신 후로 계속 몸이 좋지 않으셨어요.”
오웬의 눈치를 살피며 유디스가 말을 이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오웬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 탓이군. 돌려 말할 것 없다.”
“아닙니다, 폐하. 제가 어찌 감히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하겠습니까. 모든 것이 다 제 불찰입니다.”
유디스가 끝도 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사실 황제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모든 궁 안에 총애를 받는다 소문이 나 있었지만 프리아를 가장 가까이 지켜보는 유디스의 눈에는 무조건 좋은 일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프리아 님을 아끼시는 듯 보였다가도 툭하면 발길을 끊고, 비를 맞아 앓는 사람을 두고 나가서는 지금까지 돌아오지도 않았다. 과연 황제의 총애가 좋기만 한 것일까. 유디스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뛰쳐나간 유디스가 결국 황제를 데리고 돌아오자 시녀들이 감동한 얼굴로 반겨주었다. 태의의 도착 여부를 묻는 유디스에게 시녀들이 대답했다.
“태의께서는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는데 알훼니아에서 오셨다는 분께서 프리아 님을 뵈러 들어가셨어요.”
“프리아 님을 어렸을 때부터 돌봐주셨던 주치의라고 하셔요.”
“멋진 분이세요. 알훼니아에는 다 미남만 있나 봐요.”
“그런데 알훼니아 사람 안 같지는 보이지 않아?”
황송한 얼굴로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던 시녀들이 뒤에서 나누는 대화에 오웬의 발이 멈췄다.
“알훼니아에서 주치의가 왔다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폐하. 어찌나 명의이신지 프리아 님도 바로 정신을 차리셨다가 다시 주무시고 계세요.”
결국 왔군. 기다리던 사내의 등장이었다.
이름으로만 들었던 후궁의 스승이자 주치의라는 자를 이제야 만나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오웬이 후궁이 잠든 침실의 문을 열었다. 곧 그의 시선 속으로 침대 옆에 선 사내의 뒷모습이 들어왔다.